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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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탐구에는 이미 그 당시에도 돈이 들었다. 당시의 위대한 예술 보호자들, 즉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 페르가몬의 아탈리아 사람들, 그 외 다른 통치자들이 학문 연구를 후원했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과 같은 대형 교육 및 연구 시설에서 여유있게 작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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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들은 학문을 장려할 때 응용 학문이 아닌 순수 학문에 관심을 쏟았다(<알렉산드리아>, 160-161).”

인류는 진보하는가? 역사를 읽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깨닫곤 한다. 기원전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보다 21세기 서울의 정치와 대학이 더 나은 것 같지 않다. (윤영민)

임서기(林棲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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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벌써 숲에 들어갔어야 했다. 조금 늦었지만 자유를 찾아 떠난다.

“명상과 고행”을 위해 숲 대신 마을을 선택했다. 자유는 숲이 아니라 이웃 속에 있다고 믿는다.

4백년 동안 서원과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한 마디면 족했다.

“21세기 서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현판식에 함께 한 이웃들의 함박 웃음에서 공감을 읽는다. (윤영민)

마지막 무대

오드리_햅번 노년은 이 위성에서의 마지막 무대이다. 그 고별 무대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오직 그 때까지 살아남은 자에게만 돌아온다. 그 점만 보아도 노년은 많은 사람들에게 참으로 소중한 기회이다.

그 무대에서 어떤 공연을 펼칠 지는 개인에게 중대한 선택이다. 일생을 고단하게 살아온 사람은 아마도 평안과 휴식을 택할 것이고, 붙박이처럼 직장과 집을 왕복하며 살아온 사람은 버킷 리스트의 순서에 따라 실컷 여행을 떠나고 싶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회에 봉사를 하고 싶어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즐기며 살고 싶어할 수도 있다.

한 마디로, 다시 돌아오지 못할 지구라는 정박지에서 아쉬움을 남기지 않고 떠나고자 할 것이다. 그 실존적 선택에 대해 누구도 딴지를 걸 수는 없다. 어떤 노년이 아름다운가를 재는 보편적 잣대는 없다. 비교 자체가 무의미하다. 누구나 인생이라는 자신만의 스토리를 완성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안타까운 노년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인생의 작가가 자신이 아니라 타자인 경우이다. 돈 때문에,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회적 명성 때문에, 남의 눈 때문에, 자식 때문에…. 진 무대 공연이란 어쩌면 시간의 문제가 아닐 지도 모른다. 나이에 관계없이 한 순간이라도 인생 스토리에 있어 자신이 작가이고 주인공이 될 수 있다면 커다란 후회없이 지구를 떠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마지막 무대 공연을 스스로 결정할 수만 있어도 행복한 노년이다. 노인이 되기 훨씬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선택이 이루어진 경우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이 선택을 대신해 주는 경우도 있다. 떠날 때가 가까워지면 누구나 진지해진다. 삶의 끝이라는 가상적 상황에서 살아온 길을 복기하는 일이 잦아지는 걸 보면 나도 마지막 무대를 준비해야 하는 때가 오기는 온 모양이다.

늙어감에 대한 반역

나이를 먹어가면 점점 편한 게 좋아진다.  새롭게 뭔가를 배우고 생각을 바꾸고, 시도하는 것이 귀찮고 두렵다. 심신의 적응력이 떨어지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현상일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게 늙는 것이리라. 지금까지 당연시 해왔던 것들을 뒤집어보고 거부하면 삶의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는다. 도전은 우리를 일상의 감옥으로부터 꺼내준다. 물론 그것은 불안과 위험을 가져오지만 삶에 활력이 솟구치게 해준다. 오늘은 뭘 거부해볼까, 이번 주는 뭘 뒤질어볼까, 이번 방학에는 어디로 탈출해볼까, 이번 학기는 어떤 변화를 시도해볼까, 올해는 뭘 새로 배워볼까…이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교수는 서서 가르치는데 학생들은 왜 앉아서 수업을 듣는가, 왜 강의를 학생들 앞에서 해야 하는가 뒤에서 하면 안되나, 인문학 전공자들에게 전산학을 가르치면 안되나, 정치인들에게 주는 보수를 모두 없애버리면 안될까, 왜 자꾸 새로운 기계에 적응하게 하나 기계가 내게 적응해야지, 왜 꼭 투표소에서 투표를 해야하나…지리산 속에 살면서 출퇴근하면 어떨까, TV 없는 세상이 낫지 않을까, 휴대폰이 점점 값비싼 올가미가 되는구나…없애 버릴까… 앞으로도 계속 생각을 변화시키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좀 고단하기는 하지만 삶이 재밌지 않는가. 오늘도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해야겠다.

