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토론을 위한 몇 가지 기술

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국가들 사이의 회담이 연이어 진행되고 있다. 정상회담, 당국자 회담, 실무회의 등 여러 수준의 대화가 역사상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숨가쁘게 열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대화가 개인 뿐 아니라 집단에게도 생존과 번영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그런데 대화가, 상호 이해나 타협 혹은 의사결정에 도달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지식의 생산(즉, 연구)이나, 지식과 깨달음의 습득(즉, 학습)에도 대단히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사실을 흔쾌히 인정하는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연구나 학습이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라고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분위기를 개선하는데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되어, 6년 전 페이스북의 ‘정보사회학’ 페이지에 올렸던 글을 약간 손질하여 전재한다. 당시에는 온라인 대화에 특정해서 논의하였지만 거기에 제시된 내용은 오프라인 대화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권위주의적 혹은 신분계층적 잔재가 남아 있는 우리 사회에서 생산적인 대화가 쉽지 않음은 별로 놀랍지 않다. 우리 사회에는 대화를 통해서 상호 이해와 합의에 도달하는 토론(discussion)이 발달하지 못했고, ‘함께 생각하는(thinking together)’ 수단(혹은 과정)으로서의 대화(dialogue)가 보기 드물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방송에 시사토론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면서 몇몇 논쟁적 지식인이 연예인 수준의 명사로 등극하고, 유튜브상의 수많은 대안 미디어 덕분에 적지 않은 스타 지식인들이 출현했지만, 대화 그리고 대화적 지식인은 여전히 우리에게 낯선 문화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도대체 ‘함께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부정되는 분위기이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생각한다는 것은 홀로 명상을 한다거나 글을 쓰는 행위와 동일시된다. 대화를 통해 함께 생각하기(이하에서는 다이어로그라고 부름)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데,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고 직장(일부 교육을 제외)이나 대중매체 같은 사회에서도 다이어로그하는 훈련을 시켜주지 않는다.

대화에는 한담(閑談), 난장(亂場)적 대화, 논쟁, 토론, 다이어로그(對談)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앞 세 가지는 잘 발달한 반면 뒤 두 가지는 좀 약한 편이다. 난장적 대화(Carnivalesque)는 전통적으로 판소리 가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고 요즘에는 유튜브의 시사토론 미디어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은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대화이다. 논쟁(debate)도 서구사회 이상으로 발달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벼슬자리는 물론이고 심지어 목숨까지 걸면서 정치적 논쟁을 했고, 요즘도 TV 시사토론 프로그램이나 인터넷상에는 직업적 ‘논객’들이 적지 않다.

논쟁(debate)은 나름대로 사회적 가치가 있다. 한 사회에 내재한 상이한 입장과 견해를 극적으로 드러내주는데 논쟁만한 대화 형식이 없다. 또한 논쟁은 논리 발달을 촉진하고 게다가 첨예한 논쟁은 시청자에게 말싸움을 구경하는 재미를 주고, 덕분에 방송국은 저비용으로 취약 시간대 방송을 커버하고 운이 좋으면 제법 괜찮은 시청률을 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논쟁은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대화의 목표가 승리(혹은 설득)이기 때문에 찬반 발언은 당파성을 띄게 되고 참여자는 상대의 논리적 허점을 찾아내어 공격해야 한다. 상대편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은 패배이다. 논쟁은 보통 우리가 말싸움이라고 부르는 경기이다. 거기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기 어려우며 상호 이해와 합의를 기대할 수 없고 지식의 생성이나 자기발견적 학습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심지어 사회적으로는 분열을 조장하기도 한다. 거기에서는 쟁점이 실제의 차이보다 훨씬 단순화되고 과장되며 감정적인 응어리까지 남기기 때문이다.

논쟁은, 참가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면서도 상호이해와 합의에 도달하는 토론과 구분되며, 더구나 참가자들의 기여를 최대한 끌어내면서 교육(혹은 학습) 효과를 내거나,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의사결정을 해내는 다이어로그와는 판연히 다르다. 그렇다면 지식생성과 학습을 위한 다이어로그를 성공적으로 일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만약 우리가 정말로 ‘함께 생각하기(thinking together)’의 놀라운 효과를 기대한다면, 무엇보다 세 가지 전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첫째, 대화 참여자들이 서로 존중해야 한다. 다른 참여자들의 능력에 대해 무한 신뢰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드시 그리해야 한다. 그래야만 참여자들의 잠재력이 성공적으로 표출될 수 있다. 서로 무시하고 경시하는 순간 함께 생각하기는 물 건너 간다. 참여자들은, 내 의견이 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둘째, 공동의 목표가 설정되어야 한다. 꼭 명시적인 대화를 통해서 공동의 목표가 설정될 필요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일방적으로 주어질 수는 없다. 설령 묵시적일지라도 대화 참여자들이 대화의 목표를 충분히 공감하고 수용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일회의 대화가 아니라 보다 넓은 의미의 공동체로서의 목표일 수도 있다. 예컨대 SNS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도 있겠고 지역발전이 목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진정성을 갖추어야 한다. 대화 참여자들은 자신의 소중한 시간과 노력이 자신도 모르게 다른 목적으로 이용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목표와 용도가 명시적이며(explicit) 공공적(public)이어야 한다. 이는 대화 주도자에게 해당되는 요건이다. 일반적인 대화 참여자들이 대화를 통해서 자신을 알리거나 자신의 입지를 만들어가려는 의도까지 배제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요건을 갖추면 다이어로그가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은 Lawrence M. Miller의 “Dialogue: learning to Think Together(2004)”를 참고하여 작성된, 다이어로그가 성공하기 위해 실천되어야 할 요소들이다.

