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 단상(2): 산책

전원에 이사가면 논과 밭 사잇 길을 마음껏 걷고 싶었다. 중학교 시절 나의 가장 큰 즐거움 중의 하나는 이슬비가 내리는 날 흙내음을 맡으며 논이나 밭 가를 걷는 것이었다. 그러다 커다란 방죽이라도 만나면 금상첨화였다.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그림을 완성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요즘 50여 전의 소망을 매일 실현하고 있다. 통상 3-4km를 걷고 어떤 날은 7-8km를 걷는다. 그냥 하릴없이 전원의 일부가 되는 느낌이 그만이다.

다행히 아내도 나만큼이나 산책을 즐겨서 함께 걸으니 더욱 좋다. 별로 대화가 많지는 않지만 수많은 대상을 함께 느낄 수 있어 좋다. 길가의 꽃이며, 나무며, 벌레나 동물, 그리고 달과 별을 함께 느끼고, 마주치는 이웃들과도 안부를 물으며 함께 인사를 나눈다.

전원에 산다는 것은 단지 전원주택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전원 속에 사는 것이다. 산책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혹은 앞으로 산책을 즐기고 싶다면 집터를 선택할 때 집터나 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산책하게 될 공간을 살펴야 한다. 적어도 집 주위 100만평 정도는 돌아보고 산책이 가능한 지를 파악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 산책하는데 차나 자전거를 타고 근처의 공원에 가서 산책을 하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게다. 그런데 만약 하루에 두세번 나가서 걷고 싶다면 어찌 할 것인가. 대문 밖을 나서서 바로 걸을 수 있는 곳이 최고이다.

시골의 국도에서는 차가 쌩쌩 달리는데다 인도가 없어 산책이 거의 불가능하다. 또 산에 집터가 있다면 잘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담력이 얼마나 큰 지. 시골은 밤과 낮이 완전히 다르다. 밤이 되면 집밖에 나다니기가 쉽지 않다. 잘못 하다간 집 안에 갇히게 된다. 산책 환경의 측면에서 공원 많은 도시만도 못한 시골도 드물지 않다.

산밑을 흐르는 시냇물을 따라서 난 오솔길을 걷는 로망이 충족되기가 싶지 않다. 첫번째 전원 생활 중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 혜택을 잃었다. 집 주위에 대규모 개발이 진행되어 산책할 수 있는 공간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산과 들 대신에 군 연병장이나 학교 운동장을 걸어야 했다.

그래서 나는 형질 변경이 불가능한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이사왔다. 이곳에는 아파트 단지는 물론이고 공장이나 축사도 세워질 수 없다. 물론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있던 시설들은 그대로 있지만. 정부가 환경을 관리해 주니 주민인 내가 신경쓸 일이 별로 없다.

아내와 나는 하루에 두 번은 산책을 나간다. 집 바로 앞에 1만평 크기의 미니 공원이 있지만 그 정도는 걷는데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운동이 되려면 열 바퀴는 돌아야 하는데 같은 장소를 뱅뱅 도는 것은 참 지루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집을 중심으로 세 갈래 장거리 코스를 정해 놓고 매번 다른 방향으로 걷는다. 반복되는 일상이긴 하지만 그렇게 하면 좀 낫다.

오늘 아침에는 오른편쪽으로 4km 정도를 걸었다. 오후 늦게 비가 내리지 않으면 왼쪽편으로 4km 정도를 또 걸을 것이다. (2020-07-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