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조사의 기초(강의 노트)

우리는 수시로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심심풀이로 하면 검색(search)이고, 과제나 업무로 하면 조사(research)이다. 인터넷 검색과 조사는 우리의 일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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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을 할 줄 모르는 인터넷 사용자는 없다. 그러나 조사를 제대로 하는 인터넷 사용자는 생각보다 드물다. 인터넷이 지닌 영향력을 고려할 때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마땅히 인터넷 조사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인터넷 조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대학생이 얼마나 될까? 그 동안 대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아주 소수만이 ‘네트워크 리터리시(network literacy)’를 갖추고 있다. 인터넷 조사에서 기초적이면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 지혜를 공유한다.

1. 조사 문제의 정의(definition)

무엇보다 먼저 무엇을 찾을 것인지를 잘 정해야 한다. 무턱대고 검색창부터 들어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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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 엔진은 답을 주지 않는다. 오직 사용자 자신만이 답을 발견할 수 있다. 검색 엔진은 정보찾기 도우미일 뿐이다. 검색 결과를 답으로 오인하면 안된다.

검색 엔진은 사용자의 능력을 넘어서지 못한다. 검색 엔진은 미숙한 사용자가 찾으면 엉터리 정보를 내놓고, 능숙한 사용자가 찾으면 알짜 정보를 내놓는다. 미숙한 사용자와 능숙한 사용자의 차이는 조사 문제(research question)의 규정에 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규정한다.

인터넷에서 무엇을 얻고 싶은가? 이에 관해 한 가지만 언급한다. 아이디어, 의견, 이론, 데이터 중 무엇을 원하는지 우선 그 점을 분명히 해야한다. 데이터가 필요한데 의견을 찾아서 인용하면 재앙이 된다. 이점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잊지 말자. 인터넷 시대에 현자(賢者, wise person)는 잘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묻는 사람이다.

2. 의심(doubt)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한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사람을 쉽게 믿는다(덕분에 자주 속고 산다). 그렇지만 인터넷 정보는 결코 믿지 않는다. 인터넷이, 아는 사람들 사이의 통신에서 다수의 모르는 사람들을 포함한 통신으로 바뀌면서 신뢰(trust)의 기초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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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정신은 개방(openness)과 공유(sharing)이다. 인터넷은 누구나 자유롭게 말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 개방과 공유는 공짜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 신뢰(trust)–진실(truth)이라고 불러도 좋다–가 댓가로 지불되었다. 인터넷에서 인류는 국지적인 신뢰(parochial trust) 대신에 지구적인 개방과 공유(global openness and sharing)를 선택했다.

검색엔진을 통해서든 지인의 추천을 통해서든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에 대해서는 무조건 의문을 제기하자. 통신공학적으로 표현하면, 걸러지지 않은 인터넷 정보는 잡음(noise)이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쓰레기이다. 아무리 보물이 섞여 있어도 쓰레기는 쓰레기이다. 인터넷은 홍보(publicity), 선전(propaganda), 과장(overstatement), 오보(misinformation), 허위정보(false information), 역정보(disinformation), 농담, 헛소리 등으로 가득하다. 조사를 위해 인터넷 정보를 사용하려면 그러한 쓰레기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야 한다.

손에 쥔 정보가 누구에 의해,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생성된 것인지, 누구의 손을 거쳐서 온건지, 그 과정에서 왜곡은 없었는지, 정보의 생산자는 신뢰할만한 사람(혹은 기업이나 기관)인지, 정보의 전달자는 신뢰할만한 사람(혹은 기관, 기업)인지,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자료는 아닌지, 데이터는 충분히 신뢰할만한 과정을 통해서 생성된 것인지 등을 따져야 한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많지만 비용없이 생성된 정보는 없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기관이든 비용을 투입할 때는 반드시 목적이나 이유가 있다. 목적이나 이유가 좋은 경우도 많지만 그 때문에 진실이 비틀릴 가능성이 있음에 유념해야 한다.

2. 거르기(Filter)

인터넷 조사에서는 효과적인 filtering이 핵심이다. 인터넷에서 진실을 찾고 싶은가? 그러면 걸러야 한다(filter). 우리가 찾는 진실–정보와 지식–은 신호(signal)라고 표현할 수 있인데, 그 신호는 반드시 수많은 잡음이 filtering이라는 절차를 거치고 난 후에야 정체를 드러낸다. 예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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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를 거르는 방법이 많다. 정성적인 방법도 있고, 정량적인 방법도 있으며, 사회적인 방법도 있다.

정성적인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정보를 판별해야 한다. 정보 하나 하나에 대해 꼼꼼하게 진위를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 정도는 없다. 필자는 구글 검색 결과를 얻으면 적어도 상위 두 페이지의 목록에 든 웹사이트나 문건을 하나씩 신중하게 검토한다. 특정 검색엔진을 거론해서 그렇기는 하지만 필자는 네이버 검색을 사회 조사 용도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유용한 신호가 적을 뿐 아니라 잡음 대 신호비가 너무 낮다.

