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구유의 완성

며칠 전 만들어 놓은 구유 천장 외부을 볏짚으로 덮어주기로 했다. 아내의 아이디어이다.

어제 도동댁 추수가 끝난 후 볏짚을 한 손수레 얻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아내가 새끼를 꼬았다. 볏짚을 엮기 위해서이다.

볏짚을 한 웅큼 잡아 지저분한 껍질을 좀 털어내고 가지런히 놓았다. 내가 그것을 조금씩 건네주면 아내가 엮기로 했다.

먼저 끝쪽으로 한 번 엮었다.

그 다음 좀 띄워서 두 번째로 엮었다. 그러면 덮개가 보기도 더 좋고 좀 더 튼튼할 것이다.

덮개를 완성했다. 덮개 만들기와 씌우기는 90% 아내가 했다. 덕재댁이 지나가다 짚 껍질을 말끔이 털어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나는 보조만 했다.

덮개를 만드는 데 거의 하루가 걸렸다. 그래도 마감을 해놓고 보니 비닐로만 덮개를 했을 때보다 훨씬 자연스럽고 정성들여 보였다.

지인들은 시골에서 심심해서 어떻게 사냐고 하지만 아내와 나는 심심한 적이 별로 없다. 멀리서 보면 매일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자연 속에서의 삶은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나는 그다지 열성인 신자가 아니다. 그런데 종교와 관련된 작업을 하다보면 신앙심이 조금은 생기는 것 같다. 신앙 때문에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다보면 신앙이 생긴다고나 할까. 종교생활이 그런 게 아닌가 생각된다. 종교 생활이란 신심이 있어서, 결단을 내려서가 아니라 조금씩 실천하다보면 가슴 속에 무언가 생기고 삶에 변화가 오는 그런 어떤 것이 아닐까. (2020-10-03)

은목서 향기와 좋은 집

내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내음 중 하나는 은목서의 꽃향기이다. 그것은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묘한 매력이 넘치는 향기이다.

현관 주위 적어도 십여 미터 이상은 은목서 향기로 가득하다. 바람 방향에 따라서는 몇 십터 밖에서도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은목서의 꽃은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조그맣다. 그 작은 꽃들이 수백 수천 합쳐져서 신비로운 향기를 내뿜는 것이다.

8여 년 전 현관 곁 삼보정(팔각정) 앞에 심은 나무가 무척 자랐다. 해마다 20cm 이상 자라는 것 같다.  역시 집이라는 작품은 세월이라는 마스터에 의해 완성되는 모양이다.

“여기는 마치 내 몸에 꼭 맡는 옷을 입은 것 같아요. 안채의 안방은 항상 좀 쌀쌀하다고 느꼈는데 이 곳은 항상 따뜻해요. 실내 희망 온도를 20도로 맞춰 놓았는데, 실내 공기가 밤에도 27도에요. 너무 신기해요.”

사랑채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내가 감사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단열이 잘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작년에 아내 침실 앞에 유리 온실을 붙였고, 금년 봄에 지붕 단열을 보강하였으며, 욕실을 북쪽 벽 전면으로 확장하고 방바닥을 코르크재로 바꾼 효과를 단단히 보는 것 같다. 큰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면서도 방이 외부와 직접 닿는 면을 없앤 때문인가.

사랑채의 거실 겸 주방은 바닥 공사를 완전히 새로 했다. 10cm 두께의 강화 스치로폼으로 바닥 단열을 하고 그위에 엑셀 파이프를 설치한 다음 마감을 하고 그 위에 5mm 짜리 친환경 장판을 깔았다. 보일러를 전혀 돌리지 않는데도 쾌적하다. 안채에서는 늘 실내화를 신었던 아내가 사랑채에서는 맨발로 지내면서 너무 좋아한다.

오랫동안 아내는 손발이 차가워서인지 추운 걸 싫어했었는데, 더구나 금년 봄 암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더욱 더 따뜻한 환경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랑채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좋은 모양이다. 물론 본인의 독립적인 공간을 갖게 되었다는 점도 한 몫 하겠지만.

