편향된 세상의 정치와 언론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은 정치와 언론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민주주의와 언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변화가 민주주의와 언론의 발달이 아니라 그것들의 위기를 향하고 있음이 점차 분명해 보인다. 기술의 발달이 사회의 퇴보와 함께 가는 예상치 못한 모순의 양상을 띄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정보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모순적이게도 ‘가짜뉴스’가 창궐하고 정치적 극단주의가 횡횡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이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단 한 세기도 버티지 못했다. 경제적 평등 대신 불평등이 확대되고, 대화와 상호 이해 대신 단절과 혐오가 증가하며, 정치적 화합과 포용 대신 정치적 갈등과 배제가 점점 더 일상이 되어가는 모습이 우리를 때 아닌 실망과 비관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혹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우리 사회–다른 나라도 대동소이 하지만–를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 편향과 편향 동화의 늪에 빠트린 것은 아닐까?

“I trust this site to tell the truth.”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만을 찾아나서는 경향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확증 편향을 갖고 있다. 자신의 믿음과 객관적 데이터 사이의 불일치, 소위 인지부조화(conginitive dissonance)를 해소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확증 편향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의 경우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면 대체로 자신이 지닌 기존의 인식이나 지식을 변경해서 인지부조화를 해결한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학교나 언론의 교육 효과이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해석이나 믿음에 관련된 판단의 경우는 그보다 좀 복잡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에 집착한다. 그것은 자존심이나 자긍심, 나아가 자기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때문에 최대한 자기 생각이나 믿음을 지지해주는 정보 혹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 즉, 자신의 가치 성향에 맞는 사람, 단체, 종교, 언론매체 등을 찾게 된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게 하는데 비용이나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속마음은 바꾸지 않은 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대충 어울려 살았다. 확증 편향을 실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생활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제 아무리 휘귀한 발상, 상상, 몽상, 혹은 입장도 확증을 구하기가 쉽다. 유튜브, 다음 까페, 트위터, 페이스북, 카톡방 등이 24시간 대기 중에 있다. 소셜미디어의 발달한 머신 러닝, AI 기술은 조금만 내 성향을 노출해도 득달같이 입맛에 맞는 자료를 추천해 준다.

그러니 내 생각과 믿음을 바꿀 필요가 없다. 자신의 생각과 믿음이 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훌륭하다고까지 부추겨 주는 유튜브 채널이 널브러져 있는데 굳이 자신의 생각과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려 드는 대중매체나 유튜브 채널을 찾겠는가.

확증 편향의 용이성과 편리성, 그리고 아부(?)에 길들여 지면 자신의 생각, 믿음, 혹은 입장과 다른 정보를 기피하게 된다. 잔소리 듣기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인지부조화를 즐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생활 자체도 고달픈데 말이다.

확증 편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정보를 대면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해 버린다. 아니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버린다. 소위 편향 동화(biased assimilation)가 발생한다. 확증 편향과 편향 동화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패키지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찾으려 하거나(확증 편향), 중립적인 정보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거나 그런 부분만 취사선택한다(편향 동화).

이러한 사회심리적 경향이 남북분단(혹은 진보-보수 대립)이라는 사회구조를 만나면, 그것은 쓰나미가 되어 정치와 언론을 모두 쓸어버린다.  정치는, 적을 경쟁자로, 경쟁자를 친구로 만들면서 권력을 쟁취하는 품위있는 게임이 아니라 총만 들지 않았지 죽기살기로 싸우는 적나라하고 극단적인 권력투쟁이 되어 버린다. 언론도 편가르기 싸움이 된다. 진실을 주인으로 섬기는 언론사나 언론인은 설 자리가 없다. 어느 쪽이든 진영에 확실히 참여해야 살아 남는다. 진실이 아니라 당파성이 언론을 지배하는 규칙이 되어 버린다.

최근의 정치가 극단적인 투쟁의 양상을 띄게 된 것은 특정한 정치인 개인 탓이라고 볼 수 없다. 정치판에서 절제와 규칙 준수의 원칙이 사라져 버린 가장 중대한 요인은 분단의 고착과 정보기술의 발달이다.

언론사가 3류 기업이 되고 언론인이 ‘기레기’가 되어버린 가장 중대한 요인도 특정 언론사나 언론인 탓이 아닐 아니다. 그것도 분단의 고착과 정보기술의 발달이다. 인터넷 사용자들의 클릭과 조횟수에 목을 매야 하는 슬픈 현실이 언론의 실종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2019-10-01)

현대의 정치, 무엇이 문제인가?(2)가치 배분

정치에서 권력투쟁과 가치배분이라는 두 측면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매일 매일 접하는 언론의 정치 관련 뉴스를 보면, 권력투쟁에 관한 뉴스의 양이 가치배분에 관련된 뉴스의  양을 압도한다.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전자가 후자보다 분명히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뉴스에는 언론이라는 매개체의 관점과 이해가 관여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뉴스에서 보이는 비중의 차이는 두 가지 다른 원인 때문일 수 있다. 정말로 권력투쟁이 가치배분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고, 언론이, 가치배분보다 권력투쟁이 더 많은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중 어떤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언론사들이 시청률과 조회수에 목을 매는 최근의 현상을 볼 때 후자 쪽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아무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금언이 정치 뉴스보다 더 잘 들어맞는 경우는 없지 않나 싶다.