정보를 엄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관계를 통해서이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기관, 단체 혹은 기업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선택에 도움을 받는다. 신뢰할만한 개인 혹은 집단과 정보를 나눌 수 있으면 filtering이 우수하고 빨라진다.

관계 중 최상위에는 대학도서관이 있다. 대학도서관의 교외접속을 이용해서 온라인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한다(국가전자도서관을 통해서도 유사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대학이 유료로 구독하는 전문 저널, 잡지, 책, 웹사이트는 1차로 전문가들에 의해 걸러진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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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용하며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주는 블로그도 적지 않다. 다만 블로그는 워낙 그 수준과 목적이 다양하니 잘 선별해서 활용해야 한다. 다행히 각 분야에는 신뢰할만한 블로그들의 널리 알려져 있어 비교적 쉽게 찾을 수 있다. 개인 뿐 아니라 기관, 단체, 혹은 기업의 블로그에서도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Filtering의 부담이 크다는 것이 약점이다.

빅데이터 시대가 되면서 정량적인 방법도 filtering에서 효과적이다. 다만 아직까지 비전문적인 개인이 빅데이터 분석 방법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다. 빅데이터 분석 서비스를 제공하는 웹사이트를 이용하면 트렌드를 파악하는 정도의 정보는 간편하게 얻을 수 있다.

대학생들에게 조사를 시켜보면 가장 흔히 활용하는 것이 언론 보도이다. 때문에 그에 대해 특별한 언급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검색 사이트의 ‘지식인’에 의존하지 않는 것만 해도 어찌보면 다행이다. 그런데 인터넷상에서 얻어지는 언론 보도는 그야말로 지뢰밭이다.

종이신문 시대에는 언론사가 filtering의 수고를 대신해주었다. 그것이 종종 세상이 왜곡되어 비쳐지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일반인들이 효율적으로 정보를 얻는 방법이었다. 그 때는 한 마디로 언론사를 선택하면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러한 방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과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언론사가 몇 개나 될런지 모르겠다.

언론 보도는 홍보자료(press release), 보도 기사(news article), 피처 기사(feature article), 심층 기사(investigative report), 광고, 홍보성 기획기사(special feature article), 의견 기고(opinion column), 사설(editorial) 등 매우 다양한 유형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다. 이 중 사회조사에 활용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보도 기사와 심층 기사 정도이다. 사실 그것마저도 근래에는 기업이나 기관의 홍보와 섭외를 통해서 작성되거나 왜곡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에 부주의하게 인용해서는 안된다.

홍보성 기사를 판별할 때 필자가 쓰는 체크 리스트는 아래와 같다. 참고하기 바란다.

1) 신뢰할만한 언론사의 보도인가? 그것은 아직 유효한 판단 기준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기준일 뿐이다.

2) 한 기업이나 기관에 관해서만 작성된 기사인가? 그런 경우 정말 대단한 뉴스 가치가 있는 내용이 아니라면 홍보성 기사로 간주한다.

3) 기업이나 기관이 내놓은 보도자료를 찾아보거나 2-3개의 언론사의 보도를 비교해 보면 홍보성 기사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보도자료에 의존한 기사인 경우 작성자는 달라도 기사의 내용과 형식이 거의 일치한다.

4) 동일한 주제에 관해 전문 저널 검색을 한다. 그 검색 결과와 해당 신문 기사를 비교해 보면 홍보성이 드러난다.

필자가 가르치는 수업의 보고서나 발제에는 언론 보도의 인용을 전혀 허용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언론보도의 인용을 눈감아 주고 있다. 조사 자료로 사용하려면 학생들이 최소한 홍보성 기사는 걸러내야 할 것이다.

기관이나 기업의 홍보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홍보를 위해서 진실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아주 많기 때문에 세심한 filtering이 요구된다. 조사의 실마리를 얻는 정도에서는 홍보성 기사를 써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그것은 조사의 출발점이어야 하지 조사의 종착점이어서는 결코 안된다.

언론에서 흔히 사용되는 전문가 인터뷰는 매체에서는 기사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방법으로 인정받지만, 학문의 세계에서는 과학적으로 수집된 자료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은 전문가의 발언은 검증되지 않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 보고서 작성이나 발제에 있어 신문 사설이나 전문가의 컬럼 혹은 인터뷰의 인용을 삼가하자. 그것들은 대체로 주장만을 담고 있지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개의 경우 증거라고 해봐야 자의적으로 선정된 사례 몇 개일 뿐이다. 가설(자신의 주장)을 가설(전문가의 주장)로 입증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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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학생들은 보고서나 발제에 저널 논문을 인용하고 있다. 아주 고무적이고 칭찬할만한 행동이다. 사실 대학도서관의 온라인 저널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 것은 인터넷에서 언론보도를 filtering할 때의 수고를 없애준다. 그런데 저널 논문이라고 할 지라도 인용하기 위해서는 언론 기사 못지 않게 꼼꼼하고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학생들의 인용 내용을 보면 인용한 논문을 진짜 읽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논문의 내용을 잘못 인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고 심지어 원저자의 주장에 반하는 방향으로 인용하는 경우도 있다.

