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과 공학의 융합이 성공하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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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옴[Assembly of twenty gods, predominantly the Twelve Olympians, as they receive Psyche (Loggia di Psiche, 1518–19, by Raphael and his school, at the Villa Farnesina)]
요즈음 학술적이든 실무적이든 융합 연구가 대세이다. 융합! 멋진 말이다. 그러나 융합적 연구는 아차 하면 ‘신들의 대리 전쟁’이 되고 만다.

빅데이터를 연구하는 데이터과학(data science)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데이터과학 연구에는, 영역 전문가(domain expert), 연구자(researcher), 컴퓨터과학자(computer scientist), 그리고 시스템 운영자(system administrator)라는 네 가지 역할이 필요하다. 앞 두 가지 역할이 통상 사회과학이나 통계학 전공자가 수행한다면, 뒤 두 가지 역할은 대체로 컴퓨터과학 전공자가  수행한다. 즉, 사회과학과 컴퓨터과학의 융합이 이루어 진다.

사회과학과 컴퓨터과학(혹은 공학) 사이의 융합에서 가장 근본적인 어려움 혹은 혼란은 무엇일까? 그것은 융합 과정에서 서로 다른 학문 분과들에 고유한 가치와 질서가 심각하게 상호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사회과학은 광고, 저널리즘, 경영 같은 응용분야마저도 사회적 규칙성의 발견이 지상 목표이고, 가설-검증이 표준적인 접근방법이다. 반면에 컴퓨터과학(공학)에서는 과업수행(혹은 그것의 시간 단축)을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알고리즘(혹은 프로그램)의 개발이 표준적인 접근방법이다.

그래서 사회과학에서는 치밀하고 엄격한 과학적 방법으로 진리에 접근하였는가, 혹은 그런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자인가가 과제 심사의 평가 기준이 되고, 컴퓨터과학에서는 상대적으로 얼마나 우수한 알고리즘 혹은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는가 혹은 그럴만한 능력을 가졌는가가 과제 심사의 평가 기준이 된다.

두 학문 분야의 평가기준이 참으로 다르다. 그런데 이 차이는 현실에서 심각한 갈등을 낳곤 한다. 만약 평가 심사자가 사회과학자인 경우 과제를 지원하거나 수행한 컴퓨터과학자들은 무척 난감해질 것이고, 반대로 평가 심사자가 컴퓨터과학자인 경우 과제를 지원하거나 수행한 사회과학자들이 곤경에 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학문간의 협업을 통해서 사회연구를 수행하는 것은 아테나(Αθηνά)를 섬기는 사람들과 헤르메스(Ερμής)를 섬기는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내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제사장이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을 만나면 사람들은 심각한 어려움에 봉착할 것이다. 자신들의 숭배하는 가치와 질서를 부정당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백여 년전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어떤 대학에서 행한 강연에서 학문 사이의 그러한 갈등을 신들의 전쟁에 비유했다.

“어떻게 프랑스 문화의 가치를 독일문화의 가치와 비교해서 <학문적으로(과학적으로)> 그 우열을 결정할 수 있을 지 나는 모릅니다. 여기에서도 역시 서로 다른 신들이 싸우고 있으며, 그리고 이 싸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옛날의 많은 신들은, 이제 그 주술적 힘은 잃어버리고 그래서 비인격적인 힘의 형태로, 그들의 무덤에서 기어 나와서 우리 삶을 지배하고자 하며 또다시 서로간의 영원한 투쟁을 시작하고 있습니다(Weber, 1918/1997: 235-236쪽).”

어쩌면 베버(1997: 235)의 지적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지, 어느 하나의 학문에서는 무엇이 신적인 것으로, 또 다른 학문에서는 또 다른 무엇이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는지”를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일 뿐이리라.

융합은 서로 다른 신을 추종하는 전문가들 사이의 화합과 협력이다. 그런데 연구자들 상호간의 몰이해로 인해 융합은 쉽게 신들의 대리전으로 귀결되고 만다. 융합적 혁신과 지성은 무엇보다 신들의 화해와 공존을 실현해야 가능하다.

그 갈등을 예방하는 방법은 첫째, 상대 학문에 내재한 가치와 규범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둘째, 연구 과제의 성격에 따라 그에 타당한 평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눈에 갇힌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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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문화원에서 바라본 필암뜰

폭설로 인해 마을 전체가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다. 60평생에 이렇게 많은 눈이 내리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장성에 눈이 많이 내린다는 말을 이사온지 4년만에 실감하고 있다.

