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자의 시간

지금 아내와 내게 가장 소중한 자산은 시간이다. 신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 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날이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직에 있을 때만 바쁜 줄 알았는데 은퇴자에게도 고정 지출 시간이 크게 줄 지 않는다. 여전히 하루에 적어도 3분의 1은 수면, 식사, 세면 등 재생산을 위한 기초활동에 나간다. 또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하루에 30분은 아내와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보낸다. 그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커피마실 때 마음이 여유로울 뿐이다.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병원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나 이웃과 보내는 시간도 주당 5시간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 매일 1시간 정도의 산책 시간도 고정이다. 이전 보다 좀 더 여유롭게 하늘, 구름, 해, 달, 별, 논, 밭, 숲 따위를 바라보고 느낄 뿐이다. 학자로서 생활하는데 보내는 시간도 여전하지만 많이 줄어들었다. 하루에 4시간 정도를 넘지 않는 것 같다.

달라진 점은 무엇보다 매일 1시간 남짓을 가드닝에 쓴다는 것이다. 한 겨울을 빼고는 매일 정원에 있는 잔디, 꽃, 나무를 보살피려 하고 있다. 심신의 건강에 아주 좋은 것 같다.

당분간은 주중에 하루 세 시간 정도 산행에 시간을 보낼 것이다. 등산 스틱이 무릎 통증의 예방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은퇴 후에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거나 뉴스를 읽는데 보내는 시간도 많이 늘었다. 하루에 2-3시간은 거기에 쓰는 것 같다.

그 밖에 한 달에 한번은 여행을 간다. 팬데믹 때문에 멀리는 못가지만 시간상으로 최소한 하루 정도 걸리는 여행은 한다.

공부하고 글쓰는 학자로서의 시간이 현직에 있을 때는 대부분 생업에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봉사에 사용된다. 약간의 시간만 재정 수입을 위한 강의에 사용될 뿐이다. 이점은 적지 않은 변화이다.

다음 주부터는 아내와 함께 점토 공예를 시작하기로 했으니 하루에 1-2시간은 거기에 쓸 것이다. 오늘 작업 공간을 준비했으니 점토와 도구만 오면 바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니 은퇴자의 생활이 시간상으로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 실제 하루가 참 빨리 지나가고 일주일, 한 달, 심지어 1년도 금세 지나가는 것 같다. 지구 여행 자체도 그렇게 잠깐일 것이다. (2020-10-10).

삶에서 시간이란?

여행을 나가면 누구나 시간의 소중함을 느낀다. 여행 기간이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시간이 곧 비용이기 때문이다. 여행 시간을 변경하거나 확장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 않는가. 시간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은퇴자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구 행성에 여행자로 왔다간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지구 여행’, 즉, 우리의 삶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한한 시간을 가진 여행자이다.   

일상 여행과 지구 여행(인생)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두 여행의 공통점은 시간적으로 유한하고 여행의 끝이 다가오면 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두 여행의 차이점은, 일상 여행에서는 여행자가 여행 중 내내 여행 전체를 시간적으로 실감하는 반면, 지구 여행에서 여행자는 거의 여행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여행 전체를 시간적으로 체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인간의 시간 체감의 범위는 며칠, 몇 주일, 길어봐야 1년을 넘지 못한다. 1년을 넘어가면 시간에 대한 분별이 희미해진다. 사람들은 1년과 2년, 1년과 5년, 1년과 100년, 심지어 1년과 무한대 사이의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한 시간 인식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한 백년, 아니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구여행의 시간적 종착점을 알 수 있다면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바뀌고 세상에 대해 훨씬 너그러워질 지도 모른다. 사실 암 같은 질병으로 인해 의사로부터 남은 시간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가.

은퇴자가 가진 것은 시간 뿐이지만 그 시간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은퇴자는 자신에게 시간이라는 자산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시간이란 하릴없이 메꾸어야 하는 구덩이이다. 아침이 되면 그 구덩이는 다시 생겨나고 은퇴자는 매일 그 구덩이를 메꿔야 한다. 지구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말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오늘, 이 순간이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고자 소망했던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여행의 끝에 다다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구 여행 전체를 조망하면서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여생을 보내고자 할 것이다.

사실 시간에서는 길이보다 밀도가 중요하고,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의 하루가 다른 사람의 1년만큼 가치가 있을 수 있으며, 오늘 하루가 지난 생애의 전부 혹은 남은 생애의 전부 만큼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현재(present)라는 이 소중한 선물(present)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은퇴자에게도 그것이 문제이다. 만약 시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구덩이를 메꾸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여행을 설계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시간에 대한 관념만 바꾸어도 은퇴자의 삶은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다. (2020-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