저널 논문에 포함된 자료(data)에는 가공 자료, 분석  결과, 그리고 인용 자료가 있다. 원시 자료(raw data)가 논문에 제시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논문의 표나 그림은 가공 자료인데, 그것을 인용할 때는 원 연구의 맥락을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논문에 인용된 자료를 재인용할 때는 더욱 주의해야 한다. 재인용은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꼭 재인용해야 한다면 반드시 원 자료를 찾아서 확인하고 해야 한다.

학생들이 늘 시간에 쫓긴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대충 얼기설기 메꾸는 식의 보고서 작성이나 발제가 결코 용인될 수 없다. 그것은 대학에 와서 자신을 성장시킬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이다. 교육에 있어 컨텐츠의 전달보다 중요한 측면은 학생의 정신적 성장이다. 대학을 다니거나 졸업했는데 자신의 주장 하나 변변하게 못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전공을 불문하고 말이다.

대학에서든 일상에서든 좋은 주장은 발상이 신선하고 관점이 좋아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은 논리적이고 실증적이어야 한다. 즉, 주장이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아야 하고, 객관적인 자료(data)에 의해 잘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바쁜데 꼭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조사를 해야하나 라는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 덕분에 사회조사가 얼마나 편해졌는지를 생각하기 바란다. 만약 인터넷이 없었다면, 엄청난 발품을 팔아야 자료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도서관을 전전하고, 기관, 단체, 기업, 심지어는 개인을 찾아가서 사정해야 했을 것이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간단한 자료를 얻기 위해서 다른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외국에 출장을 가야하는 경우도 흔했다.

지금은 기껏해야 클릭 몇 번이면 원하는 자료를 손에 넣지 않는가. 그러니 불평말고 filtering을 꼼꼼하게 하자. 그것은 인터넷으로 사회조사를 할 때 우리가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자료수집 비용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료’를 구할 수 없다. ‘쓰레기’만 손에 넣을 뿐이다.

‘기억’으로 충분한가?…

“나라 잃은 국치일, 기억하겠습니다.” “3.1 운동, 기억하겠습니다.” “일제의 만행, 잊지 않겠습니다.” “4.3 비극, 기억하겠습니다.” “순국선혈의 희생, 기억하겠습니다.” “4.19 정신, 기억하겠습니다.” “5월 광주, 기억하겠습니다.” “6월 민주화 운동, 기억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잊지 않겠습니다.”….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데 내가 잊어버린 역사적 사건이 또 없을까?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 많은 나라이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과거를 잊어버리는 국민에게 비극은 되풀이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기억의 다짐은 뭔가 아쉽고 허전하다. 기억해서 어쩌자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잊지 말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내게는 그 다짐이 그렇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안된다”, “나는 광주에 개입한 적이 없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온 독일 동포를 추방하다….이 한심한 에피소드들은 모두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오지 못한 결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제창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대한 사회적 쟁점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문제는 그 때 광주 시민들이 지키려했고 보여주었던 정신이 아직까지도 나라의 중심이 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5월 광주’로 집약되던 민주,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헌신, 협동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광주에서도 그런 정신을 찾기가 어렵다. 대신에 그 자리를 집단 이기주의, 개인주의, 황금만능, 쾌락과 허영, 출세주의, 불평등, 사회적 배제, 관료주의, 권위주의, 불신이 채우고 있다. ‘5월 광주’는 표를 얻기 위해 ‘광주’를 추켜세우는 정치인들의 헌사 속에나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중립적 역사란 잘 해야 허상이고 대부분 기만이다. 역사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편집과 해석이다. 민족 공통의 기억은 소중히 지켜져야 하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서 기술되어야 한다.

‘5월 광주’에 대한 해석과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 갚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가? 진정 어떤 세상을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가? 그런 세상을 가져오기 위해 나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과 행동 속에 ‘5월 광주’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기억이다.

‘5월 광주’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들지 않고 단순한 기억 속에 묶어두려 하는 한 그것은 빠른 속도로 잊혀질 것이다.  이 땅에 5월 정신은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고 있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로서 나는 그것이 두렵고 안타깝다. (2016/5/18. 윤영민)

인간이 사회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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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니아꽃

사피니아를 심었다. 새로운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폴리스(polis, 도시국가)에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폴리스를 통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사회적(혹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에 꽃을 심는 나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더 크게 공감한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내게 왜 푸른산에 사느냐 물으니)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미소로 답하고 한가로움을 즐기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이 강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과는 다른 천지 아닌가)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자연과 일체가 된 이백은 인간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찌질한 사람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백의 심정이 이해 된다.