1) 경청하라(Practice Deep Listening): 논쟁할 때는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기 위해 귀를 기울이지만 다이어로그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경청한다. Miller의 글 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다. “다이어로그는 작가적 경청을 필요로 한(Dialogue requires the listening of the writer). 즉,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능력, 다른 사람의 스토리를 듣는 능력, 각 스토리에 의미를 부여하는 디테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능력이 필요하다(Miller, 2004: 9).”

2) 질의하라(Practice Inquiring versus Acquiescing): Miller의 지적처럼 “질문은 학습의 근본적인 수단이다.” 여기까지는 대단할 게 없고 다음이 중요하다. 논쟁과 달리 상대방을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에서 상대방의 기여를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 질문을 해야 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어떤 제안을 했다면, 그 제안의 완성도를 높이고 실현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이어로그는 대화의 상대를 성장시키면서 내가 성장하는 기회이다.

3) 판단을 유보하라(Practice Suspending Judgment): 논쟁에서는 판단이 빨라야 한다. 전광석화처럼 상대의 허점을 치고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이어로그에서는 누군가의 발언에 대해 서둘러 평가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충분한 반대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경험을 했고, 다른 사람보다 지식이 많으며,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보통 판단이 빠르다. 그것이 장점인 경우도 많겠지만 다이어로그에서는 단점이 된다. 다이어로그에서는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겸손이 최고의 미덕이다. 겸손이야말로 다른 사람이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여백을 준다.

수업이나 온라인 다이어로그에서는 겸손이 특별히 중요하다. 참여자들은 자신이 어떻게 평가 받을 지에 대해 두려운 생각을 갖기 쉽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이 편안히 자신의 생각을 발표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겸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4) 상대를 부인하는 유형화를 피하라(Avoid Dismissive Categorizing): 이 또한 뼈아픈 말이다. 그것은 논쟁에서는 가장 자주 사용되는 공격법이다. 좌빨, 수구꼴통, 진보, 보수…정말 우리 사회의 대화에서는 부인적 유형화가 아주 심하다. 사람이든 발언이든 부인적 유형화를 해버리면 그 다음부터 다이어로그는 회복 불능 상태에 들어간다. 일단 상대에게 색칠을 해버리면 그의 모든 발언이 긍정적으로 해석되기 어렵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상대나 상대의 발언에 대한 유형화는 피해야 한다.

5) 당신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라(Seek Your Authentic Voice):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모두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의 말을 이해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새겨본다. 말하기 전에 먼저 곰곰이 자신의 생각을 살펴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대화 중인 주제에 관해 자신의 입장이나 생각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입장을 찾았다고 생각되면 지체 없이 그리고 당당히 발언해야 한다. 대화의 흐름이 빠르면 말할 기회를 놓치기 쉽다. 그리고 일단 흘러가고 다면 대화의 초점을 되돌리기가 무척 어렵다.

다이어로그를 시작할 때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주제에 관한 잘 모를 수 있고, 참여자들의 사전적인 지식의 편차가 아주 클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이어로그가 진행되면서 참여자 개개인에게 정보와 깨달음이 빠르게 쌓여간다. 뿐만 아니라 다이어로그의 최대의 성과는 혼자라면 얻기 어려운 깨달음-지식-을 함께 얻게 되는 것이다. 집단지성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다이어로그가, 최적 상태에 도달하기 전에 끝나버리는 ‘집단사고(group think)’에 머물지, 아니면 참여자 개개인의 지적 능력을 초월하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을 성취할 지는 쉽게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전제조건을 충족하고, 다섯 가지 원칙을 잘 지킨다면 다이어로그를 성공시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윤영민, 2018-05-04)

우리는 모두 ‘배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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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공감의 시대, The Empathic Civilization>(2009)라는 저서에서 오늘날 우리는 모두 배우가 되었다고 썼습니다. 인터넷, 소셜미디어, 스마트폰의 발달은 연극적 자아(theatrical self)의 만개를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누구나 사이버공간이라는 무대에서 일생 동안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리프킨다운 탁월한 해석입니다.

