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정치가

증언

지친 몸으로 밤늦게 집에 돌아오니 책상에 택배가 놓여 있었다. 포장을 뜯어보니 엊그제 주문한 <증언>이다. 직업 외교관이었던 김하중 전 통일부장관이 고 김대중 대통령의 외교에 관해 쓴 책이다.

보통 두터운 책이 아니었다. 쏟아지는 잠을 포기하고 책장을 열었다.

책에는 저자가 외교라는 창문을 통해서 지켜본 DJ가 담담하고 절제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매 꼭지마다 DJ에 대한 저자의 존경과 감사가 흘렀다.

대한민국의 소위 엘리트들에게 DJ에 대한 언급은 일종의 터부이다. 언급해 봐야 어떤 반응을 받게 될 지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저자가 고맙다. 자신이 받게될 낙인이나 불편함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실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DJ의 외교가 커다란 성공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는 그러한 성공의 이유로 네 가지 요인을 든다.

첫째, DJ의 삶에 대한 세계 지도자들의 존경이다. 그에 의하면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 일본의 총리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수많은 나라의 정상들이 역경을 이기며 꿋꿋하게 살아온 DJ에게 깊은 경의를 표했다. 심지어 중국의 장쩌민 주석과 주룽지 총리는 중국의 장관들이나 고위인사들이 있는 앞에서 DJ를 “형님”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둘째, 용서와 겸손이다. 세계 지도자들은 김 대통령의 정적에 대한 용서에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DJ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겸손했다고 전한다. DJ는 상대가 누구이든 겸손하고 진심으로 대했다고 한다.

셋째, 철저한 준비이다. 중요한 면담이나 회담을 앞두고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그 바탕 위에 이루어진 명쾌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상대방을 놀라고 감동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넷째, 풍부한 지식과 영어 소통 능력이다. DJ는 항상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한다. DJ가 감옥에서 얼마나 열심히 책을 읽었는지, 48세에 시작한 영어 공부를 두고두고 얼마나 부지런히 했는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 DJ만큼 곡해된 정치인이 또 있을까? 내가 아는 DJ는 통합의 정치인, 화해의 정치인, 공감의 정치인이다. 이 책은 그에 대한 증언이다.

DJ라면 세월호 비극을 어떻게 풀었을까? 4.16 1주기의 새벽에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허망한 상상을 해본다. 공감과 치유의 리더십이 아쉽다. (윤영민, FB 2015/04/16)

배신, 정말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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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에 있어 무임승차 못지 않게 자주 지적되는 문제는 배신이다. 배신은 무임승차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행위이며, 공공재의 생산뿐만이 아니라 모든 유형의 협력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 친구와 동료를 배신한다, 조직을 배신한다 등등.

비협조도 넓은 의미에서 배신과 묶어서 생각할 수 있다. 비협조는 협력을 거부하는 행위이고, 배신은 기대(신뢰)를 저버리는 행위를 가리키지만, 모든 협력에는 구성원들의 협조가 기대되기 때문에 비협조도 약한 의미에서 배신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배신이 비협조의 한 유형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배신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분석모형은 죄수의 딜레마(the prisoners’ dilemma)이다. 이 게임의 논리는 간단하다.

함께 사건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깡패 두 명이 잡혀서 조사를 받고 있다. 구치소에 갇힌 두 피의자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래 표에서 보듯이 만약 두 피의자 둘 다 범죄 사실을 자백하면 두 사람 모두 세 달씩 구치소에 살아야 한다. 반대로 두 피의자 모두 입을 다물면 한 달씩만 살고 나올 수 있다. 그리고 둘 중의 한 명만 자백할 경우 자백한 피의자(배신자)는 석방되고, 입을 다문 쪽(협력자)은 일년 형을 살아야 한다. 이 경우 두 사람은 어떤 선택을 할까?

