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속에 국화를 심으며(雨中種菊)

하서 김인후(허경진 역)*

種木當種松(종목당종송, 나무를 심으려거든 당연히 소나무를 심어야 하고)

種花當種菊(종화당종국. 꽃을 심으려거든 당연히 국화를 심어야 하제)

松留四豈春(송유사기춘, 소나무는 사철 봄을 머물게 하고: 豈 어찌 기; 왜 기 자를 썼을까?)

菊禀中央色(국품중앙색. 국화는 중앙색(황색)을 보여주지 않는가: 禀 여쭐, (내려)줄, 받을 품; 황색은 제왕이나 성스러운 것을 상징한다)

幸我以病歸(행아이병귀, 다행히 나는 병들어 (고향에) 돌아오니: 허허 병들어 고향에 돌아온 게 다행이라니! 정치가 얼마나 어지러웠으면 그리 느꼈을까?)

田園頗自得(전원파자득, 들과 뜰이 참으로 흡족하다: 頗 자못, 매우 파; 得 얻을, 만족할 득; 자득 스스로 만족함)

寒移北嶺稚(한이북령치. 추울 때 북쪽 고개의 어린 소나무를 옮기고: 稚 어릴, 작은 벼 치, 어린 소나무라는 뜻으로 썼을까?)

雨分東籬綠(우분동리록, 빗속에 동쪽 울타리의 푸른 국화를 나누었다; 籬 울타리 리;綠 푸를 녹을 푸른 국화로 번역해야 하나?)

千年霜雪幹(천년상설간, 천년의 눈서리를 맞은 등걸에는:幹 줄기 간)

秋風襲晩馥(추풍습만복, 가을바람에 늦은 향기가 스며드는구나: 襲 엄습할 습, 馥 향기 복)

且釀中山醪(차양중산료, 이제 중산의 술(막걸리)을 빚어: 醪 막걸리 료, 중산이라는 사람이 빚은 천일주)

采采泛盈掬(채채범영국, 국화를 따다 술잔 가득 채우리: 采 딸 채, 泛 뜰 범, 盈 찰 영, 掬 움킬 국, 해석이 참 어려운 대목이다.)

하서가 귀향해서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누리는 모습이다.

*허 경진 교수의 번역을 거의 따랐음.

 

 

고전 읽기는….

SAMSUNG CSC
플라톤의 <국가>

옛날에 나온 책이라고 꼭 고전인 것도 아니고, 근래에 나온 책이라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고전이란 사람들에게 오래 오래 영향을 미치는 책으로 그것은 검증된 지혜를 담고 있다.

검증되었다고 해서 고전에 담긴 내용이 모두 진리라는 뜻은 아니다. 내용의 가치가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고전은, 때로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기도 하고, 때로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주기도 하며, 때로 외로운 영혼의 벗이 되어주기도 한다. 나 같이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읽는 사람이 어떤 심정과 기대로 만나는가에 따라 고전은 팔색조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고전을 들면 나는 비밀의 성으로 들어간다. 낡은 표지의 냄새를 맡고 누런 속지를 여는 순간 가슴이 떨리고 동공이 확대된다. 거침없는 탐험과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곳에는 공간적 제약도, 시간적 제약도 없다. 몇 백년 전 정도는 가까운 과거이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신화 속의 인물을 만나기도 하고 심지어 창조주를 만나기도 한다.

인생은 짧다. 일생 동안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랴. 고전을 ‘낡은 책’이 아니라 ‘지혜의 샘’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고전을 가까이하는 학생들을 보고 싶다. (윤영민, F/B, 2015/03/24)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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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의 시가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자연, 사람 그리고 시인 자신이 전혀 구분될 수 없도록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강천사에 효선이라는 지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쓴 시로 추정되는 剛泉寺 留別孝先(강천사 유별효선: 강천사에 효선을 남겨두고 오다)에는 하서의 그러한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山中一雨過 樓前溪水碧(산중일우과 누전계수벽)

산중에 한차례 비가 내리니 누각앞 시냇물이 푸르러졌다

巖高日欲西 古樹長百尺(암고일욕서 고수장백척)

바위 위의 해는 서쪽으로 지려하고 고목의 키는 백자가 넘는다

僧徒送行客 兩兩座溪石(승도송행객 양양좌계석)

스님들은 방문객을 배웅하려고 짝지어 물가에 앉아 있다

握手謝留伴 杯深傾不惜(악수사유반 배심경불석)

손잡고 벗과 작별하면서 잔을 가득 채워 아낌없이 마시네(술마시는 것을 不惜身命, 몸이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도를 닦는데다 비유한 것인가?)