정보기술의 발달은 마샬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의 지적처럼 우리로 하여금 나르시시즘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고 인정하지만, 리프킨은 긍정적인 가능성에 좀 더 무게를 둡니다. 정보기술 덕분에 그 어느 시대보다도 넓은 범위에서의 공감(empathy)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삶이라는 연극공연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의 영향을 받은 리프킨은 연극공연이 무엇보다도  공감과 협력이라는 특성을 지닌다고 강조합니다. 우선 공감은 크게 네 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첫째는 연극공연에 참가하는 사람들의 팀웍을 위한 공감입니다. 제작자, 투자자, 연출자, 시나리오 작가, 각색 담당, 배우, 무대 담당, 조명 담당, 음악 담당, 소품 담당 사이의 공감입니다. 이 공감에는 일종의 상황정의(definition of situation)가 필요합니다. 어떤 대본을 가지고, 누가 어떤 역할을 맡으며,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연극을 공연할 것인지에 대해 명시적이며 묵시적인 합의가 필요하지요. 그 바탕에 참여자들의 깊은 상호이해가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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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배역과 연기자 사이의 공감입니다. 대본의 스토리 속에 있는 배역들(characters)은 각자 나름의 자아(self)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누적된 경험, 사회적 관계, 직업, 성격, 배경, 감정, 컨텍스트가 배역의 자아를 구성합니다. 연기자가 그 배역의 자아와 혼연일체가 될 때 배역과 연기자 사이에 공감이 이루어집니다.

셋째는 연기자와 관객 사이의 공감입니다. 연기자와 관객 사이의 공감은 주로 연기자의 연기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연기말고도 관객의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여러가지 여건을 갖추어야 합니다. 언어, 음향, 배경 음악, 조명, 의상, 소품 등이 공연에 적합하게 확보되어야 합니다.

넷째는 연극공연은 그것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통해서 사회 전체와의 공감을 시도합니다. 연극과 같은 무대 공연은 공연 현장을 찾은 사람들과의 공감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나리오, 녹화 동영상, 비평 등의 확산을 통해서 연극공연은 보다 폭넓은 의미의 청중과의 공감을 추구하곤 합니다.

협력은 크게 두 측면에서  이루어집니다. 우선 연극공연 팀 내부에서 긴밀한 협력이 요구됩니다. 설령 연극이 일인극일지라도 협력이 필요합니다. 시나리오, 연출, 각색, 조명, 소품, 음향 등을 담당한 스탭과 연기자 사이의 협력이 필요하지요.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연극은 철저히 협력을 통한 공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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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는 연극공연팀과 관객 사이에 협력이 이루어집니다. <자아연출의 사회학>(1959/2016)에서 고프먼은 관객들(그리고 외부자들도)이 공연자들의 실수를 눈감아 주기도 하고 일부러 공연자들과 접촉을 자제하는 보호적 관행을 지적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객들은 공연의 흥행을 도와줄 뿐 아니라 자신들도 연극을 더 잘 즐기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의도적 무관심이지요.

연극공연에서 공감과 협력이 일어나려면 진정성(authenticity)있는 소통이 필요합니다. 연극공연에서 진정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지만 리프킨은 진정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는 연기자가 연기력으로만 배역을 표현하는 표면연기를 넘어서 배역의 자아와 일체를 이루는 심층연기를 해낼 때 진정성이 확보된다고 주장합니다.

리프킨은 일상적인 삶에서의 연극공연에서는 두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첫째, 공연자가 진정한 자아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리프킨은 자아에는, 타인에게 보여지는 현실적 자아,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상적 자아, 그리고 자신이 자기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진정한 자아가 있는데, 이중 진정한 자아를 드러낼 때 진정성이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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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진정으로 타인의 입장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즉, 타인의 목소리에 경청하고, 타인의 어려움, 고통, 슬픔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나아가 그것을 경감하는 실천에 나설 때 진정성이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리프킨은 정보기술의 발달 덕분으로 오늘날 공감이 직은 지역을 넘어서 전국, 전세계에 걸쳐 일어날 수 있으며, 그러한 지구적 공감은 인류 뿐 아니라 생물을 포함하는 생물권으로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해서 궁극적으로 ‘공감-엔트로피 역설’을 해소해야 한다고 그는 역설합니다. 리프킨은, 과학과 산업,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한편으로 공감의 지구적 확장을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엔트로피(다시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의 급속한 증가를 초래한 현상을 공감-엔트로피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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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킨의 대안은 구체적이고 명쾌합니다. 석유와 석탄 같은 재생불가능한 화석 연료와 핵연료 대신 태양열, 풍력 등과 같은 재생가능 에너지–그것은 분산 에너지이기도 하다–사용을 확대하며, 쓰레기를 줄이고 재활용하여 엔트로피의 증가, 대기 오염, 수질 오염, 해양 오염, 온실효과에 대처하고, 난개발로부터 자연을 보호하여 생물종의 감소를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사회조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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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입생들을 면담했더니 몇몇이 ‘사회조사분석사’라는 자격증에 관심을 보였다. 우리 학과 졸업생 중 사회조사분석사 자격증을 딴 학생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는 걸 보면 그 자격증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어제오늘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자격증의 실효성은 물론이고 시대적 적합성에 대해 무척 회의적이다. 사회조사방법과 사회통계학에 대한 지식을 테스트하는데 그 내용이 많이 낡았다. 기존에 개설된 관련 과목들을 제대로 수강했으면 누구나 합격할 수 있는 내용과 수준이다. 문제는 그것이 현장에서 사회조사자(social researcher)가 수행해야 하는 역할과의 불일치가 너무 심하다는 사실이다. (통계청 사이트의 사회조사분석사 검정자격기준을 참고하기 바람)

사회조사분석사가 1급과 2급으로 나누어 있듯이 사회조사자에도 다양한 수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은 디지털 시대에 사회조사자가 갖춰야할 전문적 지식과 능력은 다음과 같지 않을까?