조국 교수가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고 나서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은 가장 핫한 뉴스는 조국 교수의 딸이 동양대학교에서 받은 표창장에 관한 것이었다. 반면에 후보자의 능력이나 소신은 고사하고 후보자 자신의 비리나 부정에 관한 뉴스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이 현상이 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 때문은 아니었을까? 물론 일부 야당이나 검찰의 권력 투쟁 아젠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가치 배분의 측면에서 우리 정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언론 뉴스를 아무리 뒤져도 이 의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다음은 국회의 의안정보시스템에서 찾은 20대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법제정 현황이다.

제20대 국회가 개원된 이래 현재까지 총 2만1천578건의 법안이 발의되었고, 그중 6천350건이 처리되었다. 국회의원들이 싸움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싸우다가 회기 막판에 무더기로 통과된 법률안도 적지 않겠지만 법률안을 만들거나 검토하기 위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활동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 보면 일은 안하고 쌈질만 한다고 비판을 들으면 억울해야할 정치인들이 적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의안정보시스템을 검색하면 위 법안들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래는 검색 결과의 일부이다(아래 그림을 클릭하면 의안정보시스템에 들어갈 수 있다).

맨 위에 올라온 법안 명칭을 몇 개만 일별해도 정치가 ‘가치의 배분’이라는 의미가 물씬 다가온다. 한국농어촌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화훼산업 발전 및 화훼문화 진흥에 관한 법률안(대안), 수의사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양봉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대안) 등.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가 소관위원회인 법안들이 맨 위에 놓여서 그 분야에 관련된 법률들이기는 하지만 법안 하나 하나가 관련된 산업, 기업, 당사자의 활동과 수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들임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공직자는 누구나 반드시 법에 근거해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사회의 각 부문이나 분야를 규제(혹은 지원)하는 개별법말고도 국가기관이 업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결정하는 정부의 예산안도 매년 통과되어야 하는 법률이다. 법에 근거하지 않고 어떤 공직자도 기관 예산을 지출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법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헌법과 같은 상위법과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그 법에 영향을 받게 될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도 조정되어야 하며, 예산 지출이 따르는 경우 정부 예산 편성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정부가 발의하던 의원이 발의하던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국회에서는 위원회, 포럼, 세미나, 공청회 등이 연중 개최된다.  그리고 그중 아주 일부 활동만이 언론의 조명을 받는 행운을 누린다.

입법 활동 중 어떤 것이 기사화되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언론사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언론사의 판단에 있어서 해당 법안의 사회적 혹은 정치적 중요성이 고려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는 독자나 시청자 인터넷 이용자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느냐이다.

이제 권력투쟁으로서의 정치가 지닌 모습을 살펴보자. (2019-09-07, 윤영민)

정치인이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되려면….

우리 나라에서는 좀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치와 행정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 정권은 국가 운영에 있어 군대식 지휘, 즉, 비민주적 권위주의가  통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반면에 진보 정권은 지도자가 올바른 목표와 의지만 지니면 관료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관료란 집권자(당)이 공포와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따라 오지도 않고, 정의의 깃발을 나붓낀다고 따라오지도 않는다. 이 중요한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탓에 지난 20년 동안 대부분의 보수 정권도 진보 정권도 국가 운영에 성공하지 못했다.

관료는 정권의 압력을 피해갈 수 있는 100가지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정권은 짧고 관료는 길다고 믿는다. 불행하게도,  짧게는 1백년, 길게는 7백년 동안 그들의 믿음이 틀린 적이 없다.

정치가가 국가가 나아가야할 올바른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을 잘 설득할 수 있다고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을 수는 있지만 정권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정치가가 뛰어난 행정 원칙과 능숙한 스킬로 관료를 장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서 위대한 국가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고 정권을 성공시킬 수 있다.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해방 이후 이들 대통령 중 과연 누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위대한 국가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가? 김대중일 것이다. 박정희는 산업화를 성공시켰지만 비명에 갔고, 김영삼은 문민화는 성공시켰지만 국가를 재정 위기에 처하게 했다. 노무현은 탈권위주의 정치를 시작했지만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DJ는 탁월한 설득력을 지닌 대중적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한 지도자였다. 비록 김종필과의 연합을 통해서 겨우 정권을 잡았고 여소야대의 약한 정부였으며, 아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어느 정부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경제 위기의 극복, 부정부패의 해소, 정보화 추진, 전자정부의 구축, 남북대립의 완화 등을 상기해 보라.

DJ는 행정 관료를 잘 이해했다. 그는 이념이나 좋은 뜻, 혹은 힘만으로는 관료를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장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지를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행정 관료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적재 적소에 기용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과연 어떻게 될까? 문 대통령이 착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주장처럼 선한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대 국회, 대 야당 관계를 놓고 보면 정치적 리더십이 눈에 띄지 않는다. 행정 능력은 이제 겨우 허니문 기간이 끝났다. 지금부터 행정 관료들의 저항과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과연 DJ만큼 해낼 수 있을까? 과거에 노무현을 보좌해서 통치한 경험이 있으니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부디 집권 후반기에 행정 관료의 포로가 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윤영민, 2018-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