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와 장미 가시

SAMSUNG CSC
대문을 타고 오르는 넝쿨 장미의 가시

닷새째 되던 날 어린 왕자가 주인공에게 물었다.

“가시는 어떤 쓸모가 있어?”

고장난 비행기를 수리하는데 여념이 없던 주인공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가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가시는 꽃이 부리는 단순한 심술일 뿐이야!”

“아저씨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꽃들이…..”

“아니! 난 아무 생각도 없어!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한 거야. 난 지금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인공의 태도에 어린 왕자는 크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중요한 일이라고?”….

“아저씨는 어른들처럼 말하는구나!”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김미성 옮김, 인디고, 2016)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화가 난 어린 왕자는 주인공에게 수백만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양들과 꽃들 사이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가시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나는 연장을 내려놓았다. 망치도, 볼트도, 목마름도, 죽음도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별, 어떤 행성, 내 행성, 바로 지구에 위로해 주어야 할 어린 왕자가 있었다(56쪽).”

“미안하다. 아빠는 지금 정말 중요한 일을 하느라 너와 대화를 하지 못하겠구나.” “여보, 중요한 일 때문에 다음 주에 당신과 여행가기로 한 약속을 연기해야겠어. 미안해요.” 늘 그렇게 구차스럽게 변명하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순간, 소중한 인연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구별 여행을 후회없이 마치기 위해 꼭 해야만 할 정말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윤영민, 2016/02/16).

눈속의 필암

SAMSUNG CSC
눈보라 속의 필암문화원
SAMSUNG CSC
눈보라 속의 필암마을 입구
SAMSUNG CSC
눈내리는 필암문화원 전경
SAMSUNG CSC
눈속의 필암마을
SAMSUNG CSC
얼어붙은 빨래터
SAMSUNG CSC
눈보라 속의 삼연정
SAMSUNG CSC
눈이 멈춘 필암문화원
SAMSUNG CSC
눈이 멈춘 핑암문화원
SAMSUNG CSC
눈 속의 필암서원
SAMSUNG CSC
눈 속의 필암서원
SAMSUNG CSC
눈 속의 필암뜰
SAMSUNG CSC
눈 속의 필암 실개천

눈과 아이들

SAMSUNG CSC
필암뜰에서 눈사람 만드는 아이들

필암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린다. 하지만 날이 포근하기 때문에 금방 녹아버린다. 그래서 필암에서 눈을 즐기려면 제법 운이 좋아야 한다.

어제 마을에 학생들이 행운과 함께 체험학습을 왔다. 아침에 눈이 많이 내려 필암뜰에서 하늘이 주는 혜택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눈싸움을 하고, 눈사람도 만들고, 눈위를 걷기도 하면서.

농촌에 사는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혜택은 자연과 더불어 실컷 지낼 수 있다는 점일 게다. 사실 어느 지역의 아이들에게도 자연은 가까이에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필암뜰이 더 많은 아이들에게 자연과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2016/01/15)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

1402014_711750135501890_1230638161_o

하서의 시가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자연, 사람 그리고 시인 자신이 전혀 구분될 수 없도록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강천사에 효선이라는 지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쓴 시로 추정되는 剛泉寺 留別孝先(강천사 유별효선: 강천사에 효선을 남겨두고 오다)에는 하서의 그러한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山中一雨過 樓前溪水碧(산중일우과 누전계수벽)

산중에 한차례 비가 내리니 누각앞 시냇물이 푸르러졌다

巖高日欲西 古樹長百尺(암고일욕서 고수장백척)

바위 위의 해는 서쪽으로 지려하고 고목의 키는 백자가 넘는다

僧徒送行客 兩兩座溪石(승도송행객 양양좌계석)

스님들은 방문객을 배웅하려고 짝지어 물가에 앉아 있다

握手謝留伴 杯深傾不惜(악수사유반 배심경불석)

손잡고 벗과 작별하면서 잔을 가득 채워 아낌없이 마시네(술마시는 것을 不惜身命, 몸이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도를 닦는데다 비유한 것인가?)

寒風何處來 颯颯掠雙頰(한풍하처래  삽삽략쌍협)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이 홀연히 두 빰을 훔치는구나(멋진 표현이다! 삽삽은 바람불어오는 소리를 느끼게 하는 의성어 아닌가?)

落葉沒前徑 蒼蒼間松竹  (낙엽몰전경 창창간송죽)

낙엽은 오솔길을 파묻고 군데군데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다(지름길 경, 창창은 푸른 모습을 느끼게 하는 의태어?)

一醉歸去來 幽禽響空谷(일취귀거래 유금향공곡)

한껏 취해 돌아가려니 새소리가 빈골짜기를 울리네(‘귀거래’라는 표현을 빌려와서 세상을 등진 도연명과 같은 심정을 슬쩍 내보인 것은 아닐까? 그윽할 유 자를 쓴 이유가 무얼까?)