사회조사자는 (1) 무엇보다 주어진 과제를 연구문제(research question)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조사는 규칙적인 사회 현상(social regularities)에 관련된 의문이나 쟁점에 대한 해답을 얻는데 필요한 실증적 근거를 만들거나 찾는 작업이다. 규칙적인 사회현상에는 사회문제(social problems), 사회적 쟁점(social issues), 사회적 의문들(social questions), 혹은 사회학적 의문이나 쟁점(sociological questions or issues)이 포함될 수 있다. 사회현상에 대해, 왜 그럴까, 어떤 상태인가, 앞으로 어떻게 될까,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어떤 해법들이 있을까, 어떤 해법이 상대적으로 더 바람직한가 등에 대한 답을 제시하는데 있어 실증적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사회조사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예측분석학(predictive analytics)에서 다루는 것 같은 개인의 행동에 대한 예측이 사회조사의 연구에 포함되어야 하는가는 논란이 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빅데이터 환경의 등장과 더불어 사회조사자가 ‘예측분석’ 능력을 갖추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트렌드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회조사자는 (2) 주어진 의문과 여건 아래에서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연구방법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설문조사, 실험, 심층면접, 참여관찰, FGI, 델파이, 예측(forecasting), 이차분석(secondary analysis), 시나리오 플래닝(scenario planning) 등과 같은 전통적인 연구방법은 물론이고, 구글링(Googling), 모델링(modelling), 컴퓨터 모의실험(computer simulation), 집단지성, 데이터과학(data science), 사회연결망 분석(social network analysis) 등과 같은 새로운 연구방법이 고려되어야 한다.

사회조사자는 (3) 자신이 그러한 방법을 혼자서 수행하거나 타인이나 기관(혹은 기업)과 협업을 통해서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모든 연구방법을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어떤 방식으로든 최선의 답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그것은 대부분의 경우 협업을 통해서 가능하다. 특히 해당분야 전문가, 통계학자, 수학자, 혹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의 협업이 필요하다.

흔히 제도는 변화를 따라오지 못한다. 제도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안정적인 시대에는 제도가 힘을 발휘하지만 급변하는 시대에 제도는 시대착오적이 되곤 한다.

현재 사회조사분석사라는 제도가 후자에 해당되지 않나 싶다. 사회조사분석사가 디지털 시대에 있어 사회조사 능력을 보증하는 자격증이 되지 못하고 있다.

 

사회과학과 공학의 융합이 성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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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옴[Assembly of twenty gods, predominantly the Twelve Olympians, as they receive Psyche (Loggia di Psiche, 1518–19, by Raphael and his school, at the Villa Farnesina)]
요즈음 학술적이든 실무적이든 융합 연구가 대세이다. 융합! 멋진 말이다. 그러나 융합적 연구는 아차 하면 ‘신들의 대리 전쟁’이 되고 만다.

빅데이터를 연구하는 데이터과학(data science)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데이터과학 연구에는, 영역 전문가(domain expert), 연구자(researcher), 컴퓨터과학자(computer scientist), 그리고 시스템 운영자(system administrator)라는 네 가지 역할이 필요하다. 앞 두 가지 역할이 통상 사회과학이나 통계학 전공자가 수행한다면, 뒤 두 가지 역할은 대체로 컴퓨터과학 전공자가  수행한다. 즉, 사회과학과 컴퓨터과학의 융합이 이루어 진다.

사회과학과 컴퓨터과학(혹은 공학) 사이의 융합에서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 혹은 혼란은 무엇일까? 그것은 융합 과정에서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에 고유한 가치와 질서가 심각하게 상호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사회과학은 광고, 저널리즘, 경영 같은 응용분야마저도 사회적 규칙성의 발견이 지상 목표이고, 가설-검증이 표준적인 접근방법이다. 반면에 컴퓨터과학(공학)에서는 과업수행(혹은 그것의 시간 단축)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알고리즘(혹은 프로그램)의 개발이 표준적인 접근방법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에서는 치밀하고 엄격한 과학적 방법으로 진리에 접근하였는가, 혹은 그런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자인가가 과제 심사의 평가 기준이 되고, 컴퓨터과학에서는 상대적으로 얼마나 우수한 알고리즘 혹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는가 혹은 그럴만한 능력을 가졌는가가 과제 심사의 평가 기준이 된다.

두 학문 분야의 평가기준이 참으로 다르다. 그런데 이 차이는 현실에서 심각한 갈등을 낳곤 한다. 만약 평가 심사자가 사회과학자인 경우 과제를 지원하거나 수행한 컴퓨터과학자들은 무척 난감해질 것이고, 반대로 평가 심사자가 컴퓨터과학자인 경우 과제를 지원하거나 수행한 사회과학자들이 곤경에 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학문간의 협업을 통해서 사회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아테나(Αθηνά)를 섬기는 사람들과 헤르메스(Ερμής)를 섬기는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제사장이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자신들의 숭배하는 가치와 질서를 부정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백여 년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어떤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학문 사이의 그러한 갈등을 신들의 전쟁에 비유했다.