인간이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기보다 관계적 존재이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끝없이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대체로 그 대상이 사람이지만 사실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꽃일수도 나무일 수도 있고, 고양이나 개일수도 있으며, 책이나 펜일수도 있고, 스마트폰이나 PC일수도 있다. 앞으로는 그것이 로봇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관계이든 상호 요구가 존재한다. 그 요구는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단순한 기대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요구에 응답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상호 요구와 응답은 부담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는 웃사람의 요구와 아랫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배우자, 자식, 부모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우리와의 관계 속에 들어온 비인간적(non-human) 존재도 요구(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곤 하지만 사실 비인간적 존재의 요구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특정 존재가 지닌 관계의 비중이 커질수록 요구도 그만큼 증가한다.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베란다나 정원에서 가꾸는 화초, 나무, 채소, 심지어 돌까지도 각각 나름의 요구가 있다. 집안 곳곳에 비치한 장식품은 아니 그런가. 수시로 먼지를 털어내고 잘 닦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인간을 넘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사물까지 분석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actor-network)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무척 설득력 있게 보인다. 그 이론이 비인간 행위자 중 테크놀로지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백처럼 깊은 산속에서 산다고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관계가 더욱 뚜렷해진다. 꽃, 나무, 돌, 풀, 이끼, 벌레, 해, 달, 별, 비, 심지어 바람과도 예사롭지 않는 관계 속에 들어간다.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진다고 삶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

죽음 이후에 맺게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하련다. 살면서 맺게 되는 관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충분히 괴롭고, 충분히 즐겁고, 충분히 부담스럽고,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는가.

정원에 피는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그것은 인연이다.

신의 언어, 선지자의 언어

수학

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왜 6일이나 걸렸을까? 전지전능한 신인데 한 순간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이렇게 생각했다. ‘6’이 완전한 숫자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주의 완전함을 계시하기 위해 일부러 6일이나 시간을 끌었다”(사이먼 싱, 1998에서 재인용).

완전수(complete number)란 약수들의 합이 본래의 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수를 말한다. 6의 약수는 1, 2, 3이고 그 셋을 더하면 6이다. 6 다음의 완전수는 28이다.

완전수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피타고라스(Pitagoras de Samos)였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통해서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세상이 수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유명한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가 찾아낸 법칙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2천년 후 갈릴레오(Galilo Galilei)는 같은 의미에서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언어가 수학이다”라고 주장했다.

수학자나 과학자가 아니고는 그러한 주장에 공감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그러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많다.

나는 그러한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수학적 해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 좀 걸릴 뿐이다.

수학자들만 신의 의도를 읽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prophets)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수학자들과 달랐다. 수학자들이 신의 기획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선지자들은 신의 뜻을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선지자들이 선택한 표현 형식은 메타포(metaphor, 은유 혹은 비유)였다. 예수, 공자, 석가모니와 같은 인류의 스승들은 예외 없이 메타포를 즐겨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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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는 수학에 못지 않게 강력한 표현 도구이다. 그것은 청중의 수준에 맞추어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게 해주고, 선지자가 권력의 탄압을 피해갈 수 있게도 해준다. 게다가 두고두고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메타포의 구조는 단순하다. 한편에는 중대하거나 난해한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한편에 일상적인 개념이 있다. 추상적인 메시지를 직관적 언어로 풀어주는 방법이다. “인생은 여행이다”, “TV는 바보상자”, “삶은 한편의 연극”,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

때로는 한 문장이나 한 문단이 아니라 책, 그림, 조각, 건물, 영화 등이 통째로 메타포일 수도 있다. 예컨대 성경 중 가장 난해하다는 요한 계시록이 그러하다.

나는 뛰어난 S.F. 소설이나 영화도 하나의 메타포로 간주한다. 조지 오웰의 <1984>,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이번 주 학교 수업에서 다루었으며, 오늘 고전 문학 동아리에서 토론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도 그렇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거기에는 오늘의 관점에서 재발견해야 하는 역사서의, 그리고 역사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S.F.도 그러하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에 관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탁월한 S.F.는 현대 사회에 대한 철학이며 윤리학이고 사회학이다. 거기에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 인간과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규범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녹아있다. 청중은 거기에서 오늘날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찾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

수학으로부터, 그리고 뛰어난 메타포와 S.F.로부터 우리가 더욱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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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화에 대한 저항

1848년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썼다.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이 지배적인 곳에서는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목가적(牧歌的)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인간과 인간 사이에 노골적인 이해관계, 냉혹한  ‘현금 계산’ 외에는 아무런 관계도 남겨놓지 않았다(The bourgeoisie, wherever it has got the upper hand, has put an end to all feudal, patriarchal, idyllic relations. It…has left remaining no other nexus between man and man than naked self interest, than callous ‘cash payment’).