밥그릇

밥그릇이 문제다. 밥그릇이 비어도 문제고, 밥그릇이 넘쳐도 문제고, 밥그릇을 차버려도 문제고, 제 밥그릇에만 집착해도 문제고, 밥그릇에 쌀밥만 담아도 문제고, 밥그릇 싸움도 문제고, . . . 밥그릇이 행복이다. 밥그릇이 있어 행복하고, 밥그룻에 밥을 담을 수 있어 행복하고, 밥그릇에 쌀밥뿐 아니라 검은콩밥을 담으니 행복하고, 밥그릇을 삼분의 일만 채우니 행복하고, 밥그릇에 밥만이 아니라 사랑도 담으니 행복하고, 밥그릇을 나누니 행복하다. . . . 같은 밥그릇인데 누구에게는 불행의 씨앗이고, 누구에게는 행복의 원천이다. 나는 오늘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밥그릇을 비우고 정갈하게 닦았다. (윤영민).

공공재에 관한 무임 승차론, 적절한 문제 제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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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협력’하면 떠오르는 염려 중 하나는 ‘무임승차(free riding)’이다.  1965년 The Logic of Collective Action이라는 맨슈어 올슨(Mancur Olson)의 저서가 남긴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여러사람들의 협력을 통해서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는데 있어 가장 큰 도전은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공재는 그것을 창출하는데 동참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의 수혜를 배제할 수 없다. 올슨에 의하면, 그러한 공공재의 경우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손을 안대고 코를 푸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다. 대가는 지불하지 않고 결과만 누리는 것이다.

특히 공공재의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커질수록 무임승차의 유혹은 커지고, 일단 무임승차자가 출현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협력할 의욕을 잃게 되어 결국 공공재의 공여는 실패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올슨은 ‘선택적 인센티브’로 무임승차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지만,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선택적 인센티브 제공이 불가능해지고 설령 공동의 목표가 있더라도 협력에 성공할 확률이 낮아진다고 역설한다.

무임승차 문제가 발생하는 집단 행동(협력)의 가장 알려진 사례는 선거이다. 공직자 선거에서 유권자는 투표를 하기 위해 제법 많은 비용(시간, 수고 등)을 지불해야 한다. 선거 결과 상대적으로 훌륭한 공직자가 선출되면 좋지만 자신의 한 표가 미치는 영향이 미미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꾀가 난다. 선거일에 투표를 하지않고 해외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투표율이 낮아지고 결국 그렇고 그런 후보들이 뽑히게 되며, 공직자들은 국민, 시민, 유권자를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다수 유권자들의 무임승차 덕분에 장기적으로 선거 공학이 발달하고 민주주의의 핵심인 선거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올슨의 이론은 여러가지 바판을 받아왔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의 인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과연 오늘날에도 반세기 전에 제기된 올슨의 주장은 여전히 타당한가? 혹시 무임승차 이론은 잘못된 문제제기가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첫째, 무임승차 이론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는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타산적인 유권자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있지만, 국민으로서, 유권자로서 책임감을 느끼며 진지하게 투표에 임하는 다수 유권자의 협력적인 행동을 설명하지 못한다.