게임이론에 의하면, 죄수 A는, 죄수 B의 예상되는 선택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선택을 생각한다. 만약 B가 털어놓을 것 같으면 자기도 털어놓는 것(배신)이 자신에게 유리하다. 반면에 B가 입을 다물 것 같은 경우에도 털어놓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하다. B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게임이론에 의하면 결국 A와 B는 모두 자백(배신)을 선택하고 세 달씩 복역하게 된다. 소위 내쉬 균형(Nash Equilibrium)에 도달한다.

두 죄수 모두 동료 죄수가 결코 불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자백하지 않으면(협력) 둘 다 한 달만 형을 살고 나올 수 있다. 그것이 객관적으로 두 사람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하지만 죄수들은 상대편의 의리(?)를 믿지 못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판단한 결과 세 달씩 형을 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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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리는 대부분 죄수처럼 배신적으로 행동할까? 요차이 밴클러(<펭귄과 리바이어던>, 72)에 따르면 그 동안 많은 실험 게임들의 결과는 이론이 예측하는 것보다 피험자들이 훨씬 더 자주 협력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협력의 조건을 바꾸면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 협력의 상황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기도 하고, 배신으로 얻는 기대 이익이 협력으로 얻는 기대 이익과의 차이가 크지 않으면 협력의 가능성이 높아지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첫째, 많은 사람들은 ‘죄수’가 아니다. 즉, 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의심하면서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사람들이 많다. 둘째, 사회적으로 정직과 신뢰의 문화를 만든다. 정직하고 희생적인 행동이 존경받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반면에 ‘배신’을 통해 얻는 사회적 기대수준을 낮게 만든다.

살다보면 누구도 배신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참여자들의 헌신적인 협력을 끝어내는 데는 신뢰가 필수적이다. 길게 보면, 배신하는 몇 명 때문에 참여자 모두를 의심하기 보다는, 참여자들에 대해 깊은 신뢰를 보내고 차라리 몇 명에게 배신을 당하는 편이 궁극적으로 협력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SNS가 우리를 모두 리어왕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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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고령의 리어 왕은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물려주고 퇴위하려고 한다. 그는 막내딸인 코딜리아(Cordelia)를 가장 사랑했고 그녀에게 왕국의 가장 큰 부분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게임을 벌였다. 자신에게 가장 감동적으로 사랑을 고백한 딸에게 왕국의 가장 큰 부분을 물려주겠다고 공언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코딜리아가 가장 큰 몫을 받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큰 딸인 고너릴(Goneril)과 둘쨋 딸 리간(Regan)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왕에게 흡족한 대답을 주었다. 그러나 코딜리아는 언니들의 속셈을 알고 있었고 왕이 실망하리라 생각했지만 정직하게 대답한다. 그녀는 자식된 도리로써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나 아버지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왕은 진노하고 게임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왕은 첫째와 둘째에게 막내딸의 몫까지 덤으로 나누어 주어버렸다. 충성스런 신하인 켄트 백작은 왕의 경솔한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왕의 분노를 사서 추방 명령을 받고 만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은 배신, 음모, 광기, 살인, 전쟁, 죽음 등 온갖 비극으로 치닺게 된다.