“어떻게 프랑스 문화의 가치를 독일문화의 가치와 비교해서 <학문적으로(과학적으로)> 그 우열을 결정할 수 있을 지 나는 모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서로 다른 신들이 싸우고 있으며, 그리고 이 싸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옛날의 많은 신들은, 이제 그 주술적 힘은 잃어버리고 그래서 비인격적인 힘의 형태로, 그들의 무덤에서 기어 나와서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간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Weber, 1918/1997: 235-236쪽).”

어쩌면 베버(1997: 235)의 지적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어느 하나의 학문에서는 무엇이 신적인 것으로, 또 다른 학문에서는 또 다른 무엇이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는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일 뿐이리라.

융합은 서로 다른 신을 추종하는 전문가들 사이의 화합과 협력이다. 그런데 연구자들 상호간의 몰이해로 인해 융합은 쉽게 신들의 대리전으로 귀결되고 만다. 융합적 혁신과 지성은 무엇보다 신들의 화해와 공존을 실현해야 가능하다.

그 갈등을 예방하는 방법은 첫째, 상대 학문에 내재한 가치와 규범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둘째, 연구 과제의 성격에 따라 그에 타당한 평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황금알을 낳는 때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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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어느 곳에 아주 아주 훌륭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착하고 인심이 넉넉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때까우(거위) 한 가족이 날아들었습니다. 그 때까우들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매일매일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때까우 가족에게 신비스런 비밀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모이를 먹고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한 가지 모이였습니다. 때까우들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을 주민들이 서로 위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 주민들이 황금알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을 감추지 않나, 하나라도 더 가져가지 않나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서로 먼저 하나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마을에서 때까우 가족은 황금알을 낳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살아갈 수 조차도 없습니다. 때까우 가족이 점점 야위어 갑니다. 과연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2016/01/08)

배신, 정말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betrayal

협력에 있어 무임승차 못지 않게 자주 지적되는 문제는 배신이다. 배신은 무임승차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행위이며, 공공재의 생산뿐만이 아니라 모든 유형의 협력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친구와 동료를 배신한다, 조직을 배신한다 등등.

비협조도 넓은 의미에서 배신과 묶어서 생각할 수 있다. 비협조는 협력을 거부하는 행위이고, 배신은 기대(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모든 협력에는 구성원들의 협조가 기대되기 때문에 비협조도 약한 의미에서 배신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배신이 비협조의 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배신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분석모형은 죄수의 딜레마(the prisoners’ dilemma)이다. 이 게임의 논리는 간단하다.

함께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깡패 두 명이 잡혀서 조사를 받고 있다. 구치소에 갇힌 두 피의자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만약 두 피의자 둘 다 범죄 사실을 자백하면 두 사람 모두 세 달씩 구치소에 살아야 한다. 반대로 두 피의자 모두 입을 다물면 한 달씩만 살고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둘 중의 한 명만 자백할 경우 자백한 피의자(배신자)는 석방되고, 입을 다문 쪽(협력자)은 일년 형을 살아야 한다. 이 경우 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게임이론에 의하면, 죄수 A는, 죄수 B의 예상되는 선택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생각한다. 만약 B가 털어놓을 것 같으면 자기도 털어놓는 것(배신)이 자신에게 유리하다. 반면에 B가 입을 다물 것 같은 경우에도 털어놓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 B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게임이론에 의하면 결국 A와 B는 모두 자백(배신)을 선택하고 세 달씩 복역하게 된다. 소위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에 도달한다.

두 죄수 모두 동료 죄수가 결코 불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자백하지 않으면(협력) 둘 다 한 달만 형을 살고 나올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두 사람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죄수들은 상대편의 의리(?)를 믿지 못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판단한 결과 세 달씩 형을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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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는 대부분 죄수처럼 배신적으로 행동할까? 요차이 밴클러(<펭귄과 리바이어던>, 72)에 따르면 그 동안 많은 실험 게임들의 결과는 이론이 예측하는 것보다 피험자들이 훨씬 더 자주 협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협력의 조건을 바꾸면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협력의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기도 하고, 배신으로 얻는 기대 이익이 협력으로 얻는 기대 이익과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첫째, 많은 사람들은 ‘죄수’가 아니다. 즉, 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의심하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람들이 많다. 둘째, 사회적으로 정직과 신뢰의 문화를 만든다. 정직하고 희생적인 행동이 존경받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반면에 ‘배신’을 통해 얻는 사회적 기대수준을 낮게 만든다.

살다보면 누구도 배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들의 헌신적인 협력을 끝어내는 데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길게 보면, 배신하는 몇 명 때문에 참여자 모두를 의심하기 보다는, 참여자들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내고 차라리 몇 명에게 배신을 당하는 편이 궁극적으로 협력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공공재에 관한 무임 승차론, 적절한 문제 제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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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협력’하면 떠오르는 염려 중 하나는 ‘무임승차(free riding)’이다.  1965년 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이라는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저서가 남긴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러사람들의 협력을 통해서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전은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재는 그것을 창출하는데 동참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의 수혜를 배제할 수 없다. 올슨에 의하면, 그러한 공공재의 경우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손을 안대고 코를 푸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대가는 지불하지 않고 결과만 누리는 것이다.