둘째,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이지만 사람이 타산적(합리적)이라는 가정에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 관련된 연구를 보면, 많은 경우 사람들이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항상 타산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혹은 정치적 집합 행동에 있어 경제학 모형에서 가정하는 정도로 사람들이 철저하게 이해타산적으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이타심이 많은 사람도 있고, 규범지향적인 사람도 있으며, 대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 투철한 시민적 책임감을 지닌 사람도 많다.

셋째, 예로 든 투표의 경우 무투표나 기권의 선택을 단순히 무임승차로 설명하는 것은 통계학에서 말하는 모형규정의 오류(model specification error)일 수 있다. 무투표의 설명 모형에 중요한 요인(들)이 빠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즉, 선거에 참여한 정당들이 성격, 노선, 정책 등에 있어 별로 차이가 없다든지, 후보자들이 그밥에 그나물이라든지, 누가 뽑히던 정부가 달라질 것 같지 않다든지 등과 같은 중요한 사회정치적요인들이 무시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투표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다른 공공재 생산에서 자주 목격되는 참여 가치 현상이 무임승차론의 결과중심적 해석에 반한다. 예컨대 자발적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서비스가 제공될 경우 참여자들에게는 참여 자체에서 느끼는 보람이나 기쁨이 결과 향유에 못지 않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즉, 참여 자체가 훌륭한 동기가 될 수 있는데도 무임승차론은 참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개념은 인간의 인식을 규정한다. 네트워크 사회에서 무임승차론은 지금까지 보다 훨씬 제한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협력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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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협력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을까? 아마도 일반적으로 “힘을 합쳐서 서로 도움”(네이버 국어 사전)의 의미로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협력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일한 용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소통이 어려워질 뿐 아니라 협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 정의에서 가장 크게 벗어난 정의는 진화생물학에서 발견된다. 위 사진의 논문 2-3줄에 흥미있는 협력의 정의가 제시되어 있다. 이 논문은 마틴 노왁(Martin Nowak)의 “협력의 진화를 위한 다섯가지 규칙(Five Rules for the Evolution of Cooperation)”(Science 2006, Dec. 8; 전체 논문은 첨부 파일 참조)이다.  이 글에서 “협력은 이기적 복제자들이 서로 돕기 위해 자신들의 재생산 잠재력을 일부 포기함을 의미한다(Cooperation means that the selfish replicators forgo some of their reproductive potential to help one another).” 여기서 복제자(replicator)는 진화생물학에서 진화의 단위(evolution unit)를 가리킨다.

이 논문에서 노왁은 경쟁이 지배하는 자연도태 환경에서 어떻게 자신을 희생하는 협력이 가능한가를 탐구한다. 저자는 혈연선택, 직접 호혜성, 간접 호혜성, 네트워크 호혜성, 집단선택 각 이론이 제시하는 협력 조건을 각각 한 줄의 부등식으로 표시한다. 예컨대 일개미가 자신 스스로의 번식을 포기하고 여왕 개미에게 번식을 전담하게 하는 것은 협력으로 간주된다. 윌리엄 해밀턴은 일개미의 그러한 협력 행동이 유전자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어떠어떤 이유로 일개미는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는 50%의 유전자밖에 남겨주지 못하지만, 여왕 개미를 도와서 일개미를 낳게 하면 자기 유전자의 75%를 남길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의 진화를 포기한다고 해석한다.

우리 인간도 개미처럼 유전자 주인의 운반자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해석이 된다. 그러나, 유전자 신화를 믿지 않는다면 진화생물학적 개념 정의는 수용하기 힘들다. 사회학적으로 협력이란 목표 혹은 목적 없이도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행동이다.

협력이 왜 일어나는가를 해명하는 것이 전부라면 협력을 어떻게 정의하던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협력을 어떻게 촉진할 것인가까지를 염두에 둔다면 진화생물학–특히 게임이론적 접근–적 정의는 연구에 방해가 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경험하는 수많은 협력은 목적 지향적이나 목표 지향적이 아니라 과정 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왜 협력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다. 협력에 이유가 더 필요한가? 협력 연구자의 과제는 협력을 “즐겁게 행복하게” 만드는 요소를 찾아내는 것이 되리라.

