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서 시간이란?

여행을 나가면 누구나 시간의 소중함을 느낀다. 여행 기간이 제한되어 있을 뿐 아니라 시간이 곧 비용이기 때문이다. 여행 시간을 변경하거나 확장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쉽지 않지 않는가. 시간 밖에 없다고 여겨지는 은퇴자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누구나 지구 행성에 여행자로 왔다간다. 모든 여행이 그렇듯이 ‘지구 여행’, 즉, 우리의 삶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유한한 시간을 가진 여행자이다.   

일상 여행과 지구 여행(인생)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두 여행의 공통점은 시간적으로 유한하고 여행의 끝이 다가오면 여행에 대한 아쉬움이 커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두 여행의 차이점은, 일상 여행에서는 여행자가 여행 중 내내 여행 전체를 시간적으로 실감하는 반면, 지구 여행에서 여행자는 거의 여행의 종착점에 이를 때까지 여행 전체를 시간적으로 체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통상적으로 인간의 시간 체감의 범위는 며칠, 몇 주일, 길어봐야 1년을 넘지 못한다. 1년을 넘어가면 시간에 대한 분별이 희미해진다. 사람들은 1년과 2년, 1년과 5년, 1년과 100년, 심지어 1년과 무한대 사이의 차이를 선명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한 시간 인식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한 백년, 아니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구여행의 시간적 종착점을 알 수 있다면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한 우선순위가 바뀌고 세상에 대해 훨씬 너그러워질 지도 모른다. 사실 암 같은 질병으로 인해 의사로부터 남은 시간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의 생각과 행동이 일반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가.

은퇴자가 가진 것은 시간 뿐이지만 그 시간이 많지는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은퇴자는 자신에게 시간이라는 자산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에게 시간이란 하릴없이 메꾸어야 하는 구덩이이다. 아침이 되면 그 구덩이는 다시 생겨나고 은퇴자는 매일 그 구덩이를 메꿔야 한다. 지구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말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오늘, 이 순간이 수많은 사람들이 가지고자 소망했던 축복이며 선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여행의 끝에 다다르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구 여행 전체를 조망하면서 살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의미있고 가치있게 여생을 보내고자 할 것이다.

사실 시간에서는 길이보다 밀도가 중요하고,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객관적이기보다 주관적이다. 어떤 사람의 하루가 다른 사람의 1년만큼 가치가 있을 수 있으며, 오늘 하루가 지난 생애의 전부 혹은 남은 생애의 전부 만큼 가치가 있을 수 있다.

현재(present)라는 이 소중한 선물(present)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은퇴자에게도 그것이 문제이다. 만약 시간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이 구덩이를 메꾸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여행을 설계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시간에 대한 관념만 바꾸어도 은퇴자의 삶은 한층 풍요로워질 수 있다. (2020-10-08)

덤으로 주어지는 삶

2017년 기준 우리나라 남성의 기대수명은 79.7세, 평균 건강수명은 64.9세이다. 이는 평균적으로 말해서 나의 기대수명은 15년 정도 남았고, 건강수명은 1개월 남았음을 의미한다.

건강수명이란 질병에 의해 크게 방해받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다. 금년 초부터 매일 열 가지가 넘는 약을 먹으면서 나는 내 건강수명이 현대의학 덕분에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한다.

얼마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아마도 짧으면 5년, 길어도 15년을 넘지 못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 후에는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숨이나 쉬는 정도일 것이다.

이미 약으로 건강수명을 늘려가고 있고 다음 달부터는 평균적인 건강수명마저 끝나니 냉정하게 말해 이제 내 삶은 그야말로 덤이다. 예정된 삶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삶이라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잘 해서 받는 선물이 아니라 마치 경품처럼 운이 좋아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소중한 선물을 어떻게 쓸까? 버킷 리스트라도 만들어야 되는 걸까?

글쎄, 아무리 생각해봐도 버킷리스트에 담을만한 소망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해봤으면 하는 일들이 적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하지 않더라도 별로 후회될 것 같지 않은 일들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망이라고 보기에 뭐하다. 그래도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코로나 19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한 달 정도 유럽 여행을 하고 싶다. 아내가 함께 가길 원하니 같이 가면 될 것이다.

오랫동안 북쪽 길이 뚫리면 차를 몰고 만주 벌판을 달리고 싶었다. 만주는 수 차례 다녀왔으니 꼭 다시 가야할 이유는 없지만 내 스스로 차를 몰고 마음껏 다녀보고 싶기는 하다.

해외 여행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일흔 살이 되기 전에 해야할 것이다. 그 후에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내에게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남겨주고 싶다. 평생 돈 걱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생활을 여생 동안은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 그것도 일흔 전에는 끝내야 할 것이다. 

직업적인 일, 집안 일 등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좀 남아 있다. 그것들이야 지금처럼 해나가면 될 것이다. 버킷 리스트에 채울 것들은 아니다.

끝으로 선물로 받은 삶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면 좋을 것이다. 어떻게 나눌 지는 좀 더 고민해보자. (2020-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