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집이란 공간은?

지난 달 사랑채를 완성하고 살림을 그곳으로 옭겨간 후에 안채는 온전한 작업 공간이 되었다. 필암문화원 간판을 달기는 했지만 팬데믹 때문에 아직 그것을 실체화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만의 공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돌이켜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마흔 둘에 교수직을 얻을 때까지 20년 이상 동안 나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던 환경이었던가. 그래서 주중에는 늦은 밤까지, 그리고 주말에도 연구실에 나와 있었다.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마음껏 연구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마흔이 넘어서야 가질 수 있었으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교수 연구실은 내 마음대로 꾸미거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여러가지 제약이 있었다. 예컨대 크게 음악을 들을 수 없고 복장도 맘대로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얘들이 많은 탓에 집은 컸지만 나만의 서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거실을 서재로 사용했다. 10여년 전 아이들이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집에 나만의 공간을 갖는 여유가 생겼다. 50대 중반이 되어서야 집에 ‘서재’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생긴 것이었다.

‘서재’도 온전히 자유로운 공간은 아니다. 집에 아내가 함께 있으니 음악을 크게 틀 수 없고 큰 소리를 지를 수도 없다. 강의 녹음이나 녹화도 자유롭지 않다. 그리고 아내의 눈치 때문에 마음껏 게으름을 피울 수도 없다.

그런데 지난 달부터 온전한 집 한 채가 생긴 것이었다. 태어나서 65년만에 내가 정말로 누구한테도 방해받지 않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졌다. 아무리 크게 음악을 틀어도, 아무리 게으름을 피워도, 또 아무리 밤늦게까지 연구를 해도 신경 쓸 일이 없다.

공간은 내게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가져왔다. 한 마디로 완전히 자율적인 삶을 안긴 것이다. 과연 나는 이 자율이라는 선물을 갖고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부터 자율적으로 결정해야 할 것이다.

공간이란 삶의 모습을 결정짓는 구조적 요인 중 하나임에 분명하다. 집은 공간 중 개인적인 수준의 영역이다. 마을이나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와 같이 공적인 수준의 영역도 존재한다. 사생활(privacy)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공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타인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 없이 온전한 사생활도 자율적인 삶도 존재할 수 없다. 집은 단순히 재생산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자율을 위한 최후의 버팀목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집이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집이 본원적 가치가 아닌 교환적 가치로만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집이 자율적인 삶의 조건 대신 가치 증식의 수단으로 여겨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다. (2020-10-07).

노년에 찾아오는 작별의 순간

늙어지면 무엇보다 헤어짐과 익숙해진다. 살다가 헤어져야 할 상대가 참으로 많다. 헤어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떠오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직업, 일, 조직, 물건, 삶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과 영원히 갈라서야 한다.

늙는 것은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리고 죽음은 지구 행성에서 인연을 맺었던 모든 것과의 종국적 이별이다. 때문에 늙는다는 것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늙음과 죽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바로 이별인 셈이다.

늙어서 겪게 되는 이별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때로 이별은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왕왕 그것은 심리적 징후를 대동하고 찾아온다. 심리적 징후란 이별을 준비하게 만드는 마음의 변화이다. 그것은 섬세한 사람이라면 결코 놓치지 않을 힌트이다.

지속적으로 상대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다가 상대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는 현상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이별의 징후이다. 그 때가 오면 과거 인연에 관계없이 상대를 과감히 털어내야 한다.

평생 공부해 온 사회학이 최근 시답잖게 느껴진다. 내겐 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관심은 남아 있지만, 사회학자들이 만들어 낸 사회학적 쟁점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사회학적 고담준론이 무의미한 탁상공론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회학과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을 평생 공부해 왔다는 사실이 그것과의 작별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학술 논문을 쓰는 작업도 별로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마무리해야 할 논문이 여러 편 있지만 그것을 마감할 추동력이 사라져 버렸다. 논문 작성도 털어버릴 때가 된 것이다.

현실 정치에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는다. 노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정치를 후배들에게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것이 무엇보다 노인들의 지나친 ‘애국’  때문이다. 좌우 가릴 것이 없이 우리 사회의 노인들의 절제 없는 나라 사랑이 문제이다. 어느 시대에도 상왕의 존재는 왕의 권위를 위협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힐 뿐이다.

늙어서의 미련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그냥 추한 혹은 기껏해야 안타까운 집착일 뿐이다. 모두 내려놓고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 가장 중요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남기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적 이별에 대한 확실한 준비이다. 종국에는 그나마도 털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행성을 떠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되리라. (2020-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