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에 관한 최고의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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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녕 이 책이 112년 전(1902년)에 출간되었단 말인가? 내게는 마치 몇 년 전에 씌여진 책으로 읽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참 놀라운 책이다. 아니 어쩌면 100여년 만에 이 책의 메시지를 다시 주목하게 되는, 세상 흐름의 반전이 더 놀라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아나키즘을 생물학적으로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고, 단채 신채호 선생이 아나키스트가 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런 이유 때문도 아니고, 진화론이나 진화생물학에 관심이 있어서 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 책을 협력의 이론적 토대를 구하기 위해 읽었다.

내게 읽힌 이 책의 메시지는 명쾌하다: 협력–크로포트킨의 표현으로는 상호부조(mutual aid)–은 적자생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의 원리이다.

크로포트킨은 당시 유행하던 진화론이나 사회이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동종간의 치열한 생존경쟁이 진화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라는 다수 다윈주의자들의 진화론, 원시인간사회가 만인에 의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스펜서와 홉스의 사회이론은 그의 사상이나 직관은 물론이고, 일상적 경험이나 학문적 연구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크로포트킨은 이 책에서 1) 찰스 다윈은 협력(상호부조)이 생존경쟁에 못지 않게 중요한 진화법칙임을 강조했음을 지적하고, 2) 자연에서 상호투쟁보다 군집(association)과 상호부조(mutual aid)를 의미하는 사회성(sociability)이 진화의 핵심 요소임을 밝혔으며, 3) 특히 미개사회부터 현대사회까지 인간사회의 진화는 사회성에 크게 의존하고 있음을 보였다.

비록 현대 진화생물학에서 보는 유전자 분석이나 진화심리학에서 보는 뇌파 분석과 같은 정교한 과학적 연구방법의 뒷받침을 받지 못했지만, 그의 선한 심성, 인간과 인간사회에 대한 그의 뛰어난 직관과 통찰, 그리고 그의 탁월한 연구역량은 이 책을 시대를 뛰어넘어 살아남을 수 있는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 책은 개미, 꿀벌, 독수리, 할미새, 두루미, 앵무새 등에서 시작해서 다람쥐, 비버, 산토끼, 순록, 그리고 늑대, 사자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곤충과 동물의 사례를 통해서 개체와 가족을 뛰어넘어 동종 심지어 이종간에 일어나는 상호부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특히 포유류들에게 군집과 상호부조는 철칙이라고 강조한다(68). 죽은 동료의 시체 위를 빙빙 돌며 울부짖다 죽어가는 앵무새의 동료애, 비가 오면 떨고 있는 동료들의 목을 자신들의 꼬리로 감싸주면서 서로 보호하는 티티원숭이, 그리고 원숭이들이 행하는 각가지 놀라운 협업은 협력이 자연적이며 위대한 행위라는 사실을 감동적으로 확인시켜준다.

크로포트킨은, 동물세계의 진화에서 상호부조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인간사회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부정하는 사회진화론을 비판하기 위해 책의 3분의 2 이상을 할애한다. 그는 소위 “자연상태”, 즉, 인류의 원시적인 조직형태는 가족이 아니라 무리 혹은 군집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는 부시맨, 호텐토트족,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파푸아족, 에스키모, 알류트족 등 소위 미개사회에 존재하는 연대정신과 사회적 예의범절을 보여준다. 그는 단언한다. “절제되지 않은 개인주의는 근대의 산물이지 원시인들의 특징은 아니다(120).”

그는 인류가 씨족사회를 벗어나게 되면서 ‘촌락 공동체’가 대표적인 생활형태가 되었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고 지적한다. “촌락 공동체는 공동의 혈통으로 간주되고 공동으로 일정한 영역을 소유하는 가족들끼리의 연합이다(160).” “촌락 공동체는 공동경작이나 여러 가지 형태로 가능한 상호지지, 폭력으로부터의 보호, 지식이나 인종 간의 결속 그리고 도덕 개념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합이기도 하다. 그리고 사법적, 군사적, 교육적, 경제적 양식이 변경될 때마다 촌락, 부족 또는 동맹의 민회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163).”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촌락 공동체의 전통은 중앙집권적 국가나 지배계급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중세 때에는 공유지, 중세도시, 길드 그리고 현대에서는 노동조합, 협동조합, 상조회, 자선단체 등의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그 전통의 핵심은 바로 상호부조이다.

다음 두 가지 인용은 협력에 관한 크로포트킨의 이론적 입장을 잘 요약해준다.