寒風何處來 颯颯掠雙頰(한풍하처래  삽삽략쌍협)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이 홀연히 두 빰을 훔치는구나(멋진 표현이다! 삽삽은 바람불어오는 소리를 느끼게 하는 의성어 아닌가?)

落葉沒前徑 蒼蒼間松竹  (낙엽몰전경 창창간송죽)

낙엽은 오솔길을 파묻고 군데군데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다(지름길 경, 창창은 푸른 모습을 느끼게 하는 의태어?)

一醉歸去來 幽禽響空谷(일취귀거래 유금향공곡)

한껏 취해 돌아가려니 새소리가 빈골짜기를 울리네(‘귀거래’라는 표현을 빌려와서 세상을 등진 도연명과 같은 심정을 슬쩍 내보인 것은 아닐까? 그윽할 유 자를 쓴 이유가 무얼까?)

석양에 친구 스님과 헤어지는 순간이다. 늦가을 강천계곡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다. 그러한 계곡의 모습이, 헤어짐의 아쉬움, 그리고 한 잔 술과 어우러진다.

자연주의자, 또한 낭만주의자로서의 하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제일의 학자 중 한 명이었던 하서의 학문법

하서가 지은 五言古詩(오언고시) 중 ‘讀白鹿洞規(백록동 학규를 읽고)’를 보면, 그의 학문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學問且思辨(학문차사변) 篤行在先知(독행재선지)

身修而可推(신수이가추) 應接皆得宜(응접개득의)

此乃爲學要(차내위학요) 儒者當孜孜(유자당자자)

  1. 배우고 묻고 그리고 생각하고 따지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다음 성실하고 친절하게 행동한다.
  2. 그러면 심신을 수양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데 있어 적절함을 얻게 된다.
  3. 학문의 요체가 거기에 있으니, 선비는 마땅히 이를 실천하는데 힘써야 한다.

이 시에서 하서는, 성인이 되는 길은 그 뿐인데, 정작 세상의 선비들은 그 일은 열심히 하지 않고 글만 멋지게 지으려하고 명예와 이익을 쫒는데만 열심이라고 한탄한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며, 따진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념들의 체계인 지식은 강의나 책은 물론이고 인터넷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객체화된 지식일 뿐이다. 그 지식을 얻으려면, 즉,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누구나 반드시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식의 담지자(혹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담지자에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체화되어야 한다. 파편화되거나 박제화되어 사용될 수 없는 지식, 혹은 실천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반드시 “생각하기(thinking)”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무리 강의를 많이 듣고,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그리고 인터넷에서 아무리 자료를 살피고 다녀도, 생각하기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생각하기는 때로 즐겁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수고스럽다.

생각하기란 대단히 적극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통상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이론적으로 도전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고, 동료 학생들과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생각하기의 제1단계이다. 이 단계의 핵심을 한 마디로 하면 ‘대화’이다. 대화는 가장 오랫동안 검증된 지식 획득의 방법이다.

생각하기의 다음 단계는 제1단계에서 얻은 지식을 스스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다. 손으로(혹은 키보드/마우스로) 쓰고 그려야 한다. 파편화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제1단계에서 얻은 지식을 반드시 스스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자기만의 관점이나 독창적인 발상이 들어가면 지식의 변종이 탄생하거나 새로운 이론이 창조된다.

생각하기의 제3단계는 지식을 사용하거나 실천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일지라도 사용되거나 실천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리고 지식을 사용하고 실천하면서 그것을 성찰하면 우리의 지식은 비로소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된다. 그 상태를 지식의 체화라고 부른다.