특히 공공재의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커질수록 무임승차의 유혹은 커지고, 일단 무임승차자가 출현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협력할 의욕을 잃게 되어 결국 공공재의 공여는 실패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올슨은 ‘선택적 인센티브’로 무임승차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지만,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선택적 인센티브 제공이 불가능해지고 설령 공동의 목표가 있더라도 협력에 성공할 확률이 낮아진다고 역설한다.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하는 집단 행동(협력)의 가장 알려진 사례는 선거이다. 공직자 선거에서 유권자는 투표를 하기 위해 제법 많은 비용(시간, 수고 등)을 지불해야 한다. 선거 결과 상대적으로 훌륭한 공직자가 선출되면 좋지만 자신의 한 표가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꾀가 난다. 선거일에 투표를 하지않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투표율이 낮아지고 결국 그렇고 그런 후보들이 뽑히게 되며, 공직자들은 국민, 시민, 유권자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다수 유권자들의 무임승차 덕분에 장기적으로 선거 공학이 발달하고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올슨의 이론은 여러가지 바판을 받아왔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연 오늘날에도 반세기 전에 제기된 올슨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한가? 혹시 무임승차 이론은 잘못된 문제제기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임승차 이론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타산적인 유권자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국민으로서, 유권자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진지하게 투표에 임하는 다수 유권자의 협력적인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이지만 사람이 타산적(합리적)이라는 가정에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관련된 연구를 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이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항상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집합 행동에 있어 경제학 모형에서 가정하는 정도로 사람들이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이타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규범지향적인 사람도 있으며, 대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 투철한 시민적 책임감을 지닌 사람도 많다.

셋째, 예로 든 투표의 경우 무투표나 기권의 선택을 단순히 무임승차로 설명하는 것은 통계학에서 말하는 모형규정의 오류(model specification error)일 수 있다. 무투표의 설명 모형에 중요한 요인(들)이 빠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선거에 참여한 정당들이 성격, 노선, 정책 등에 있어 별로 차이가 없다든지, 후보자들이 그밥에 그나물이라든지, 누가 뽑히던 정부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든지 등과 같은 중요한 사회정치적요인들이 무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투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공공재 생산에서 자주 목격되는 참여 가치 현상이 무임승차론의 결과중심적 해석에 반한다. 예컨대 자발적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서비스가 제공될 경우 참여자들에게는 참여 자체에서 느끼는 보람이나 기쁨이 결과 향유에 못지 않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즉, 참여 자체가 훌륭한 동기가 될 수 있는데도 무임승차론은 참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념은 인간의 인식을 규정한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무임승차론은 지금까지 보다 훨씬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협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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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협력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을까? 아마도 일반적으로 “힘을 합쳐서 서로 도움”(네이버 국어 사전)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협력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일한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이 어려워질 뿐 아니라 협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 정의에서 가장 크게 벗어난 정의는 진화생물학에서 발견된다. 위 사진의 논문 2-3줄에 흥미있는 협력의 정의가 제시되어 있다. 이 논문은 마틴 노왁(Martin Nowak)의 “협력의 진화를 위한 다섯가지 규칙(Five Rules for the Evolution of Cooperation)”(Science 2006, Dec. 8; 전체 논문은 첨부 파일 참조)이다.  이 글에서 “협력은 이기적 복제자들이 서로 돕기 위해 자신들의 재생산 잠재력을 일부 포기함을 의미한다(Cooperation means that the selfish replicators forgo some of their reproductive potential to help one another).” 여기서 복제자(replicator)는 진화생물학에서 진화의 단위(evolution unit)를 가리킨다.

이 논문에서 노왁은 경쟁이 지배하는 자연도태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는 협력이 가능한가를 탐구한다. 저자는 혈연선택, 직접 호혜성, 간접 호혜성, 네트워크 호혜성, 집단선택 각 이론이 제시하는 협력 조건을 각각 한 줄의 부등식으로 표시한다. 예컨대 일개미가 자신 스스로의 번식을 포기하고 여왕 개미에게 번식을 전담하게 하는 것은 협력으로 간주된다. 윌리엄 해밀턴은 일개미의 그러한 협력 행동이 유전자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떠어떤 이유로 일개미는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는 50%의 유전자밖에 남겨주지 못하지만, 여왕 개미를 도와서 일개미를 낳게 하면 자기 유전자의 75%를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진화를 포기한다고 해석한다.

우리 인간도 개미처럼 유전자 주인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유전자 신화를 믿지 않는다면 진화생물학적 개념 정의는 수용하기 힘들다. 사회학적으로 협력이란 목표 혹은 목적 없이도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행동이다.