폭설 때문에 비날하우스들은 피해를 입지 않았는지, 강추위에 어르신들은 무사하신지 모르겠다. 아직 눈이 내리고 있고 오후 3시인데 영하 9도이다. 내일 오전까지는 계속 내릴 모양이다. 아무쪼록 마을 주민들 모두 피해를 입지 않고 이 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

눈속의 필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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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의 필암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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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의 필암마을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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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내리는 필암문화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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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속의 필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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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빨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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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의 삼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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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멈춘 필암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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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멈춘 핑암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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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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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필암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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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필암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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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의 필암 실개천

살기 좋은 마을이 되려면…

나이 든 사람들에게 마을이 살기 좋으려면, 아름다운 경관, 깨끗한 환경, 편리한 교통, 훌륭한 의료시설, 좋은 이웃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조건을 모두 갖춘 마을을 찾기는 무척 어렵다.

사실 그 중 아름다운 경관과 깨끗한 환경을 갖추었으면서 동시에 교통이 편리한 곳은 드물다. 교통이 좋으면 공업이나 상업 시설이 들어설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문명과 자연을 조화시키려면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노인들의 삶의 질을 위해서는 의료 시설이 대단히 중요하다. 대중 교통을 이용해서 좋은 병원이나 의원에 손쉽게 갈 수 있어야 한다. 응급 상황에서는 5-10분 이내에 앰블런스가 도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 조건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면 그것은 좋은 이웃이리라. 다정하고 친절한 이웃이 있으면 매일매일의 생활이 즐겁고 비상시에는 긴급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런데 좋은 이웃이며, 깨끗한 환경, 그리고 심지어 의료시설까지도 두 가지 숨은 조건에 의지한다. 하나는 훌륭한 리더이고, 다른 하나는 커뮤니티를 위한 자신의 애정과 노력이다. 그런데 훌륭한 리더는 마을에 대한 주민들의 애정과 노력을 끌어낼 수 있고, 환경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유지하며, 심지어 교통과 의료시설의 접근성을 높일 수도 있다.

결국 살기좋은 마을이 되려면 훌륭한 리더의 존재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리더는 변화를 일으킨다. 멋진 비전을 제시하고,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며, 사람의 행동을 변하게 하고, 나아가 이웃들 사이에는 화평을, 마을에는 번영을 가져온다.

빗속에 국화를 심으며(雨中種菊)

하서 김인후(허경진 역)*

種木當種松(종목당종송, 나무를 심으려거든 당연히 소나무를 심어야 하고)

種花當種菊(종화당종국. 꽃을 심으려거든 당연히 국화를 심어야 하제)

松留四豈春(송유사기춘, 소나무는 사철 봄을 머물게 하고: 豈 어찌 기; 왜 기 자를 썼을까?)

菊禀中央色(국품중앙색. 국화는 중앙색(황색)을 보여주지 않는가: 禀 여쭐, (내려)줄, 받을 품; 황색은 제왕이나 성스러운 것을 상징한다)

幸我以病歸(행아이병귀, 다행히 나는 병들어 (고향에) 돌아오니: 허허 병들어 고향에 돌아온 게 다행이라니! 정치가 얼마나 어지러웠으면 그리 느꼈을까?)

田園頗自得(전원파자득, 들과 뜰이 참으로 흡족하다: 頗 자못, 매우 파; 得 얻을, 만족할 득; 자득 스스로 만족함)

寒移北嶺稚(한이북령치. 추울 때 북쪽 고개의 어린 소나무를 옮기고: 稚 어릴, 작은 벼 치, 어린 소나무라는 뜻으로 썼을까?)

雨分東籬綠(우분동리록, 빗속에 동쪽 울타리의 푸른 국화를 나누었다; 籬 울타리 리;綠 푸를 녹을 푸른 국화로 번역해야 하나?)

千年霜雪幹(천년상설간, 천년의 눈서리를 맞은 등걸에는:幹 줄기 간)

秋風襲晩馥(추풍습만복, 가을바람에 늦은 향기가 스며드는구나: 襲 엄습할 습, 馥 향기 복)

且釀中山醪(차양중산료, 이제 중산의 술(막걸리)을 빚어: 醪 막걸리 료, 중산이라는 사람이 빚은 천일주)

采采泛盈掬(채채범영국, 국화를 따다 술잔 가득 채우리: 采 딸 채, 泛 뜰 범, 盈 찰 영, 掬 움킬 국, 해석이 참 어려운 대목이다.)