배운 내용을 묻고, 생각하고, 따지지 않으면 어떤 지식도 자기 자신의 지식이 되지 않는다. 이는 5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리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학자들이 참다운 지식을 획득하고 실천하는데 노력하지 않고, 겉멋을 내고 권력과 명예만 탐한다는 하서의 지적은 오늘날 더욱 타당하지 않나 싶다. (2016/01/07)

SNS가 우리를 모두 리어왕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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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고령의 리어 왕은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물려주고 퇴위하려고 한다. 그는 막내딸인 코딜리아(Cordelia)를 가장 사랑했고 그녀에게 왕국의 가장 큰 부분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게임을 벌였다. 자신에게 가장 감동적으로 사랑을 고백한 딸에게 왕국의 가장 큰 부분을 물려주겠다고 공언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코딜리아가 가장 큰 몫을 받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큰 딸인 고너릴(Goneril)과 둘쨋 딸 리간(Regan)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왕에게 흡족한 대답을 주었다. 그러나 코딜리아는 언니들의 속셈을 알고 있었고 왕이 실망하리라 생각했지만 정직하게 대답한다. 그녀는 자식된 도리로써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나 아버지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왕은 진노하고 게임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왕은 첫째와 둘째에게 막내딸의 몫까지 덤으로 나누어 주어버렸다. 충성스런 신하인 켄트 백작은 왕의 경솔한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왕의 분노를 사서 추방 명령을 받고 만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은 배신, 음모, 광기, 살인, 전쟁, 죽음 등 온갖 비극으로 치닺게 된다.

말! 말! 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이 말과 의미의 과잉생산을 요구하고 있으며, 정보의 바다에 진실과 의미가 익사하고 있다고 갈파한다. 내가 보기에 정보과잉에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는 카스 선스타인이 말하는 ‘반향실(echo chamber)’ 혹은 ‘정보 고치(information cocoon)’ 현상이다. 즉,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의 선별이 그 어느 때보다 손쉬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어울린다. ‘공감’의 이름으로 서로 맞장구를 치고 아첨한다. 긍정적 피드백을 한없이 주고 받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긍정적 피드백의 무한반복에 오랫동안 길들여지면, 이견이나 반대의 목소리를 참지 못한다. 그 때문에 평생동안 절대권력을 지녔던 리어 왕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의 진솔한 정직, 가장 충성스런 신하의 용기있는 반대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리어 왕>의 비극은 사랑이나 배신이 아니라 절대권력에서 잉태한다. 절대권력자가 아니고는 말만 가지고 자신의 왕국을 나누어주는 ‘게임’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딸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보통 아빠라면 누구도 한판의 말장난에 운명을 걸지 않을 것이다. 한 순간의 말보다는 평소에 나타났던 애정과 존경을 훨씬 높이 평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자기맘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권력자만이 그런 짓을 할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이견이나 반대 목소리를 충분히 경험했던 왕이라면 충직한 신하를 한번의 반대 때문에 추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어 왕>은 말에 의해 빚어질 수 있는 비극의 극한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절대권력의 구조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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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절대권력이 존재하던 궁정에서나 있었던 무한한 긍정적 피드백, 즉, 아첨이 소셜미디어에서 일상화된다. 소셜미디어라는 선물경제에서 아첨은 선물이 되어 한없이 순환한다. 나는 너를 추켜세우고 너는 나를 추켜세우는 대화가 무한히 반복된다. 인터넷에 절대권력은 없지만 아첨의 비극은 진행형이다. ‘반향실’ 덕분이다.

민주주의는 사로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성립한다. 다른 생각과 주장을 인정하고 포용할 때 건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만약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반향실로 세상을 가득 채운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경향을 보면 이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리어 왕>의 비극이 주는 경고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윤영민)

공유지의 비극, 피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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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개입 없이 공유지(commons)는 비극적인 파탄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은 오랫동안 사회과학자들의 상상을 비관적 전망에 결박하였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공유지에 대한 비극적 전망론에 불만이 많았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그중 가장 성공적으로 ‘공유지의 비극’론에 도전하였다. 정치학자인 그녀에게 노벨 경제학상이 수여된 것은 아마도 그러한 학문적 성취가 지닌 커다란 가치를 확인하는 절차였을 것이다.