말! 말! 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이 말과 의미의 과잉생산을 요구하고 있으며, 정보의 바다에 진실과 의미가 익사하고 있다고 갈파한다. 내가 보기에 정보과잉에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는 카스 선스타인이 말하는 ‘반향실(echo chamber)’ 혹은 ‘정보 고치(information cocoon)’ 현상이다. 즉,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의 선별이 그 어느 때보다 손쉬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어울린다. ‘공감’의 이름으로 서로 맞장구를 치고 아첨한다. 긍정적 피드백을 한없이 주고 받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긍정적 피드백의 무한반복에 오랫동안 길들여지면, 이견이나 반대의 목소리를 참지 못한다. 그 때문에 평생동안 절대권력을 지녔던 리어 왕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의 진솔한 정직, 가장 충성스런 신하의 용기있는 반대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리어 왕>의 비극은 사랑이나 배신이 아니라 절대권력에서 잉태한다. 절대권력자가 아니고는 말만 가지고 자신의 왕국을 나누어주는 ‘게임’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딸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보통 아빠라면 누구도 한판의 말장난에 운명을 걸지 않을 것이다. 한 순간의 말보다는 평소에 나타났던 애정과 존경을 훨씬 높이 평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자기맘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권력자만이 그런 짓을 할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이견이나 반대 목소리를 충분히 경험했던 왕이라면 충직한 신하를 한번의 반대 때문에 추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어 왕>은 말에 의해 빚어질 수 있는 비극의 극한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절대권력의 구조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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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절대권력이 존재하던 궁정에서나 있었던 무한한 긍정적 피드백, 즉, 아첨이 소셜미디어에서 일상화된다. 소셜미디어라는 선물경제에서 아첨은 선물이 되어 한없이 순환한다. 나는 너를 추켜세우고 너는 나를 추켜세우는 대화가 무한히 반복된다. 인터넷에 절대권력은 없지만 아첨의 비극은 진행형이다. ‘반향실’ 덕분이다.

민주주의는 사로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성립한다. 다른 생각과 주장을 인정하고 포용할 때 건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만약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반향실로 세상을 가득 채운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경향을 보면 이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리어 왕>의 비극이 주는 경고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윤영민)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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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탐구에는 이미 그 당시에도 돈이 들었다. 당시의 위대한 예술 보호자들, 즉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 페르가몬의 아탈리아 사람들, 그 외 다른 통치자들이 학문 연구를 후원했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과 같은 대형 교육 및 연구 시설에서 여유있게 작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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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들은 학문을 장려할 때 응용 학문이 아닌 순수 학문에 관심을 쏟았다(<알렉산드리아>, 160-161).”

인류는 진보하는가? 역사를 읽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깨닫곤 한다. 기원전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보다 21세기 서울의 정치와 대학이 더 나은 것 같지 않다. (윤영민)

임서기(林棲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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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벌써 숲에 들어갔어야 했다. 조금 늦었지만 자유를 찾아 떠난다.

“명상과 고행”을 위해 숲 대신 마을을 선택했다. 자유는 숲이 아니라 이웃 속에 있다고 믿는다.

4백년 동안 서원과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한 마디면 족했다.

“21세기 서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현판식에 함께 한 이웃들의 함박 웃음에서 공감을 읽는다. (윤영민)

마지막 무대

오드리_햅번 노년은 이 위성에서의 마지막 무대이다. 그 고별 무대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오직 그 때까지 살아남은 자에게만 돌아온다. 그 점만 보아도 노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기회이다.

그 무대에서 어떤 공연을 펼칠 지는 개인에게 중대한 선택이다. 일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마도 평안과 휴식을 택할 것이고, 붙박이처럼 직장과 집을 왕복하며 살아온 사람은 버킷 리스트의 순서에 따라 실컷 여행을 떠나고 싶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에 봉사를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즐기며 살고 싶어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구라는 정박지에서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떠나고자 할 것이다. 그 실존적 선택에 대해 누구도 딴지를 걸 수는 없다. 어떤 노년이 아름다운가를 재는 보편적 잣대는 없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자신만의 스토리를 완성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타까운 노년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인생의 작가가 자신이 아니라 타자인 경우이다. 돈 때문에,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회적 명성 때문에, 남의 눈 때문에, 자식 때문에…. 진 무대 공연이란 어쩌면 시간의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나이에 관계없이 한 순간이라도 인생 스토리에 있어 자신이 작가이고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커다란 후회없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마지막 무대 공연을 스스로 결정할 수만 있어도 행복한 노년이다. 노인이 되기 훨씬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선택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선택을 대신해 주는 경우도 있다. 떠날 때가 가까워지면 누구나 진지해진다. 삶의 끝이라는 가상적 상황에서 살아온 길을 복기하는 일이 잦아지는 걸 보면 나도 마지막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오기는 온 모양이다.