모든 인간관계가 상품(commodity)으로 전락한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160여 년이 흐른 지금에도 가족, 친구, 이웃 사이에 아직 상품화되지 않은 관계들이 존재하는 걸 보면 그들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법칙(law)까지는 아니더라도 경향(trend)으로서의 상품화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도시에서야 오래 전부터 문밖에만 나서면 모든 게 돈이었지만, 이제는 농촌에서마저도 돈내지 않고 편안하게 들를 수 있는 곳이 점점 드물어 간다. 구경할만한 곳은 울타리를 막고 입장료를 받으며,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무데나 가서 자리를 깔고 쉬거나 식사를 할 수도 없고, 깨끗하고 시원한 물 한 잔 얻어 마시기도 쉽지 않다.

내가 사는 필암마을도 꼭 그렇게 되어야 할까? 옛날의 시골 인심이 살아있게 할 수는 없을까?

서원과 마을을 찾는 사람들이 깨끗한 공기, 아름다운 경치, 편안한 공간, 시원한 식수, 그리고 맛있는 막걸리와 김치 정도는 즐기고 돌아가게 할 수는 없을까? 무료로 말이다.

올해는 이 전통을 만들어봐야겠다. 상품화에 대한 소소한 저항이다. (2016/04/24, 윤영민)

사회과학 에세이를 잘 작성하려면

학생들의 중간시험을 채점하고 났더니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을 충분히 주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관식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논술 형식을 갖추어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오직 서너명의 학생들만이 형식적 요건을 충족한 답안을 제출했다.

학생들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객관식 문제들에 대해 잘 대답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학생들이 대체로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왜 주관식 문제를 답하는데 압도적 다수가 실패했을까? 고등학교 때 논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 그런 문제를 풀 때 고등학교에서 배운 논술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회과학에 필요한 논리 전개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것일까?

대학원생 때 학부 교양 과목 조교를 하면서 겪은 어이없는 경험이 생각난다. 그 때도 중간 시험이었다. 시험 감독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답을 나열식으로 작성하면 안되나요? 저는 2시간 동안에 에세이를 작성할 수 없는데요.”

담당 교수가 분명히 에세이로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그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미국에 유학 온 지 최소한 2년이 넘은, 그것도 미국에서 입학이 가장 까다로운 학교 중의 하나에 재학 중인 학생이 영어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 학생 뿐이 아니다. 나는 대학생들의 논리 전개 능력 부족을 수업 시간의 대화에서도, 집 아이들의 글이나 말에서도 무척 자주 경험한다. 그래서 대학생들을 위해 에세이 작성 방법을 간략히 소개하기로 했다. 그것은 말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회과학 에세이의 기본 형식

위 그림에 사회과학 에세이의 기본 형식을 간명하게 제시했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모든 주장에 서론-본론-결론의 3단 형식을 갖추라. 에세이 전체로는 당연히 3단 형식을 갖추어야 하지만, 서론, 본론, 결론 각 부분 자체에도 3단 형식을 갖추고, 심지어 모든 단락(paragraph)도 가급적 3단 형식을 갖추도록 한다.

둘째, 사회과학 에세이는 실증적이어야 한다. 본론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 증거가 꼭 자신이 수집한 것일 필요는 없으며, 꼭 학문적 연구 결과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반드시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각 부분을 살펴 보자면, 우선 서론에서는 에세이에서 공략할 주제를 제시하고, 그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쟁점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여러 가지 관점, 연구결과, 혹은 이론을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하여 서술하면 좋다.  다음에 자신이 에세이에서 초점을 맞출 연구 문제(research question)를 질문의 형태로 서술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주장(가설)을 제시한다. 그 주장(가설)은 에세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

본론에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가설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경험적 증거를 구할 것인지에 대해 언급한다. 엄격한 과학적 에세이가 아니라면, 꼭 자신이나 타인의 과학적 연구 결과가 아니라도 괜찮다. 신뢰할만한 언론의 보도, 상업적 조사기관의 연구 결과, 혹은 전문가의 견해가 인용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주어진 여건 아래에서 최상의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자신의 주장이나 가설이 너무 추상적일 경우 그 주장(가설)을 보다 덜 추상적인 주장(가설)으로 쪼개고, 각각의 주장(가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본론의 뒷 부분에서 결과를 종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에세이에서 자신이 수행한 검증이 다른 사람들의 발견과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에 대해 논의한다.

결론에서는 주제와 연구문제에 대한 자신의 발견(주장과 검증 결과)을 간략히 서술하고하고, 그것이 지닌 주제에 대한 함축성, 나아가 사회적(혹은 학술적) 함축성을 제시한다. 끝으로 자신의 에세이가 지닌 한계에 대한 언급을 덧붙인다.