공유지의 비극, 피할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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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개입 없이 공유지(commons)는 비극적인 파탄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은 오랫동안 사회과학자들의 상상을 비관적 전망에 결박하였다. 그 동안 많은 연구자들이 공유지에 대한 비극적 전망론에 불만이 많았다.

엘리너 오스트롬(Elinor Ostrom)은 그중 가장 성공적으로 ‘공유지의 비극’론에 도전하였다. 정치학자인 그녀에게 노벨 경제학상이 수여된 것은 아마도 그러한 학문적 성취가 지닌 커다란 가치를 확인하는 절차였을 것이다.

공유지는 협동보다는 이기적이며 기회주의적인 행동에 대한 유혹이 강한 상황이다. 공유지를 제공하는데 수고하지 않은 사람도 공유지의 혜택으로부터 배제하기 어렵고, 개인이 배신이나 비협력으로부터 얻는 이익은 큰 반면 거기서 발생하는 비용은 모두가 나누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오스트롬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아래 문장으로 요약된다. 인간은 상호협력을 통해서 공유지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아래 두 문장으로도 요약된다. 인간은 상호협력을 통해서 공유지의 딜레마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상호협력은 공유지(공유 자원) 사용자들이 주체가 된 제도화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

좀 더 길게 한 문단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물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공유지의 비극을 성공적으로 피할 수 있다. 사용자들이 상호협력이 가능한 사회적 자본을 갖추고, 사용자들이 나서서 몇 가지 수준의 제도를 구축하며, 나아가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감시장치를 제대로 운영할 수 있다면. (여기서 제도란 사용자에 대한 금지, 요구, 또는 허용이 명시된 규칙을 의미한다.) 그렇게 될려면 공유지가 장기적으로 존속 가능해야 하고, 공유지에 대한 접근을 어느 정도 제한할 수 있어야 하며, 관련 당사자들 사이에 신뢰가 구축되어야 한다. 국가가 제도의 운영을 뒷받침해 줄 수 있고 시장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성공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결국 공유지 문제는, 공유지에 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용자 자신들이 나서서 그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높이고, 해법에 관한 합의를 도출하며, 철저한 감시 장치를 통해서 사용자 누구도 ‘순진한 바보’로 전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정부는 공유지가 고갈되지 않도록 자원을 투입하고 사용자들의 합의를 법적으로 뒷받침해주며, 정보의 획득과 공유에 필요한 비용이나 감시에 수반되는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사용자들의 해결을 지원해 줄 수 있다. 사용자들은 필요한 경우 공유지 사용권을 시장을 통해서 양도할 수도 있다.

오스트롬은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15개 이상의 사례에서 공유지 운영의 성공과 실패를 분석하고, 분석틀을 도출해서 제시한다. 그녀의 분석틀은 경제학 모형, 혹은 게임이론이나 합리적 선택 모형들에 비해 상당히 복잡하다. 그것은 고도로 추상적인 모형의 전제를 완화시키고 현실에의 적합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거쳐야 하는 피할 수 없는 타협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멋진 타협이 되었다.