늙어감에 대한 반역

나이를 먹어가면 점점 편한 게 좋아진다.  새롭게 뭔가를 배우고 생각을 바꾸고, 시도하는 것이 귀찮고 두렵다. 심신의 적응력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게 늙는 것이리라. 지금까지 당연시 해왔던 것들을 뒤집어보고 거부하면 삶의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도전은 우리를 일상의 감옥으로부터 꺼내준다. 물론 그것은 불안과 위험을 가져오지만 삶에 활력이 솟구치게 해준다. 오늘은 뭘 거부해볼까, 이번 주는 뭘 뒤질어볼까, 이번 방학에는 어디로 탈출해볼까, 이번 학기는 어떤 변화를 시도해볼까, 올해는 뭘 새로 배워볼까…이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교수는 서서 가르치는데 학생들은 왜 앉아서 수업을 듣는가, 왜 강의를 학생들 앞에서 해야 하는가 뒤에서 하면 안되나,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전산학을 가르치면 안되나, 정치인들에게 주는 보수를 모두 없애버리면 안될까, 왜 자꾸 새로운 기계에 적응하게 하나 기계가 내게 적응해야지, 왜 꼭 투표소에서 투표를 해야하나…지리산 속에 살면서 출퇴근하면 어떨까, TV 없는 세상이 낫지 않을까, 휴대폰이 점점 값비싼 올가미가 되는구나…없애 버릴까… 앞으로도 계속 생각을 변화시키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좀 고단하기는 하지만 삶이 재밌지 않는가. 오늘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겠다.

밥그릇

밥그릇이 문제다. 밥그릇이 비어도 문제고, 밥그릇이 넘쳐도 문제고, 밥그릇을 차버려도 문제고, 제 밥그릇에만 집착해도 문제고, 밥그릇에 쌀밥만 담아도 문제고, 밥그릇 싸움도 문제고, . . . 밥그릇이 행복이다. 밥그릇이 있어 행복하고, 밥그룻에 밥을 담을 수 있어 행복하고, 밥그릇에 쌀밥뿐 아니라 검은콩밥을 담으니 행복하고, 밥그릇을 삼분의 일만 채우니 행복하고, 밥그릇에 밥만이 아니라 사랑도 담으니 행복하고, 밥그릇을 나누니 행복하다. . . . 같은 밥그릇인데 누구에게는 불행의 씨앗이고, 누구에게는 행복의 원천이다. 나는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밥그릇을 비우고 정갈하게 닦았다. (윤영민).

공공재에 관한 무임 승차론, 적절한 문제 제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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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협력’하면 떠오르는 염려 중 하나는 ‘무임승차(free riding)’이다.  1965년 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이라는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저서가 남긴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러사람들의 협력을 통해서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전은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재는 그것을 창출하는데 동참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의 수혜를 배제할 수 없다. 올슨에 의하면, 그러한 공공재의 경우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손을 안대고 코를 푸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대가는 지불하지 않고 결과만 누리는 것이다.

특히 공공재의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커질수록 무임승차의 유혹은 커지고, 일단 무임승차자가 출현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협력할 의욕을 잃게 되어 결국 공공재의 공여는 실패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올슨은 ‘선택적 인센티브’로 무임승차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지만,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선택적 인센티브 제공이 불가능해지고 설령 공동의 목표가 있더라도 협력에 성공할 확률이 낮아진다고 역설한다.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하는 집단 행동(협력)의 가장 알려진 사례는 선거이다. 공직자 선거에서 유권자는 투표를 하기 위해 제법 많은 비용(시간, 수고 등)을 지불해야 한다. 선거 결과 상대적으로 훌륭한 공직자가 선출되면 좋지만 자신의 한 표가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꾀가 난다. 선거일에 투표를 하지않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투표율이 낮아지고 결국 그렇고 그런 후보들이 뽑히게 되며, 공직자들은 국민, 시민, 유권자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다수 유권자들의 무임승차 덕분에 장기적으로 선거 공학이 발달하고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올슨의 이론은 여러가지 바판을 받아왔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연 오늘날에도 반세기 전에 제기된 올슨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한가? 혹시 무임승차 이론은 잘못된 문제제기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임승차 이론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타산적인 유권자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국민으로서, 유권자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진지하게 투표에 임하는 다수 유권자의 협력적인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이지만 사람이 타산적(합리적)이라는 가정에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관련된 연구를 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이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항상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집합 행동에 있어 경제학 모형에서 가정하는 정도로 사람들이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이타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규범지향적인 사람도 있으며, 대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 투철한 시민적 책임감을 지닌 사람도 많다.