협력이 왜 일어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전부라면 협력을 어떻게 정의하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협력을 어떻게 촉진할 것인가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진화생물학–특히 게임이론적 접근–적 정의는 연구에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하는 수많은 협력은 목적 지향적이나 목표 지향적이 아니라 과정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왜 협력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협력에 이유가 더 필요한가? 협력 연구자의 과제는 협력을 “즐겁게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되리라.

공유지의 비극, 피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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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개입 없이 공유지(commons)는 비극적인 파탄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은 오랫동안 사회과학자들의 상상을 비관적 전망에 결박하였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공유지에 대한 비극적 전망론에 불만이 많았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그중 가장 성공적으로 ‘공유지의 비극’론에 도전하였다. 정치학자인 그녀에게 노벨 경제학상이 수여된 것은 아마도 그러한 학문적 성취가 지닌 커다란 가치를 확인하는 절차였을 것이다.

공유지는 협동보다는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유혹이 강한 상황이다. 공유지를 제공하는데 수고하지 않은 사람도 공유지의 혜택으로부터 배제하기 어렵고, 개인이 배신이나 비협력으로부터 얻는 이익은 큰 반면 거기서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가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오스트롬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래 문장으로 요약된다. 인간은 상호협력을 통해서 공유지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아래 두 문장으로도 요약된다. 인간은 상호협력을 통해서 공유지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상호협력은 공유지(공유 자원) 사용자들이 주체가 된 제도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좀 더 길게 한 문단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공유지의 비극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다. 사용자들이 상호협력이 가능한 사회적 자본을 갖추고, 사용자들이 나서서 몇 가지 수준의 제도를 구축하며, 나아가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감시장치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면. (여기서 제도란 사용자에 대한 금지, 요구, 또는 허용이 명시된 규칙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려면 공유지가 장기적으로 존속 가능해야 하고, 공유지에 대한 접근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어야 하며,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국가가 제도의 운영을 뒷받침해 줄 수 있고 시장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결국 공유지 문제는, 공유지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용자 자신들이 나서서 그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고, 해법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며, 철저한 감시 장치를 통해서 사용자 누구도 ‘순진한 바보’로 전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정부는 공유지가 고갈되지 않도록 자원을 투입하고 사용자들의 합의를 법적으로 뒷받침해주며, 정보의 획득과 공유에 필요한 비용이나 감시에 수반되는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사용자들의 해결을 지원해 줄 수 있다. 사용자들은 필요한 경우 공유지 사용권을 시장을 통해서 양도할 수도 있다.

오스트롬은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15개 이상의 사례에서 공유지 운영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고, 분석틀을 도출해서 제시한다. 그녀의 분석틀은 경제학 모형, 혹은 게임이론이나 합리적 선택 모형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그것은 고도로 추상적인 모형의 전제를 완화시키고 현실에의 적합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타협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멋진 타협이 되었다.

그녀의 이론은 간명함의 아름다움을 잃은 대신 현실문제의 해결가능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개념은 미래에 대한 활인율(discount rate)이다. 공유지 존속의 불확실성이 높거나, 대체 공유지의 이용가능성이 높거나, 사용자들 사이의 신뢰가 부재하거나, 사용자들의 정주성이 낮으면 현재 편익의 가치(인지된 가치)가 미래 편익의 가치에 비해 커지게 된다. 즉, 미래에 대한 활인율이 높아진다. 미래에 대한 활인율이 높아질수록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합의와 집합행동이 어렵게 된다. 기회주의적 선택이 가져오는 편익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살았던 두 개의 농촌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공동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였던 엄청난 차이가 떠올랐다. 마음이 떠나버린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의 장기적 복지를 위한 어떤 해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오직 어떻게 하면 보다 비싼 값에 땅을 팔고 마을을 떠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졌다. 반면에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들이 대다수인 마을에서는 장기적인 협력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미래에 대한 활인율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이 지닌 최대의 장점은 디테일에 있다. 로스엔젤러스 근처 해안지대에서 지하수 분지의 안정적 이용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풀었는가에 대한 상세한 분석, 스위스와 일본의 고산 지대 목초지와 산림의 공동 소유, 스페인의 발렌시아 지방과 필리핀의 일로카노스 지역의 관개제도가 어떻게 해묵은 지역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는가에 대한 분석을 따라 읽으면, 한편으로 인간이 공유지 문제를 고전적인 게임이론이나 집합행동이론이 예측케 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롭게 해결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공유지 문제 해결에 관한 실질적인 지혜도 덤으로 얻는다.

그러나 공유지 딜레마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각 공유지가 처한 환경은 고유한 특징과 성격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이론이나 분석틀은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는데 가이드가 되어줄 수는 있지만 각 공유지 문제에 대해 바로 답을 줄 수 없다. 오직 오랜 세월 동안의 도전과 시행착오를 통해서만이 안정된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공유지와 같이 기회주의의 유혹이 큰 상황에서 협력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 문제를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리라.

협력에 관한 최고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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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이 책이 112년 전(1902년)에 출간되었단 말인가? 내게는 마치 몇 년 전에 씌여진 책으로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참 놀라운 책이다. 아니 어쩌면 100여년 만에 이 책의 메시지를 다시 주목하게 되는, 세상 흐름의 반전이 더 놀라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나키즘을 생물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고, 단채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니고, 진화론이나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있어서 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책을 협력의 이론적 토대를 구하기 위해 읽었다.