석양에 친구 스님과 헤어지는 순간이다. 늦가을 강천계곡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다. 그러한 계곡의 모습이, 헤어짐의 아쉬움, 그리고 한 잔 술과 어우러진다.

자연주의자, 또한 낭만주의자로서의 하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황금알을 낳는 때까우

10169701-golden-eggs-in-nest-isolated-on-white-Stock-Photo-gold-egg-nest

전라도 어느 곳에 아주 아주 훌륭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착하고 인심이 넉넉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때까우(거위) 한 가족이 날아들었습니다. 그 때까우들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매일매일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때까우 가족에게 신비스런 비밀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모이를 먹고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한 가지 모이였습니다. 때까우들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을 주민들이 서로 위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 주민들이 황금알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을 감추지 않나, 하나라도 더 가져가지 않나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서로 먼저 하나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마을에서 때까우 가족은 황금알을 낳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살아갈 수 조차도 없습니다. 때까우 가족이 점점 야위어 갑니다. 과연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2016/01/08)

어른

김수환_법정

어른이 되면 한 가지를 얻고 열 가지를 잃습니다.

어른은 함부로 속 마음을 내보일 수 없습니다. 항상 온화한 모습으로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한 사회의 평화는 어른들의 온화함 속에서 나옵니다.

어른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좋은 것은 주위 사람들이 먼저 갖도록 해야 합니다. 어른이 먼저 자기 잇속을 챙기면 사회는 아귀다툼에 빠집니다.

어른은 늘 남을 배려해야 합니다. 항상 주위 사람들의 형편을 살펴야 합니다. 어른이 이웃들의 통곡을 베고 편안히 잠들 수는 없습니다.

어른은 늘 베풀어야 합니다. 어른 한 명이 지갑을 열면 가난한 이웃 열 명에게 희망이 생깁니다.

어른은 당산나무처럼 든든해야 합니다. 죽는 소리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이웃들이 기댈 곳이 있습니다.

어른은 이웃을 넓게 포용해야 합니다. 어른이 당파성을 갖게 되면 사회가 평화를 구하기 어렵게 됩니다.

어른은 정의를 쫓아야 합니다. 그래야 역사와 사회의 기강이 바로 섭니다.

어른은 생색을 내서는 안됩니다. 선행을 하고서 남이 자신을 알아주길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은 예측 가능해야 합니다. 쉽게 부화뇌동해서는 안됩니다. 어른이 흔들리면 사회가 좌표를 잃게 됩니다.

어른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사라져야 합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면 마지막이 추해집니다.

진정한 바보만이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어른은 가진 것 다 내어놓고, 잘 해야 존경을 얻을 뿐이지요.

그래도 누군가가 그 어려운 “어른”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이 너무 각박해요.

아, 내 한몸 편하자는 속셈인가. (윤영민, FB 2015/08/27)

마지막 무대

오드리_햅번

노년은 이 위성에서의 마지막 무대이다. 그 고별 무대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오직 그 때까지 살아남은 자에게만 돌아온다. 그 점만 보아도 노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기회이다.

그 무대에서 어떤 공연을 펼칠 지는 개인에게 중대한 선택이다. 일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마도 평안과 휴식을 택할 것이고, 붙박이처럼 직장과 집을 왕복하며 살아온 사람은 버킷 리스트의 순서에 따라 실컷 여행을 떠나고 싶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에 봉사를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즐기며 살고 싶어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구라는 정박지에서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떠나고자 할 것이다.

그 실존적 선택에 대해 누구도 딴지를 걸 수는 없다. 어떤 노년이 아름다운가를 재는 보편적 잣대는 없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자신만의 스토리를 완성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타까운 노년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인생의 작가가 자신이 아니라 타자인 경우이다. 돈 때문에,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회적 명성 때문에, 남의 눈 때문에, 자식 때문에….

멋진 무대 공연이란 어쩌면 시간의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나이에 관계없이 한 순간이라도 인생 스토리에 있어 자신이 작가이고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커다란 후회없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마지막 무대 공연을 스스로 결정할 수만 있어도 행복한 노년이다. 노인이 되기 훨씬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선택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선택을 대신해 주는 경우도 있다.

떠날 때가 가까워지면 누구나 진지해진다. 삶의 끝이라는 가상적 상황에서 살아온 길을 복기하는 일이 잦아지는 걸 보면 나도 마지막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오기는 온 모양이다. (윤영민, FB 2015/04/28)

뿌리

시내

시냇물을 매일 보다보면 눈앞에 물만 보지 않고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게 됩니다. 저 물이 어디에서 발원해서 어디를 거쳐서 흘러 왔는지 궁금해지지요.