하서가 귀향해서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누리는 모습이다.

*허 경진 교수의 번역을 거의 따랐음.

 

 

고전 읽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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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옛날에 나온 책이라고 꼭 고전인 것도 아니고, 근래에 나온 책이라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고전이란 사람들에게 오래 오래 영향을 미치는 책으로 그것은 검증된 지혜를 담고 있다.

검증되었다고 해서 고전에 담긴 내용이 모두 진리라는 뜻은 아니다. 내용의 가치가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고전은, 때로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기도 하고, 때로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주기도 하며, 때로 외로운 영혼의 벗이 되어주기도 한다. 나 같이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읽는 사람이 어떤 심정과 기대로 만나는가에 따라 고전은 팔색조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고전을 들면 나는 비밀의 성으로 들어간다. 낡은 표지의 냄새를 맡고 누런 속지를 여는 순간 가슴이 떨리고 동공이 확대된다. 거침없는 탐험과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곳에는 공간적 제약도, 시간적 제약도 없다. 몇 백년 전 정도는 가까운 과거이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신화 속의 인물을 만나기도 하고 심지어 창조주를 만나기도 한다.

인생은 짧다. 일생 동안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랴. 고전을 ‘낡은 책’이 아니라 ‘지혜의 샘’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고전을 가까이하는 학생들을 보고 싶다. (윤영민, F/B, 2015/03/24)

전통 연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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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연과 가오리연

필암마을의 뒷산에는 전통 연에 쓰이는 시누대가 많이 자라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이 시누대를 베어 와서 정성을 들여 연 살을 깎았다. 연을 만드는데는 살을 깎고 다듬는 작업이 가장 어렵다.

연에는 가볍고 질긴 한지가 최고이다.  여러 가지 색상으로 생산되는 원주 한지를 구해서 연을 만들었다. 원주 한지는 중국 닥이 들어가지 않은 고급 한지이다. 그런 다음 튼튼한 실로 연에 목줄을 매달았다. 목줄에는 네 줄을 쓰기도 하지만 가운데 줄을 빼고 세 줄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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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하얀색 방패연 하나, 작은 분홍빛 방패연 하나, 그리고 작은 분홍빛 가오리연을 만들어 필암뜰에서 띄웠다. 모두 몇 차례 시도만에 하늘 높이 날았다. 아주 안정적으로 비행했다. 일차 성공이다. 다음에는 연에 무늬, 그림, 글씨를 넣기로 했다.

마을회관의 남자 어르신들의 방은 연 제작실로 탈바꿈했다. 연 제작은 상당 부분 어르신들의 기억에 의존해야 한다. 다행히 마을의 이재복 선생(한옥 목수)이 연 애호가라 비교적 쉽게 복원에 성공했다.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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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의 시가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자연, 사람 그리고 시인 자신이 전혀 구분될 수 없도록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강천사에 효선이라는 지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쓴 시로 추정되는 剛泉寺 留別孝先(강천사 유별효선: 강천사에 효선을 남겨두고 오다)에는 하서의 그러한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山中一雨過 樓前溪水碧(산중일우과 누전계수벽)

산중에 한차례 비가 내리니 누각앞 시냇물이 푸르러졌다

巖高日欲西 古樹長百尺(암고일욕서 고수장백척)

바위 위의 해는 서쪽으로 지려하고 고목의 키는 백자가 넘는다

僧徒送行客 兩兩座溪石(승도송행객 양양좌계석)

스님들은 방문객을 배웅하려고 짝지어 물가에 앉아 있다

握手謝留伴 杯深傾不惜(악수사유반 배심경불석)

손잡고 벗과 작별하면서 잔을 가득 채워 아낌없이 마시네(술마시는 것을 不惜身命, 몸이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도를 닦는데다 비유한 것인가?)

寒風何處來 颯颯掠雙頰(한풍하처래  삽삽략쌍협)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이 홀연히 두 빰을 훔치는구나(멋진 표현이다! 삽삽은 바람불어오는 소리를 느끼게 하는 의성어 아닌가?)

落葉沒前徑 蒼蒼間松竹  (낙엽몰전경 창창간송죽)

낙엽은 오솔길을 파묻고 군데군데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다(지름길 경, 창창은 푸른 모습을 느끼게 하는 의태어?)