좋은 집이라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집이 공통적으로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은 갖춰져야 하겠지만 사람마다 좋아하는 집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굳이 한다면 좋은 집이란 집 주인의 선호에 꼭 맞는 집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 주인의 선호가 변하기도 한다. 단독주택이 좋은 점은 집주인의 바뀌는 선호나 니즈에 맞추어 집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도 지난 8년 동안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큰 틀은 바뀌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모습은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8년 만에 방문한 사람이 크게 놀랄 정도로 변했다. 8년 후에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기야 노부부가 아침에 정성스럽게 끓인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담소를 나눌 수 있다면, 집이 어떤 모습이면 어떠하랴. 행복은 무엇보다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을. (2020-10-03)

온실 채소가 나오다

온실 화분에서 웃자란 열무순을 솎아서 아침 샐러드에 올렸다. 한 열흘 전에 씨앗을 뿌린 채소들이 싹이 나온 것이다. 맛은 모르겠지만 느낌은 좋았다.

오늘은 잔디를 깎았다. 어쩌면 금년 마지막 잔디깎이일지도 모르겠다. 날이 시원해지면서 잔디 자람이 눈에 띄게 더디어졌다.

내년에는 힘이 좀 덜 들게 잔디를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힘든 일을 피하려고 자꾸 요령을 부리게 된다. 늙어가기 때문이리라. (2020-10-02)

성탄절을 준비하다

성탄을 기념하기 위한 구유를 설치했다. 작년에는 집안에 했는데 올해는 정원에 했다. 아내와 둘째, 셋째까지 거들어 줘서 비교적 수월하게 설치할 수 있었다. 태양광 패널 받침대에 꼬마전구 점멸등을 두르는 데는 키가 좀 큰 막내가 기여를 많이 했다.

아내의 제안에 따라 덕재댁 내서 대나무를 얻어다 뼈대를 만들고 재활용 비닐을 물로 깨끗이 닦아서 덮었다. 눈비가 와도 걱정이 없다.

점등을 했더니 식구 모두 흡족해 했다. 생각보다 보기가 좋았다. 추석 지나고 도동댁 논 추수할 때 볏짚을 얻어다 비닐 위에 덮어주면 구유가 완성될 것이다.

작년에 성모상이 조금 부서져서 실리콘으로 보수했다. 다른 상들은 아직 멀쩡하다. 좁은 곳에 여러 상들이 촘촘하게 모여 있으니 누추한 마굿간의 느낌이 잘 나타나는 듯하다.

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 아내나 아이들이 이 전통을 이어갈 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아빠가 성탄을 매우 진지하게 보냈다는 사실만은 식구들이 오래 기억할 것이다.

부모라도 자녀들에게 종교 생활을 억지로 따라하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종교생활이 의무보다 즐거움이 되면 자녀들이 부모가 걸어간 길을 따라갈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된다.

“우리 아빠한테는 성탄이 하루가 아니라  3개월이었다.”

그렇게 기억되길 바란다. (2020-09-29)

일급의 학자가 되는 비결

공부하는 사람은 사는 게 그저 단순해야 한다. 학자는 머리로 일하는 사람이지 몸으로 일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다. 집중하지 않으면 성취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생각을 깊이 있게 전개하려면 오랜 시간 성찰 대상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생각없이 학문적 성취는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조각난 사고작용으로는 배움과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공사다망할수록 정신 활동은 파편화된다.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은 결코 높은 학문적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젊은 날 이 원리를 깨달았지만 나는 그것을 제대로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온갖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학자는, 마음은 어린이 같고 생활은 수도승과 같아야 한다. 맑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어진 화두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 마디로 simple  life. 거기에 유능한 학자가 되는 비결이 있다.

나는 이제야 그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은퇴하고 60대 중반이 되어서야 말이다.  

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Philosopher(철학자)이다. Philosopher는 그리스어로 philo(love)와 sophia(wisdom)이 결합되어 생성된 말이다. 학문이 아직 분화하지 못했던 고대 그리스에서는 철학자가 곧 학자였다.