모든 사회과학 에세이가 이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에세이의 목적이나 상황, 그리고 작성자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변종이 가능하다. 논리 전개의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어떤 요소는 빠지기도 하고, 어떤 요소가 추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생 때는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히는 게 좋다. 글을 쓸 때든 말을 할 때든 사회과학도로서 주장을 할 때는 이러한 형식이 자연스럽게 갖춰지도록 해야한다. 응용은 그 다음이다.

두 사회학자의 언론 기고를 첨부한다. 질박한 문체의 글 하나와 화려한 문체의 글 하나이다. 위에서 제시한 형식을 가지고 두 글을 분석해 보기 바란다.

신광영 교수(중앙대 사회학과)의 한겨레신문 기고

송호근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의 중앙일보 기고

‘세월호’, 문명의 시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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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알렌 튜링은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기 위한 이미테이션 게임을 구상했다. 2016년 구글은 기계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게 사고할 수 있음을 검증하기 위해 바둑에 도전했다. 전자를 튜링 테스트 버전 1.0이라고 부른다면,  후자를 튜링 테스트 버전 2.0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튜링과 구글이 시도했던 것과 유사하게 나는 국가 관리자들이 문명인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공무원이 되고 정치인이 되도록 제도화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공감능력 테스트이다.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꼭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나는, 당신은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하나는, 당신은 세월호가 왜 2년 이상 인양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그 시험을 세월호 테스트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리고 세월호 테스트에서 얻은 고위공직자의 점수, 대통령과 국회의원 후보의 점수는, 마치 재산 공개하듯이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월호 참사는 국가 관리자들에 의해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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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 명이 넘는 사람이 근해에서 침몰하는 여객선에 갇혀 죽는 사회, 그것은 문명사회가 아니다. 또한 ‘실종’된 시신이 머무르고 있을 여색선을 2년 이상 바다 속에 방치하는 나라,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모든 사회에는 권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권력은 벌거벗은 폭력일 뿐이다. 그것이 사회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그것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앙리 레비의 표현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다.

우리를 야만으로 만드는 것은 예절의 부재도, 법률의 흠결도, 그리고 기술의 부족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국가, 그리고 오직 권력과 돈에 대한 욕심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공감문명(empathic civilization)이라고 부른다.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지구적 공감, 생태적 공감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840여 쪽에 달하는 <공감의 시대>에서 그에 대해 이론적, 경험적 증거를 깨알같이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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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21세기 공감 문명의 일부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세월호’가 시금석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문명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문명국가가 되려면 세월호를 한시 바삐 인양하고, 참사의 원인을 밝히며, 피해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공감이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 한다. 희생자들의 가족을 따뜻하게 품어 주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세월호’에 진 빚을 갚아야 우리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부디 이 땅에 인간 존중의 문화 그리고 공감의 정치가 꽃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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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그리고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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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빠가 생각할 때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능력은 공감(empathy)이다. 그것은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동정과는 다르다. 물론 동정도 칭찬받을만한 마음이고 태도이지만 공감이란 그 보다 훨씬 훌륭한 모습이다.

공감이란 얼마 전에 너도 읽었던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Harper Lee)가 썼다시피 “상대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다.” 그것은 단순히 남의 어려운 상태를 안타까워하고 도움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 서 보려는 노력이다.

내가 보기에 공감보다 어렵고 훌륭한 태도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저명한 미국의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Roger Ebert)는 “나는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 공감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아빠도 그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달리 반신반인이 아닌 것 같다. 두 분의 공감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 뻗쳤다. 온 세상에 있는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함께 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감이 기껏해야 자신의 가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불가능한 놀라운 공감 능력이지. 우리가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공감이 가족에게만 국한되도록 놔둘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세월호가 침몰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해 말 아빠는 누군가에게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을 일주일에 한번은 만나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실천을 못하고 있다. 그냥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작은 격려라도 되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세월호

언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데 말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말보다 행동이 필요하단다.

지금처럼 세월호 비극을 내팽개친다면 우리 나라를 문명 사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비극을 잊지 않아야 하지만, 그 아픔을 푸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럴려면 행동이 필요하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말이다. (2016/04/16)

(Bayes 학습)(11) 베이즈 추론의 역사

사십 대 여성이 정기 건강 검진의 일환으로 유방 엑스레이를 찍었다. 일주일 뒤 그녀는 유방암 검사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다는 통보를 받았다. 유방암에 관한 가족력도 없고 또 징후도 없는 그녀가 진짜로 유방암에 걸렸을 확률은 얼마일까?

나는 실제로 몇몇 의사, 간호사, 약사에게 물어 보았다. 80%, 60%, 30%, 10% 라고 대답했다. 모두 틀렸다. 그 확률은, 미국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3%에 불과하다!  그 확률은 아래의 베이즈 정리로 간단히 계산할 수 있다.