셋째, 예로 든 투표의 경우 무투표나 기권의 선택을 단순히 무임승차로 설명하는 것은 통계학에서 말하는 모형규정의 오류(model specification error)일 수 있다. 무투표의 설명 모형에 중요한 요인(들)이 빠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선거에 참여한 정당들이 성격, 노선, 정책 등에 있어 별로 차이가 없다든지, 후보자들이 그밥에 그나물이라든지, 누가 뽑히던 정부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든지 등과 같은 중요한 사회정치적요인들이 무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투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공공재 생산에서 자주 목격되는 참여 가치 현상이 무임승차론의 결과중심적 해석에 반한다. 예컨대 자발적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서비스가 제공될 경우 참여자들에게는 참여 자체에서 느끼는 보람이나 기쁨이 결과 향유에 못지 않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즉, 참여 자체가 훌륭한 동기가 될 수 있는데도 무임승차론은 참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념은 인간의 인식을 규정한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무임승차론은 지금까지 보다 훨씬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협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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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협력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을까? 아마도 일반적으로 “힘을 합쳐서 서로 도움”(네이버 국어 사전)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협력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일한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이 어려워질 뿐 아니라 협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 정의에서 가장 크게 벗어난 정의는 진화생물학에서 발견된다. 위 사진의 논문 2-3줄에 흥미있는 협력의 정의가 제시되어 있다. 이 논문은 마틴 노왁(Martin Nowak)의 “협력의 진화를 위한 다섯가지 규칙(Five Rules for the Evolution of Cooperation)”(Science 2006, Dec. 8; 전체 논문은 첨부 파일 참조)이다.  이 글에서 “협력은 이기적 복제자들이 서로 돕기 위해 자신들의 재생산 잠재력을 일부 포기함을 의미한다(Cooperation means that the selfish replicators forgo some of their reproductive potential to help one another).” 여기서 복제자(replicator)는 진화생물학에서 진화의 단위(evolution unit)를 가리킨다.

이 논문에서 노왁은 경쟁이 지배하는 자연도태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는 협력이 가능한가를 탐구한다. 저자는 혈연선택, 직접 호혜성, 간접 호혜성, 네트워크 호혜성, 집단선택 각 이론이 제시하는 협력 조건을 각각 한 줄의 부등식으로 표시한다. 예컨대 일개미가 자신 스스로의 번식을 포기하고 여왕 개미에게 번식을 전담하게 하는 것은 협력으로 간주된다. 윌리엄 해밀턴은 일개미의 그러한 협력 행동이 유전자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떠어떤 이유로 일개미는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는 50%의 유전자밖에 남겨주지 못하지만, 여왕 개미를 도와서 일개미를 낳게 하면 자기 유전자의 75%를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진화를 포기한다고 해석한다.

우리 인간도 개미처럼 유전자 주인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유전자 신화를 믿지 않는다면 진화생물학적 개념 정의는 수용하기 힘들다. 사회학적으로 협력이란 목표 혹은 목적 없이도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행동이다.

협력이 왜 일어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전부라면 협력을 어떻게 정의하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협력을 어떻게 촉진할 것인가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진화생물학–특히 게임이론적 접근–적 정의는 연구에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하는 수많은 협력은 목적 지향적이나 목표 지향적이 아니라 과정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왜 협력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협력에 이유가 더 필요한가? 협력 연구자의 과제는 협력을 “즐겁게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