그녀의 이론은 간명함의 아름다움을 잃은 대신 현실문제의 해결가능성을 얻었다. 이 책에서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개념은 미래에 대한 활인율(discount rate)이다. 공유지 존속의 불확실성이 높거나, 대체 공유지의 이용가능성이 높거나, 사용자들 사이의 신뢰가 부재하거나, 사용자들의 정주성이 낮으면 현재 편익의 가치(인지된 가치)가 미래 편익의 가치에 비해 커지게 된다. 즉, 미래에 대한 활인율이 높아진다. 미래에 대한 활인율이 높아질수록 공동의 이익을 위한 합의와 집합행동이 어렵게 된다. 기회주의적 선택이 가져오는 편익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내가 살았던 두 개의 농촌 마을 주민들이 마을의 공동 문제를 해결하는데 보였던 엄청난 차이가 떠올랐다. 마음이 떠나버린 마을의 주민들은 마을의 장기적 복지를 위한 어떤 해법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오직 어떻게 하면 보다 비싼 값에 땅을 팔고 마을을 떠날 것인가에만 관심을 가졌다. 반면에 마을을 사랑하는 주민들이 대다수인 마을에서는 장기적인 협력이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 미래에 대한 활인율의 차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책이 지닌 최대의 장점은 디테일에 있다. 로스엔젤러스 근처 해안지대에서 지하수 분지의 안정적 이용이라는 난제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풀었는가에 대한 상세한 분석, 스위스와 일본의 고산 지대 목초지와 산림의 공동 소유, 스페인의 발렌시아 지방과 필리핀의 일로카노스 지역의 관개제도가 어떻게 해묵은 지역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는가에 대한 분석을 따라 읽으면, 한편으로 인간이 공유지 문제를 고전적인 게임이론이나 집합행동이론이 예측케 하는 것보다 훨씬 지혜롭게 해결할 능력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 공유지 문제 해결에 관한 실질적인 지혜도 덤으로 얻는다.

그러나 공유지 딜레마에 대한 만병통치약은 없다는 저자의 주장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각 공유지가 처한 환경은 고유한 특징과 성격을 갖고 있다. 때문에 이론이나 분석틀은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는데 가이드가 되어줄 수는 있지만 각 공유지 문제에 대해 바로 답을 줄 수 없다. 오직 오랜 세월 동안의 도전과 시행착오를 통해서만이 안정된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공유지와 같이 기회주의의 유혹이 큰 상황에서 협력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거의 대부분의 사회 문제를 협력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으리라.

협력에 관한 최고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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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이 책이 112년 전(1902년)에 출간되었단 말인가? 내게는 마치 몇 년 전에 씌여진 책으로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참 놀라운 책이다. 아니 어쩌면 100여년 만에 이 책의 메시지를 다시 주목하게 되는, 세상 흐름의 반전이 더 놀라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나키즘을 생물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고, 단채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니고, 진화론이나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있어서 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책을 협력의 이론적 토대를 구하기 위해 읽었다.

내게 읽힌 이 책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협력–크로포트킨의 표현으로는 상호부조(mutual aid)–은 적자생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의 원리이다. 크로포트킨은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이나 사회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종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화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라는 다수 다윈주의자들의 진화론, 원시인간사회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스펜서와 홉스의 사회이론은 그의 사상이나 직관은 물론이고, 일상적 경험이나 학문적 연구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은 이 책에서 1) 찰스 다윈은 협력(상호부조)이 생존경쟁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법칙임을 강조했음을 지적하고, 2) 자연에서 상호투쟁보다 군집(association)과 상호부조(mutual aid)를 의미하는 사회성(sociability)이 진화의 핵심 요소임을 밝혔으며, 3) 특히 미개사회부터 현대사회까지 인간사회의 진화는 사회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였다.

비록 현대 진화생물학에서 보는 유전자 분석이나 진화심리학에서 보는 뇌파 분석과 같은 정교한 과학적 연구방법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선한 심성,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그의 뛰어난 직관과 통찰, 그리고 그의 탁월한 연구역량은 이 책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책은 개미, 꿀벌, 독수리, 할미새, 두루미, 앵무새 등에서 시작해서 다람쥐, 비버, 산토끼, 순록, 그리고 늑대, 사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곤충과 동물의 사례를 통해서 개체와 가족을 뛰어넘어 동종 심지어 이종간에 일어나는 상호부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특히 포유류들에게 군집과 상호부조는 철칙이라고 강조한다(68). 죽은 동료의 시체 위를 빙빙 돌며 울부짖다 죽어가는 앵무새의 동료애, 비가 오면 떨고 있는 동료들의 목을 자신들의 꼬리로 감싸주면서 서로 보호하는 티티원숭이, 그리고 원숭이들이 행하는 각가지 놀라운 협업은 협력이 자연적이며 위대한 행위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확인시켜준다.