공유지는 협동보다는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유혹이 강한 상황이다. 공유지를 제공하는데 수고하지 않은 사람도 공유지의 혜택으로부터 배제하기 어렵고, 개인이 배신이나 비협력으로부터 얻는 이익은 큰 반면 거기서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가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오스트롬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래 문장으로 요약된다. 인간은 상호협력을 통해서 공유지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아래 두 문장으로도 요약된다. 인간은 상호협력을 통해서 공유지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상호협력은 공유지(공유 자원) 사용자들이 주체가 된 제도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좀 더 길게 한 문단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공유지의 비극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다. 사용자들이 상호협력이 가능한 사회적 자본을 갖추고, 사용자들이 나서서 몇 가지 수준의 제도를 구축하며, 나아가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감시장치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면. (여기서 제도란 사용자에 대한 금지, 요구, 또는 허용이 명시된 규칙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려면 공유지가 장기적으로 존속 가능해야 하고, 공유지에 대한 접근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어야 하며,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국가가 제도의 운영을 뒷받침해 줄 수 있고 시장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결국 공유지 문제는, 공유지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용자 자신들이 나서서 그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고, 해법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며, 철저한 감시 장치를 통해서 사용자 누구도 ‘순진한 바보’로 전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정부는 공유지가 고갈되지 않도록 자원을 투입하고 사용자들의 합의를 법적으로 뒷받침해주며, 정보의 획득과 공유에 필요한 비용이나 감시에 수반되는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사용자들의 해결을 지원해 줄 수 있다. 사용자들은 필요한 경우 공유지 사용권을 시장을 통해서 양도할 수도 있다.

오스트롬은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15개 이상의 사례에서 공유지 운영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고, 분석틀을 도출해서 제시한다. 그녀의 분석틀은 경제학 모형, 혹은 게임이론이나 합리적 선택 모형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그것은 고도로 추상적인 모형의 전제를 완화시키고 현실에의 적합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타협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멋진 타협이 되었다.

그녀의 이론은 간명함의 아름다움을 잃은 대신 현실문제의 해결가능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개념은 미래에 대한 활인율(discount rate)이다. 공유지 존속의 불확실성이 높거나, 대체 공유지의 이용가능성이 높거나, 사용자들 사이의 신뢰가 부재하거나, 사용자들의 정주성이 낮으면 현재 편익의 가치(인지된 가치)가 미래 편익의 가치에 비해 커지게 된다. 즉, 미래에 대한 활인율이 높아진다. 미래에 대한 활인율이 높아질수록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합의와 집합행동이 어렵게 된다. 기회주의적 선택이 가져오는 편익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살았던 두 개의 농촌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공동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였던 엄청난 차이가 떠올랐다. 마음이 떠나버린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의 장기적 복지를 위한 어떤 해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오직 어떻게 하면 보다 비싼 값에 땅을 팔고 마을을 떠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졌다. 반면에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들이 대다수인 마을에서는 장기적인 협력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미래에 대한 활인율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이 지닌 최대의 장점은 디테일에 있다. 로스엔젤러스 근처 해안지대에서 지하수 분지의 안정적 이용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풀었는가에 대한 상세한 분석, 스위스와 일본의 고산 지대 목초지와 산림의 공동 소유, 스페인의 발렌시아 지방과 필리핀의 일로카노스 지역의 관개제도가 어떻게 해묵은 지역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는가에 대한 분석을 따라 읽으면, 한편으로 인간이 공유지 문제를 고전적인 게임이론이나 집합행동이론이 예측케 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롭게 해결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공유지 문제 해결에 관한 실질적인 지혜도 덤으로 얻는다.

그러나 공유지 딜레마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각 공유지가 처한 환경은 고유한 특징과 성격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이론이나 분석틀은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는데 가이드가 되어줄 수는 있지만 각 공유지 문제에 대해 바로 답을 줄 수 없다. 오직 오랜 세월 동안의 도전과 시행착오를 통해서만이 안정된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공유지와 같이 기회주의의 유혹이 큰 상황에서 협력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 문제를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리라.

협력에 관한 최고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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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이 책이 112년 전(1902년)에 출간되었단 말인가? 내게는 마치 몇 년 전에 씌여진 책으로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참 놀라운 책이다. 아니 어쩌면 100여년 만에 이 책의 메시지를 다시 주목하게 되는, 세상 흐름의 반전이 더 놀라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나키즘을 생물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고, 단채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니고, 진화론이나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있어서 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책을 협력의 이론적 토대를 구하기 위해 읽었다.

내게 읽힌 이 책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협력–크로포트킨의 표현으로는 상호부조(mutual aid)–은 적자생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의 원리이다. 크로포트킨은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이나 사회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종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화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라는 다수 다윈주의자들의 진화론, 원시인간사회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스펜서와 홉스의 사회이론은 그의 사상이나 직관은 물론이고, 일상적 경험이나 학문적 연구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은 이 책에서 1) 찰스 다윈은 협력(상호부조)이 생존경쟁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법칙임을 강조했음을 지적하고, 2) 자연에서 상호투쟁보다 군집(association)과 상호부조(mutual aid)를 의미하는 사회성(sociability)이 진화의 핵심 요소임을 밝혔으며, 3) 특히 미개사회부터 현대사회까지 인간사회의 진화는 사회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였다.