지금도 서양 학문에는 고대 그리스의 영향이 남아있다. 나는 사회학 박사이지만 공식 학위명은  Ph.D. (Doctor of Philosophy) in Sociology이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 눈에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이 박물관에나 가 있어야 할 존재로 보이겠지만, 오늘날에도 학자는 여전히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다시 말해 공부를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머리에 흰 서리가 내린 지 오랜 지금에야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이라도 학자의 흉내를 내면서 여생을 보내야 이 행성을 떠나면서 미련이 덜 남을 것 같다. (2020-09-29)

확률분포(7): 감마분포

베타분포처럼 감마분포(Gamma distribution, distribution)도 앞서 설명한 분포들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감마분포는 포아송 분포와 관련되어 있으며 지수분포를 확장하여 일반화한 확률분포라고 생각하면 된다. 때문에 감마분포를 공부하기 전에 포아송 분포와 지수분포를 복습해두면 좋을 것이다.

포아송분포는 단위 시간 당 어떤 사건이 발생하는 횟수에 대한 확률분포이고. 지수분포는 어떤 사건이 한 번 발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혹은 시간 간격)에 대한 확률분포이며, 감마분포는 어떤 사건이 여러번( 번) 발생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대한 확률분포이다.

포아송분포: 확률변수 X = 단위 시간 당 사건 발생 횟수

지수분포: 확률변수 X = 어떤 사건이 한 번 발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

감마분포: 확률변수 X = 어떤 사건이 여러 번( 번) 발생하는 데 걸리는 시간

확률변수 X가 감마분포를 가지면 다음과 같이 표시된다.

퍼라미터 는 상호독립적인 확률변수 X의 갯수이다. 각 확률변수 X는 를 퍼라미터로 갖는 지수분포를 한다.

퍼라미터 는 첫번 째 사건이 발생할 때까지 소요된 시간이다.

는 단위 시간 당 어떤 사건의 평균적인 발생 횟수이다. 포아송분포와 지수분포의 경우와 같다. 감마분포는 포아송분포와 지수분포와 동일하게 를 가지고 나타낼 수도 있고, 를 가지고 나타낼 수도 있다. 를 가지고 나타내는 감마분포를 역감마분포(inverse gamma distribution)라고 부르기도 한다. 를 가지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으니 여기서는 감마분포의 퍼라미터를  대신 라고 부르는 용례를 따르겠다.

따라서 이 글에서 감마분포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감마분포의 P.D.F.에 앞서 베타분포를 설명하면서 나왔던 감마함수( function)가 또 나왔다(). 베타분포를 설명할 때 감마 함수는 계승(factorial)을 실수 및 복소수로까지 확장한 것이며, 일 때, n이 양의 정수이면,  이라는 언급만 했다. 여기서는 감마함수의 성격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언급하겠다.

감마함수가 계승(함수)의 확장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궁금한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계승함수가 양의 정수에 대한 계승을 나타내는 데 그것을 실수에까지 확장한다는 의미이다. f(X)를 계승함수라고 하자.

몇 개의 X에 대한 계승함수 값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그런데 위 점들을 잇는 선으로 잇는 함수가 바로 감마 함수이다. g(X)를 감마함수라면,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X가 양의 실수이다. 몇 개의 X에 대한 감마함수 값을 그래프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의 감마함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그리고 감마함수는 아래와 같은 성질을 갖는다.

다시 감마분포의 PDF (1)로 돌아가면, 모수 는 형상모수(shape parameter), 는 척도모수(scale parameter)라고 불린다. 와 구분하여 를 비율모수(rate parameter)라고 부르기도 한다.

4 illustrates the PDF of a Gamma distribution for multiple values of... | Download Scientific Diagram

위 그림은 형상모수와 척도모수가 감마분포의 모양을 어떻게 결정짓는 지에 대해 힌트를 준다. 먼저 척도모수 값이 1로 고정된 상태에서 형상모수의 값을 1, 2, 3으로 바꾸면, 까만 선, 빨간 선, 연초록 선으로 바뀜을 볼 수 있다. 까만선은 인 지수분포와 동일한 모습이다.