오늘은 물이 깨끗하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이 깨끗하지 않으면 누구집의 논에 물을 대는가 아니면 누군가가 오수를 방류했는가 생각합니다. 그냥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합니다.

오늘처럼 물이 맑으면 그냥 감사하게 됩니다. 비를 내려준 하늘에게도 감사하고, 오수를 버리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감사합니다.

시냇물을 보는데 훈련된 철학자, 문학자, 사회학자, 종교인일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물을 오래 보면 거기에서 철학이, 시가, 사회분석이, 심지어 신심마저 생겨납니다. 자연은 그렇게 우리의 진정한 스승이며 인도자입니다.

4백년 전 하서 선생은 시냇물을 보면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걸음 걸음 물결 보며 올라가면서
시 읊으니 생각이 더욱 그윽해
참 근원을 사람들은 찾지를 않고
담장 뚫고 흐르는 물만 멍하니 쳐다보네.”
(‘담장 밑을 뚫고 흐르는 물’, 이기동 역) (윤영민, FB 2015/04/17)

SNS 포스팅

SNS 포스팅은 말걸기이다. 아무리 심각하고 어려운 내용일지라도 대화라는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내’가 ‘네’게 말을 걸고, ‘네’가 ‘내’게 응답하면서 우리 자신과 세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기서 진짜 중요한 것은 ‘나’도 ‘너’도 아닌 대화 자체인지도 모른다.

SNS 포스팅은 스토리 라이팅이 아니다. 스토리 라이팅은 형식을 갖춘 ‘글쓰기’이다. 그것에는 저자의 치밀한 기획과 구성, 그리고 테크닉이 요구된다. ‘글쓰기’는 신문 기사, 방송 뉴스, 시, 소설, 드라마, 논문처럼 일방향적 성격을 벗어나기 어렵다. 스토리 라이팅은 먹물들에게 가장 익숙한 발화 형식이다. 그래서 나도 자주 그렇지만 먹물들의 포스팅은 글쓰기인 경우가 많다.

SNS 포스팅은 전통적인 스토리텔링에 가깝다. 스토리텔링은 ‘말하기’이다. 글쓰기와 달리 그것은 형식이 자유롭고 특별한 테크닉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말하기는 대화의 상대가 분명하고, 즉흥적이며 가변적이다. 그 때 그 때 청자들의 관심과 분위기에 맞추어 화제를 고르고 임기응변의 변주를 얼마든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고 SNS 포스팅이 딱 떨어진 스토리텔링은 아니다. 그것은 ‘말하기’라기 보다 ‘대화(dialogue)’이다. 진정성을 기반으로 한 언어적 교감이다. 말을 주고 받으며 서로 섞는 행위이다. 때문에 댓글과 답글이 포스팅 이상의 비중을 지닌다. 포스팅은 댓글놀이와 더불어 완성된다.

아니다. 어쩌면 미하일 바흐찐의 주장처럼 대화에 마감이란 없는 지도 모른다. 삶은 대화이고, 그것은 세상이 끝나는 날에야 마치게 될 것이다. (윤영민, FB 2015/04/19)

늙어감에 대한 반역

나이를 먹어가면 점점 편한 게 좋아진다. 새롭게 뭔가를 배우고 생각을 바꾸고, 시도하는 것이 귀찮고 두렵다. 심신의 적응력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게 늙는 것이리라.

지금까지 당연시 해왔던 것들을 뒤집어보고 거부하면 삶의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도전은 우리를 일상의 감옥으로부터 꺼내준다. 물론 그것은 불안과 위험을 가져오지만 삶에 활력이 솟구치게 해준다.

오늘은 뭘 거부해볼까, 이번 주는 뭘 뒤질어볼까, 이번 방학에는 어디로 탈출해볼까, 이번 학기는 어떤 변화를 시도해볼까, 올해는 뭘 새로 배워볼까…이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교수는 서서 가르치는데 학생들은 왜 앉아서 수업을 듣는가, 왜 강의를 학생들 앞에서 해야 하는가 뒤에서 하면 안되나,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전산학을 가르치면 안되나, 정치인들에게 주는 보수를 모두 없애버리면 안될까, 왜 자꾸 새로운 기계에 적응하게 하나 기계가 내게 적응해야지, 왜 꼭 투표소에서 투표를 해야하나…지리산 속에 살면서 출퇴근하면 어떨까, TV 없는 세상이 낫지 않을까, 휴대폰이 점점 값비싼 올가미가 되는구나…없애 버릴까…

앞으로도 계속 생각을 변화시키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좀 고단하기는 하지만 삶이 재밌지 않는가. 오늘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겠다. (윤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