여기서 A는 유방 엑스레이 양성 반응이고, B는 유방암을 가지고 있음이다. 좌변의 P(B|A)는 유방 엑스레이 양성 반응이 나온 사람이 실제로 유방암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다. 우변의 P(B)는 유방암을 가지고 있을 확률, P(A|B)는 유방암 환자가 유방 엑스레이 양성 반응이 나올 확률, 그리고 P(A)는 유방 엑스레이 양성 반응이 나올 확률이다.

미국에서 사십 대 여성 1만명 가운데 대략 40명이 유방암을 가지고 있다(유방암 발병 확률은 40/10,000이다). 그리고 유방암 환자가 유방 엑스레이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올 확률은 80%이다. 그러면 그 40명 가운데 32명이 양성 판정을 받는다(그 확률은 32/40이다). 또한 유방 엑스레이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올 확률은 10%이다(그 확률은 1,000/10,000이다).

이 수치를 위 공식에 대입해서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3%이다. 간단하지만 매우 강력한 공식이다.

베이즈 정리라고 불리는 이 공식은 250여년 동안 역사적 퇴장과 등장을 반복하면서 살아남았다.  게다가 그 공식에 기반한 추론은 21세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불확실성을 다루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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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740년대 영국의 토머스 베이즈 목사가 별로 자신없이 세상에 내놓았던 수학적 정리가 오늘날 온갖 학문과 현업 분야에서 불확실성을 다루는 강력한 도구로 떠오르기까지의 부침을 기록한 역사이다.

거기에는 숱한 영웅과 천재가 등장한다.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 아서 베일리, 레너드 지미 새비지, 에드워드 몰리나, 앨버트 워츠 휘트니, 해럴드 제프리스, 데 피네티, 앨런 튜링, 잭 굿, 안드레이 콜모고로프, 존 튜키, 오스굿 쿠프먼, 제롬 콘필드, 앨버트 매단스키, 데니스 린들리, 로버트 오셔 슐라이퍼, 하워드 라이파, 프레더릭 모스텔러, 존 피냐 크레이븐, 에이드리언 래프터리, 저먼 형제, 에드리언 스미스, 앨런 겔팬드, 키스 헤이스팅스 등. 게다가 베이즈 추론을 없애버리려는 악당들(?)도 등장한다. 통계학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이름을 기억할 로널드 피셔, 예지 네이만 등이 베이지언들의 공적으로 등장한다. 이 책에서 독자는 그 인물들을 딱딱한 수학자나 과학자가 아니라 생생한 인간으로 만나게 된다. 이 책의 첫번 째 뛰어난 점이다.

베이즈 접근은, 추론 과정에 연구자의 주관적 판단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학계, 특히 통계학계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베이즈 정리를 언급하면 대학에서 자리를 얻을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실제 문제를 풀어야 하는 현업에서는 비교적 다양한 분야에서 수용되었다. 그러나 베이즈 접근이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정적분 계산이라는 산을 넘어야 했다. 베이즈 정리의 분모에 적분이 들어가는데, 변수가 많아지면 그 계산은 종이와 연필, 계산자, 혹은 계산기를 사용해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다행히 1980년대 이후 한편으로 몇 명의 탁월한 학자들에 의해 그에 대한 해법이 발견되고, 다른 한편으로 컴퓨팅 환경이 급격히 향상하면서 비로소 대중화의 길이 열렸다. 1989년 발표된 마르코프 연쇄 몬테카를로(Markov Chain Monte Carlo, MCMC) 방법이 어려운 적분을 대체하게 되었다. 베이즈 추론이 계산의 악몽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저자인 샤론 버치 맥그레인(Sharon Bertsch McGrayne)은 그러한 발전에 누가 어떻게 기여했는가를 어렵지 않게 기술하고 있다. 책에는 베이즈 추론을 위한 핵심적인 개념들과 절차들의 발견이 모두 망라되어 있다.

베이즈 추론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들이 상세하게 기술된 점도 이 책이 흥미 진진하게 읽히는 이유이다. 드레퓌스 사건, 이차대전시 독일군 암호의 해독, 보험업계의 발전, 폐암 원인의 규명, 냉전시 소련 핵잠수함의 추적, 연방주의자 논고의 분석 등 신기한 스토리가 끝이 없는 듯이 이어진다. 이 책의 두번 째 매력이다.

6백쪽이 넘는 책이라 하루이틀 사이에 읽기는 힘들지만, 책을 한번 손에 잡으면 쉽게 놓을 수 없도록 이야기들이 박진감 넘치게 전개된다. 베이즈 추론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베이즈 추론 자체에는 관심이 없더라도 학자의 삶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 학문과 현업, 학문과 전쟁, 학문과 행정, 그리고 순수 학문과 응용 학문의 관계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이 책으로부터 커다란 흥미와 교훈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 마디로 멋진 책이다. (2016/04/15/윤영민)

책에 관한 열 가지 지혜: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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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DOE Library 서가. 수백만 권의 책이 꽂힌 서가에 앉아 있다보면 무엇보다 겸손해진다.