一醉歸去來 幽禽響空谷(일취귀거래 유금향공곡)

한껏 취해 돌아가려니 새소리가 빈골짜기를 울리네(‘귀거래’라는 표현을 빌려와서 세상을 등진 도연명과 같은 심정을 슬쩍 내보인 것은 아닐까? 그윽할 유 자를 쓴 이유가 무얼까?)

석양에 친구 스님과 헤어지는 순간이다. 늦가을 강천계곡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다. 그러한 계곡의 모습이, 헤어짐의 아쉬움, 그리고 한 잔 술과 어우러진다.

자연주의자, 또한 낭만주의자로서의 하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황금알을 낳는 때까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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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어느 곳에 아주 아주 훌륭한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마을은 경치가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착하고 인심이 넉넉했습니다.

어느 날 그 마을에 때까우(거위) 한 가족이 날아들었습니다. 그 때까우들은 마을 사람들을 위해 매일매일 황금알을 낳았습니다.

그 때까우 가족에게 신비스런 비밀이 있었습니다. 이상한 모이를 먹고 사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이웃 사랑이라는 한 가지 모이였습니다. 때까우들이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을 주민들이 서로 위하고 도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마을 주민들이 황금알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알을 감추지 않나, 하나라도 더 가져가지 않나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급기야는 서로 먼저 하나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다투기까지 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마을에서 때까우 가족은 황금알을 낳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살아갈 수 조차도 없습니다. 때까우 가족이 점점 야위어 갑니다. 과연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할까요? (2016/01/08)

조선 제일의 학자 중 한 명이었던 하서의 학문법

하서가 지은 五言古詩(오언고시) 중 ‘讀白鹿洞規(백록동 학규를 읽고)’를 보면, 그의 학문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學問且思辨(학문차사변) 篤行在先知(독행재선지)

身修而可推(신수이가추) 應接皆得宜(응접개득의)

此乃爲學要(차내위학요) 儒者當孜孜(유자당자자)

  1. 배우고 묻고 그리고 생각하고 따지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다음 성실하고 친절하게 행동한다.
  2. 그러면 심신을 수양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데 있어 적절함을 얻게 된다.
  3. 학문의 요체가 거기에 있으니, 선비는 마땅히 이를 실천하는데 힘써야 한다.

이 시에서 하서는, 성인이 되는 길은 그 뿐인데, 정작 세상의 선비들은 그 일은 열심히 하지 않고 글만 멋지게 지으려하고 명예와 이익을 쫒는데만 열심이라고 한탄한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며, 따진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념들의 체계인 지식은 강의나 책은 물론이고 인터넷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객체화된 지식일 뿐이다. 그 지식을 얻으려면, 즉,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누구나 반드시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식의 담지자(혹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담지자에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체화되어야 한다. 파편화되거나 박제화되어 사용될 수 없는 지식, 혹은 실천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반드시 “생각하기(thinking)”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무리 강의를 많이 듣고,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그리고 인터넷에서 아무리 자료를 살피고 다녀도, 생각하기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생각하기는 때로 즐겁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수고스럽다.

생각하기란 대단히 적극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통상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이론적으로 도전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고, 동료 학생들과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생각하기의 제1단계이다. 이 단계의 핵심을 한 마디로 하면 ‘대화’이다. 대화는 가장 오랫동안 검증된 지식 획득의 방법이다.

생각하기의 다음 단계는 제1단계에서 얻은 지식을 스스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다. 손으로(혹은 키보드/마우스로) 쓰고 그려야 한다. 파편화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제1단계에서 얻은 지식을 반드시 스스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자기만의 관점이나 독창적인 발상이 들어가면 지식의 변종이 탄생하거나 새로운 이론이 창조된다.

생각하기의 제3단계는 지식을 사용하거나 실천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일지라도 사용되거나 실천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리고 지식을 사용하고 실천하면서 그것을 성찰하면 우리의 지식은 비로소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된다. 그 상태를 지식의 체화라고 부른다.

배운 내용을 묻고, 생각하고, 따지지 않으면 어떤 지식도 자기 자신의 지식이 되지 않는다. 이는 5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리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학자들이 참다운 지식을 획득하고 실천하는데 노력하지 않고, 겉멋을 내고 권력과 명예만 탐한다는 하서의 지적은 오늘날 더욱 타당하지 않나 싶다. (2016/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