비록 현대 진화생물학에서 보는 유전자 분석이나 진화심리학에서 보는 뇌파 분석과 같은 정교한 과학적 연구방법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선한 심성,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그의 뛰어난 직관과 통찰, 그리고 그의 탁월한 연구역량은 이 책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책은 개미, 꿀벌, 독수리, 할미새, 두루미, 앵무새 등에서 시작해서 다람쥐, 비버, 산토끼, 순록, 그리고 늑대, 사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곤충과 동물의 사례를 통해서 개체와 가족을 뛰어넘어 동종 심지어 이종간에 일어나는 상호부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특히 포유류들에게 군집과 상호부조는 철칙이라고 강조한다(68). 죽은 동료의 시체 위를 빙빙 돌며 울부짖다 죽어가는 앵무새의 동료애, 비가 오면 떨고 있는 동료들의 목을 자신들의 꼬리로 감싸주면서 서로 보호하는 티티원숭이, 그리고 원숭이들이 행하는 각가지 놀라운 협업은 협력이 자연적이며 위대한 행위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확인시켜준다.

크로포트킨은, 동물세계의 진화에서 상호부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사회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해 책의 3분의 2 이상을 할애한다. 그는 소위 “자연상태”, 즉, 인류의 원시적인 조직형태는 가족이 아니라 무리 혹은 군집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부시맨, 호텐토트족,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파푸아족, 에스키모, 알류트족 등 소위 미개사회에 존재하는 연대정신과 사회적 예의범절을 보여준다. 그는 단언한다.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원시인들의 특징은 아니다(120).”

그는 인류가 씨족사회를 벗어나게 되면서 ‘촌락 공동체’가 대표적인 생활형태가 되었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촌락 공동체는 공동의 혈통으로 간주되고 공동으로 일정한 영역을 소유하는 가족들끼리의 연합이다(160).” “촌락 공동체는 공동경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법적, 군사적, 교육적, 경제적 양식이 변경될 때마다 촌락, 부족 또는 동맹의 민회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163).”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촌락 공동체의 전통은 중앙집권적 국가나 지배계급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에는 공유지, 중세도시, 길드 그리고 현대에서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상조회, 자선단체 등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전통의 핵심은 바로 상호부조이다.

다음 두 가지 인용은 협력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이론적 입장을 잘 요약해준다. “인간 심리에는 동기가 있다.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호소를 듣고 이에 응답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영웅들은 행동한다. 모든 사람들은 영웅들이 할 일은 자신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라는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고 인류가 나타나기 전 수십만년 동안의 군거 생활 속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323).”

“요약하자면,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서 만들어낸 상호증오와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연대감이란 앞선 진화 과정 속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단계부터 진화를 거듭하며 얻어진 연대감이 마찬가지로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단 한 가지 요인 때문에 해체될 수는 없다. 최근에 작게는 가족이나 빈민가에 사는 이웃들 그리고 촌락이나 노동자 비밀 결사 형태로 숨어들었던 상호지지와 지원에 대한 욕구는 근대 사회에서도 다시금 거듭 주장되었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미래의 진보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338-339).”

크로포트킨이 이 책을 출간한 지 104년 후인 2006년 하버드대 진화생물학 교수인 마틴 노왁(Martin Nowak)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저명한 논문, “협력의 진화를 위한 다섯가지 법칙”에서 다음과 같이 크로포트킨의 명제를 반복했다. “따라서, 우리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외에 “자연적 협력”을 진화의 세번째 근본 원리로 추가할 수 있겠다(Thus, we might add “natural cooperation” as a third fundamental principle of evolution beside mutation and natural selection)(1563 쪽).” 노왁이 인간을 타산적이라고 가정하는 게임이론을 통해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2012년 출간한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에서 크로포트킨의 명제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 수준으로 밀어붙인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집단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의도를 읽고 협력하는 한편, 경쟁하는 집단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지닌 집단은 그것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보다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 사이의 경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 경쟁은 한 개인을 남보다 유리하게 만드는 형질의 자연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새 환경으로 진출하고 강력한 적수와 경쟁하는 종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집단 내의 단결과 협동이었다(2013 한글판, 273쪽).”

노왁도 윌슨도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이 그와는 다른 길을 따라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