그 다음 형상모수 값을 3으로 두고, 척도모수를 2, 3으로 바꾸면, 그래프의 모양은 그대로 있고 그래프도의 척도가 변함을 알 수 있다(직접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싶은 독자는 Probability Distributions 라는 앱을 가지고 시도해보기 바람). 그래서 퍼라미터의 이름이 척도모수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확률변수 X가 여러 개인 감마분포의 관점에서 보면, 지수분포는 첫번 째 사건(: )이 발생할 때까지 걸리는 시간에 대한 감마분포이다. 즉, 지수분포는 인 감마분포이다. 

위 식(1)에 을 대입하면 아래와 같다.

이는 정확히 확률분포 X의 지수분포에 대한 정의이다.

이제 예제를 가지고 감마분포를 살펴보자.

예제 1) 어떤 사람이 낚시를 하는데 평균 30분에 물고기 한 마리를 낚는다고 하자. 4마리 물고기를 잡는 시간이  2시간에서 4시간 사이가 걸릴 확률은?

해제) 30분에 물고기 한 마리를 낚으면, 1시간 당 평균 2 마리를 낚는다. 여기서 단위 시간은 1시간으로 해야 한다. 즉, . 그리고 물고기를 4마리 낚는데 필요한 시간이니 . 따라서 확률분포가 일 때 를 계산하면 된다.

확률변수 X: 물고기 4마리 잡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

감마분포의 누적분포 공식을 적용하면 아래와 같이 확률을 구할 수 있다. 직접 계산할 필요없이 응용프로그램을 이용하면 된다.

마이크로소프트 엑셀의 경우 가 아니라 를 가지고 감마분포를 표시하기 때문에 공식(1)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 공식을 사용하여 확률 값을 준다. 즉, 역감마분포 값이다.

때문에 를 사용하는 감마분포 값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래 공식을 이용해 값을 구해서 입력해 주어야 한다.

이 문제의 경우 가 2이니 는 0.5이다. 따라서 를 GAMMA.DIST에 입력하고 누적분포를 적용해야 를 제대로 계산할 수 있다.

Probability Distributions app은 공식 (1)을 사용하고 있으니 를 그대로 값으로 입력해 주면 된다. 그렇게 하면 엑셀과 동일한 결과를 구할 수 있다.

다소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감마분포 값을 구할 때는 응용 프로그램이 어떤 공식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꼭 확인하고 적절한 퍼라미터 값을 입력해 주어야 한다.

예제 2) 승용차 패널 공정에 패널 제작용 철판을 배달한다고 하자. 우리는 20개의 철판을 배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에 관심이 있다. 철판 배달은 포아송 분포를 따르고 1분당 평균 1.6개의 철판이 배달된다. 이 때 20개의 패널이 15분 이내에 배달될 확률은?

해제)

P(X < 15) = ?

감마분포의 누적분포 공식을 적용하면 되는데 적분 계산이 복잡하니 app을 사용하자. Probability Distributions app을 사용하면, 답은 0.81974이다.

(2020-09-27)

이발기를 소환하다

이발기 셋

어제는 아내에게 머리 손질을 맡겼다. 25년만인 것 같다.

1986년 가을 어느날 캠퍼스에서 마주친 동료 유학생이 내 머리를 보고 경악했다. 이용 경험이 전혀 없는 아내가 가위만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놓았으니 내 머리 모양이 기겁을 할만도 했다. 결국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고쳤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아내의 머리깎기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서까지 한참 계속되었다.

그런데 아내에게 다시 이발기를 들도록 요청한 것이다. 읍내에서 몇 군데 이발소를 가보았지만 하나도 맘에 들지 않았다. 어떤 이발사는 면도를 얼마나 거칠게 하던지 이발하고 한 사흘 동안 얼굴이 아팠고, 어떤 이발사는 머리를 발로 자른 것처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어떤 이발사는 이발하면서 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7-8년 동안 그들에게서 머리를 깎았으니 나름 오래 참았다.