내게 읽힌 이 책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협력–크로포트킨의 표현으로는 상호부조(mutual aid)–은 적자생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의 원리이다. 크로포트킨은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이나 사회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종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화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라는 다수 다윈주의자들의 진화론, 원시인간사회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스펜서와 홉스의 사회이론은 그의 사상이나 직관은 물론이고, 일상적 경험이나 학문적 연구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은 이 책에서 1) 찰스 다윈은 협력(상호부조)이 생존경쟁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법칙임을 강조했음을 지적하고, 2) 자연에서 상호투쟁보다 군집(association)과 상호부조(mutual aid)를 의미하는 사회성(sociability)이 진화의 핵심 요소임을 밝혔으며, 3) 특히 미개사회부터 현대사회까지 인간사회의 진화는 사회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였다.

비록 현대 진화생물학에서 보는 유전자 분석이나 진화심리학에서 보는 뇌파 분석과 같은 정교한 과학적 연구방법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선한 심성,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그의 뛰어난 직관과 통찰, 그리고 그의 탁월한 연구역량은 이 책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책은 개미, 꿀벌, 독수리, 할미새, 두루미, 앵무새 등에서 시작해서 다람쥐, 비버, 산토끼, 순록, 그리고 늑대, 사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곤충과 동물의 사례를 통해서 개체와 가족을 뛰어넘어 동종 심지어 이종간에 일어나는 상호부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특히 포유류들에게 군집과 상호부조는 철칙이라고 강조한다(68). 죽은 동료의 시체 위를 빙빙 돌며 울부짖다 죽어가는 앵무새의 동료애, 비가 오면 떨고 있는 동료들의 목을 자신들의 꼬리로 감싸주면서 서로 보호하는 티티원숭이, 그리고 원숭이들이 행하는 각가지 놀라운 협업은 협력이 자연적이며 위대한 행위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확인시켜준다.

크로포트킨은, 동물세계의 진화에서 상호부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사회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해 책의 3분의 2 이상을 할애한다. 그는 소위 “자연상태”, 즉, 인류의 원시적인 조직형태는 가족이 아니라 무리 혹은 군집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부시맨, 호텐토트족,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파푸아족, 에스키모, 알류트족 등 소위 미개사회에 존재하는 연대정신과 사회적 예의범절을 보여준다. 그는 단언한다.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원시인들의 특징은 아니다(120).”

그는 인류가 씨족사회를 벗어나게 되면서 ‘촌락 공동체’가 대표적인 생활형태가 되었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촌락 공동체는 공동의 혈통으로 간주되고 공동으로 일정한 영역을 소유하는 가족들끼리의 연합이다(160).” “촌락 공동체는 공동경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법적, 군사적, 교육적, 경제적 양식이 변경될 때마다 촌락, 부족 또는 동맹의 민회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163).”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촌락 공동체의 전통은 중앙집권적 국가나 지배계급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에는 공유지, 중세도시, 길드 그리고 현대에서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상조회, 자선단체 등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전통의 핵심은 바로 상호부조이다.

다음 두 가지 인용은 협력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이론적 입장을 잘 요약해준다. “인간 심리에는 동기가 있다.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호소를 듣고 이에 응답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영웅들은 행동한다. 모든 사람들은 영웅들이 할 일은 자신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라는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고 인류가 나타나기 전 수십만년 동안의 군거 생활 속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323).”

“요약하자면,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서 만들어낸 상호증오와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연대감이란 앞선 진화 과정 속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단계부터 진화를 거듭하며 얻어진 연대감이 마찬가지로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단 한 가지 요인 때문에 해체될 수는 없다. 최근에 작게는 가족이나 빈민가에 사는 이웃들 그리고 촌락이나 노동자 비밀 결사 형태로 숨어들었던 상호지지와 지원에 대한 욕구는 근대 사회에서도 다시금 거듭 주장되었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미래의 진보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338-339).”

크로포트킨이 이 책을 출간한 지 104년 후인 2006년 하버드대 진화생물학 교수인 마틴 노왁(Martin Nowak)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저명한 논문, “협력의 진화를 위한 다섯가지 법칙”에서 다음과 같이 크로포트킨의 명제를 반복했다. “따라서, 우리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외에 “자연적 협력”을 진화의 세번째 근본 원리로 추가할 수 있겠다(Thus, we might add “natural cooperation” as a third fundamental principle of evolution beside mutation and natural selection)(1563 쪽).” 노왁이 인간을 타산적이라고 가정하는 게임이론을 통해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2012년 출간한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에서 크로포트킨의 명제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 수준으로 밀어붙인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집단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의도를 읽고 협력하는 한편, 경쟁하는 집단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지닌 집단은 그것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보다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 사이의 경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 경쟁은 한 개인을 남보다 유리하게 만드는 형질의 자연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새 환경으로 진출하고 강력한 적수와 경쟁하는 종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집단 내의 단결과 협동이었다(2013 한글판, 273쪽).”

노왁도 윌슨도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이 그와는 다른 길을 따라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