아이들에게 책에 관한 지혜를 들려주고 싶다. 그 지혜를 실천에 옮기는가는 온전히 그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첫째, 세상의 진리는 오직 책에 담겨 있다. 인류 최고의 스승, 최고의 지혜는 오직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노자, 석가모니, 예수, 무함마드,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이순신, 아인쉬타인 등등. 책을 통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현자를 한 명이라도 말해 보거라. 현자의 지혜는 스스로 글을 써서 남겼거나, 누군가가 책에 남겨 놓았다. 그렇지 않은 지혜는 모두 잊혀졌다.

책에 대해서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 그는 둘 중의 하나이다. 세상을 모르는 자거나 너를 속이려는 자이다. 진리를 영화나, 게임, 강연, 혹은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엉터리이거나 거짓말이다.

둘째, 책의 형식에 구애받지 말라. 그것이 양피지든, 대나무든, 종이든, e-book이든 무슨 상관이냐? 시대적 기술 여건에 맞는 형식이 있을 뿐이다. 형식은 책을 읽지 않을 핑계가 될 수 없다.

셋째, 어떤 저자도 완전히 믿지 말고 어떤 저자에게도 기죽지 말라. 저자들, 특히 뛰어난 천재들은 친절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재미삼아 독자를 희롱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 항상 숲 전체를 보면서 나무를 대하라. 그러면 길을 잃지(속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천재는 뽐내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재라고 반드시 전달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모르는 저자들도 수두룩하다.

비평가나 해설자에게 의지하려고 하지도 말라. 비평이나 해설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밥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직업적 활동일 뿐이다. 저자가 책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가를 판단하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너 자신임을 잊지 말라.

넷째, 환경을 고르지 말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말고 책을 읽어라. 책에 몰입하면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 수 없게 된다. 훈련하면 그것이 가능하다. 얘들아,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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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DOE library reference 열람실. 이런 환경에서 책 읽기를 기대하지 말라.

다섯째, 어떤 책이든 하루에 읽는 것을 목표로 하라. 대부분의 책은 하루에 읽을 수 없다. 그러나 하루에 다 읽기를 목표로 삼으라. 그러면 놀라운 집중력이 생길 것이다. 인류 최고의 현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그 정도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현실에도 그렇지 않겠는가? 아인쉬타인, 달라이 라마, 혹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실제로 만났다고 생각해 보거라.

책을 하루에 다 읽지 못하는 사람은 일주일을 줘도 다 읽지 못하고, 한 달, 아니 일년을 줘도 다 읽지 못한다. 잘못된 책 읽기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독서 방법이 올바르면 헐거운 책은 몇 시간에도 다 읽을 수 있다.

여섯째, 책 읽는 프로가 되어라. 손에 쥔 책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를 기획하라. 인류 최고의 스승을 만나는데 그 정도 준비없이 되겠는가? 시간 계획, 대화 기획(읽는 순서), 정리 계획이 기본이다.

일곱째, 맘에 드는 책만을 읽지 말라. 편식하면 육신처럼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린다. 맘에 들지 않은 책일수록 더 정성껏 읽어라.

 여덟째,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우리가 평생 읽어봐야 도서관의 한 귀퉁이에 꽂힌 책들도 다 읽지 못한다. 내가 다니던 대학원 도서관의 본관은 책장의 길이만 84km였다. 아마도 300만권의 책은 그곳에 있었으리라.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곳에는 32개의 도서관이 있고 책은 1천만권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미국 의회도서관과 하버드에는 그보다 더 많은 책이 있다. 책  몇 권 읽고 아는 척하지 말라.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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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Main Library인 DOE Library의 정면. 저 문을 들어갈 때마다 마치 교회 문을 들어가듯이 경건해졌다. 인류의 스승들이 모두 저기에 모여 있지 않는가.

아홉째, 독서는 네 인생에 있어 어떤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고는 어느 분야의 리더도 될 수 없다. 독서가 행복을 가져다 주지도 않고, 출세를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고는 행복하거나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는 없다.

때로 천한 영혼이 지배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운을 믿지 말라. 운이란 우연이다. 우연을 믿고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자는 없다.

열째,  밥은 굶어도 책 읽기를 건너 뛰지는 말라. 육신의 배고픔이야 밥 한 숟갈로 간단히 달래지지만 영혼의 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영혼은 오직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진리는 쉽게 섭취할 수 없다. 그런데 매일 진리를 먹지 않으면 영혼이 메마른다. 육신이 음식으로 영양분을 섭취하듯이 영혼은 책을 통해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결코 손에서 책을 놓지 마라. 그러면 아무리 세상이 어렵더라도 잘 헤쳐 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