어제 깎고 보니 아내의 솜씨가 녹슬지 않았다. 더구나 아내는 내 머리를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 주지 않는가. 제대로 대접받은 느낌이다. 다만 노안 때문에 머리카락 겨누기를 쉽지 않아 하는 아내에게 미안했을 뿐이다.

내가 평생 품고 살아온 생각 중 하나는 지식인에게 검박(朴) 보다 더 큰 힘은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발언이다. 소신을 밝혀서 세상이 바르게 가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의 혀가 꼬이면 더 이상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지식인의 혀를 비트는 유혹이 많다. 돈, 권력, 출세, 허영, 물욕, 편안함, 게으름 등 생활을 느슨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지식인을 부패하게 만드는 유혹이다.

20대부터 나는 지식인을 지향하며 살아왔다. 항상 원칙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탈을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검박한 생활의 핵심은 무엇보다 주어진 수입에 감사하며 그 범위 내에서 살아가는 자세이다. 생활이 방만해지면 추가적인 소득을 필요로 하게 된다. 추가적인 소득을 갈망하면, 남의 눈치를 보고, 적당히 타협하고, 더 나아가 아부하고, 투기하고, 심지어 부정까지 저지르게 된다.

오랜만에 아내에게 머리를 맡기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좀 더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지출이 줄고 정신도 맑아지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2020-09-27).

새옹지마

지난 2월 퇴직을 하자마자 팬데믹 상황이 왔고, 나는 계획했던 유럽 여행을 접었다. 그리고 3월에는 아내가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래서 사랑채를 내 작업실로 리모델링하려던 계획을 바꾸어 아내의 요양 공간으로 만들었다. 독립적인 침실과 화장실, 거실과 주방까지 갖추었는데, 딤채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어제 소형 딤채를 들여 놓았다. 이로써 사랑채 리모델링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12월에 사랑채에 손을 대기 시작했는데, 그것을 아내의 살림집으로 전환하는 작업이 이제야 끝을 본 것이다. 거의 10개월이 걸렸다.

은퇴를 하고나니 일을 쉽게 벌일 수가 없다. 수입이 작아 돈을 모아가면서 하다보니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제 안채를 필암문화원 공간으로 바꾸는 작업을 5년에 걸쳐서 진행할 예정이다. 그렇게 오래 걸리는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이다.

안채에는 크게 세 가지 공사, 주방 리모델링, 바닥과 벽 마감 보수, 썬룸 설치가 필요하다. 그 공사가 다 끝나고 나면 필암문화원은 정말로 멋진 공간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간단한 음악 공연, 미술 전시, 강연 등과 같은 프로그램도 운영할 수 있고, 멀리서 오는 방문자들을 위해 숙박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내가 사랑채를 너무너무 좋아한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구석구석 빠짐없이 편안함을 구현하려고 노력한 덕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일생 처음으로 남편에게서 독립적인 공간을 갖게된 기쁨도 있을 것이다. 부부 사이에도 독립적인 영역이 필요하다. 늙어가니 더욱 그렇다.

인간사는 새옹지마(馬)이다. 펜데믹 때문에 은퇴 여행을 가지는 못했지만 그 덕분에 집을 수리할 재정적 여유가 생겼고, 아내가 암수술을 받아 몇 달 힘들었지만 덕분에 사랑채를 아내의 공간으로 만드는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은퇴했다고 삶이 끝난 것이 아니다. 은퇴를 하고나니, 비록 여러가지 제약이 많기는 하지만 소소한 즐거움을 만들어 가는 재미가 있다. (2020-09-26)

덤으로 주어지는 삶

2017년 기준 우리나라 남성의 기대수명은 79.7세, 평균 건강수명은 64.9세이다. 이는 평균적으로 말해서 나의 기대수명은 15년 정도 남았고, 건강수명은 1개월 남았음을 의미한다.

건강수명이란 질병에 의해 크게 방해받지 않고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이다. 금년 초부터 매일 열 가지가 넘는 약을 먹으면서 나는 내 건강수명이 현대의학 덕분에 연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한다.