크로포트킨은, 동물세계의 진화에서 상호부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사회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해 책의 3분의 2 이상을 할애한다. 그는 소위 “자연상태”, 즉, 인류의 원시적인 조직형태는 가족이 아니라 무리 혹은 군집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부시맨, 호텐토트족,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파푸아족, 에스키모, 알류트족 등 소위 미개사회에 존재하는 연대정신과 사회적 예의범절을 보여준다. 그는 단언한다.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원시인들의 특징은 아니다(120).”

그는 인류가 씨족사회를 벗어나게 되면서 ‘촌락 공동체’가 대표적인 생활형태가 되었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촌락 공동체는 공동의 혈통으로 간주되고 공동으로 일정한 영역을 소유하는 가족들끼리의 연합이다(160).” “촌락 공동체는 공동경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법적, 군사적, 교육적, 경제적 양식이 변경될 때마다 촌락, 부족 또는 동맹의 민회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163).”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촌락 공동체의 전통은 중앙집권적 국가나 지배계급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에는 공유지, 중세도시, 길드 그리고 현대에서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상조회, 자선단체 등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전통의 핵심은 바로 상호부조이다.

다음 두 가지 인용은 협력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이론적 입장을 잘 요약해준다. “인간 심리에는 동기가 있다.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호소를 듣고 이에 응답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영웅들은 행동한다. 모든 사람들은 영웅들이 할 일은 자신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라는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고 인류가 나타나기 전 수십만년 동안의 군거 생활 속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323).”

“요약하자면,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서 만들어낸 상호증오와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연대감이란 앞선 진화 과정 속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단계부터 진화를 거듭하며 얻어진 연대감이 마찬가지로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단 한 가지 요인 때문에 해체될 수는 없다. 최근에 작게는 가족이나 빈민가에 사는 이웃들 그리고 촌락이나 노동자 비밀 결사 형태로 숨어들었던 상호지지와 지원에 대한 욕구는 근대 사회에서도 다시금 거듭 주장되었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미래의 진보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338-339).”

크로포트킨이 이 책을 출간한 지 104년 후인 2006년 하버드대 진화생물학 교수인 마틴 노왁(Martin Nowak)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저명한 논문, “협력의 진화를 위한 다섯가지 법칙”에서 다음과 같이 크로포트킨의 명제를 반복했다. “따라서, 우리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외에 “자연적 협력”을 진화의 세번째 근본 원리로 추가할 수 있겠다(Thus, we might add “natural cooperation” as a third fundamental principle of evolution beside mutation and natural selection)(1563 쪽).” 노왁이 인간을 타산적이라고 가정하는 게임이론을 통해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2012년 출간한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에서 크로포트킨의 명제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 수준으로 밀어붙인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집단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의도를 읽고 협력하는 한편, 경쟁하는 집단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지닌 집단은 그것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보다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 사이의 경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 경쟁은 한 개인을 남보다 유리하게 만드는 형질의 자연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새 환경으로 진출하고 강력한 적수와 경쟁하는 종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집단 내의 단결과 협동이었다(2013 한글판, 273쪽).”

노왁도 윌슨도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이 그와는 다른 길을 따라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첫눈…이별

12308665_1136724376337795_3436413035951833079_n 첫눈이 내리면 장미들과 헤어진다. 다시 만나려면 봄을 기다려야 한다. “교수님, 꿈이 뭐에요?” 5년 전쯤 한 학생이 물었다. 아직 5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 질문에 무척 당황했었다. 지금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 때처럼 당혹해 하진 않을 것 같다. 아직 꿈도 있고, 소망도 있다. 언제든 차례가 되면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를 하곤 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해두고 싶은 일들도 있다. 그렇다고 일을 서두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언젠가 10만 광년쯤 떨어진 어떤 별에서 먼 지구를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아쉬워 하고 있을런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