얼마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아마도 짧으면 5년, 길어도 15년을 넘지 못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 후에는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숨이나 쉬는 정도일 것이다.

이미 약으로 건강수명을 늘려가고 있고 다음 달부터는 평균적인 건강수명마저 끝나니 냉정하게 말해 이제 내 삶은 그야말로 덤이다. 예정된 삶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지는 삶이라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잘 해서 받는 선물이 아니라 마치 경품처럼 운이 좋아 주어지는 선물이다.

이 소중한 선물을 어떻게 쓸까? 버킷 리스트라도 만들어야 되는 걸까?

글쎄, 아무리 생각해봐도 버킷리스트에 담을만한 소망이 별로 떠오르지 않는다. 해봤으면 하는 일들이 적지 않지만 거의 대부분 하지 않더라도 별로 후회될 것 같지 않은 일들에 불과하다. 그러니 소망이라고 보기에 뭐하다. 그래도 리스트를 만들어보자.

코로나 19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한 달 정도 유럽 여행을 하고 싶다. 아내가 함께 가길 원하니 같이 가면 될 것이다.

오랫동안 북쪽 길이 뚫리면 차를 몰고 만주 벌판을 달리고 싶었다. 만주는 수 차례 다녀왔으니 꼭 다시 가야할 이유는 없지만 내 스스로 차를 몰고 마음껏 다녀보고 싶기는 하다.

해외 여행은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일흔 살이 되기 전에 해야할 것이다. 그 후에는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내에게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남겨주고 싶다. 평생 돈 걱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생활을 여생 동안은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 그것도 일흔 전에는 끝내야 할 것이다. 

직업적인 일, 집안 일 등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좀 남아 있다. 그것들이야 지금처럼 해나가면 될 것이다. 버킷 리스트에 채울 것들은 아니다.

끝으로 선물로 받은 삶이니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주면 좋을 것이다. 어떻게 나눌 지는 좀 더 고민해보자. (2020-09-25)

달과 별…그리고 하루

아직 반달이 되려면 3-4일은 더 있어야 겠지만 저녁 산책 길에 만난 달이 크고 훤하다. 날이 맑으니 밝은 달에도 불구하고 별이 많이 보인다. 별이 쏟아져 내리는 정도는 아니지만 느낌이 올 정도로 충분히 많다.

“별을 보는 자세가 내 허리에 좋은 것 같아요.”

옆에서 하늘을 향해 최대한 등을 제끼면서 아내가 한 마디 한다. 2년 전 아내는 디스크 수술을 받았다.

“내 목에도 좋은 것 같아요.”

내가 맞장구쳤다. 별을 보느라 하늘을 향해 가슴을 한껏 내밀고 있으면 등과 목이 편해짐을 느낀다.

오늘은 집안 일을 많이 했다. 무엇보다도 아침에 겨울나는 방식을 결정해서 바로 실행에 옮겼다.

올 겨울에는 사용하지 않을 요량으로 벽난로의 녹을 벗기고 오일을 발랐으며, 사랑채에서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짐을 모두 날랐다. 아내와 둘째가 함께 하니 금방 끝났다.

몇 달 전에 에어컨을 옮기면서 실외기를 연결하기 위해 낸 구멍을 임시로 막아 두었었는데, 오늘에야 투명 실리콘으로 단단하게 구멍을 메꾸었다. 이제 구멍으로 찬바람이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틈틈이 강의 컨텐츠 수정 처리하고 새 온라인 컨텐츠 준비 작업도 조금 했다. 컨텐츠 수정을 위해 여기 저기 통화를 했고 컨텐츠 준비를 위해 공부도 좀 해야 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지났다. 아내는 퇴직한 지 1년이 넘었고 나도 6개월이 넘었지만, 한가롭게 지내는 날이 별로 없다. 짐작컨대 기력이 소진될 때까지 그렇게 살 것 같다. 그것이 아내와 나의 은퇴 후 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까. (2020-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