“인간 심리에는 동기가 있다.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미치지만 않았다면 그들은 도움을 청하는 호소를 듣고 이에 응답하지 않고 “견딜 수 없다.” 영웅들은 행동한다. 모든 사람들은 영웅들이 할 일은 자신들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의 궤변으로 상호부조라는 감정을 거스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감정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사회생활 속에서 그리고 인류가 나타나기 전 수십만년 동안의 군거 생활 속에서 길러졌기 때문이다(323).”

“요약하자면, 중앙집권국가의 파괴적인 권력도, 고상한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이 과학의 속성으로 치장해서 만들어낸 상호증오와 무자비한 투쟁이라는 학설도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깊이 박혀 있는 연대의식을 제거할 수는 없다. 모든 인간의 연대감이란 앞선 진화 과정 속에서 자라난 것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단계부터 진화를 거듭하며 얻어진 연대감이 마찬가지로 진화 과정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 양상 가운데 단 한 가지 요인 때문에 해체될 수는 없다. 최근에 작게는 가족이나 빈민가에 사는 이웃들 그리고 촌락이나 노동자 비밀 결사 형태로 숨어들었던 상호지지와 지원에 대한 욕구는 근대 사회에서도 다시금 거듭 주장되었고, 늘 그래왔던 것처럼 미래의 진보에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면서 그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338-339).”

크로포트킨이 이 책을 출간한 지 104년 후인 2006년 하버드대 진화생물학 교수인 마틴 노왁(Martin Nowak)은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저명한 논문, “협력의 진화를 위한 다섯가지 법칙”에서 다음과 같이 크로포트킨의 명제를 반복했다.

“따라서, 우리는 돌연변이와 자연선택 외에 “자연적 협력”을 진화의 세번째 근본 원리로 추가할 수 있겠다(Thus, we might add “natural cooperation” as a third fundamental principle of evolution beside mutation and natural selection)(1563 쪽).”

노왁이 인간을 타산적이라고 가정하는 게임이론을 통해서 동일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사회생물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윌슨(Edward Wilson)은 2012년 출간한 <지구의 정복자(The Social Conquest of Earth)>에서 크로포트킨의 명제의 타당성을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호모 사피엔스를 이 수준으로 밀어붙인 것은 무엇일까?….그것은 집단 선택이었을 것이다. 서로의 의도를 읽고 협력하는 한편, 경쟁하는 집단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는 구성원들을 지닌 집단은 그것보다 능력이 떨어지는 집단보다 엄청난 이점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집단 구성원 사이의 경쟁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고, 그 경쟁은 한 개인을 남보다 유리하게 만드는 형질의 자연적 선택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새 환경으로 진출하고 강력한 적수와 경쟁하는 종에게 더 중요한 것은 집단 내의 단결과 협동이었다(2013 한글판, 273쪽).”

노왁도 윌슨도 크로포트킨을 인용하지 않았다. 아마도 자신들이 그와는 다른 길을 따라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노왁과 윌슨의 목소리에서 크로포트킨의 주장이 들린다.

SNS가 우리를 모두 리어왕으로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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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 고령의 리어 왕은 자신의 왕국을 세 딸에게 물려주고 퇴위하려고 한다. 그는 막내딸인 코딜리아(Cordelia)를 가장 사랑했고 그녀에게 왕국의 가장 큰 부분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특별한 게임을 벌였다. 자신에게 가장 감동적으로 사랑을 고백한 딸에게 왕국의 가장 큰 부분을 물려주겠다고 공언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당연히 코딜리아가 가장 큰 몫을 받게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큰 딸인 고너릴(Goneril)과 둘쨋 딸 리간(Regan)은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왕에게 흡족한 대답을 주었다. 그러나 코딜리아는 언니들의 속셈을 알고 있었고 왕이 실망하리라 생각했지만 정직하게 대답한다. 그녀는 자식된 도리로써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으나 아버지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왕은 진노하고 게임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왕은 첫째와 둘째에게 막내딸의 몫까지 덤으로 나누어 주어버렸다. 충성스런 신하인 켄트 백작은 왕의 경솔한 결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나 왕의 분노를 사서 추방 명령을 받고 만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세익스피어의 희곡 <리어 왕>은 배신, 음모, 광기, 살인, 전쟁, 죽음 등 온갖 비극으로 치닺게 된다.

말! 말! 말!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사회의 ‘시스템’이 말과 의미의 과잉생산을 요구하고 있으며, 정보의 바다에 진실과 의미가 익사하고 있다고 갈파한다. 내가 보기에 정보과잉에 못지 않게 심각한 문제는 카스 선스타인이 말하는 ‘반향실(echo chamber)’ 혹은 ‘정보 고치(information cocoon)’ 현상이다. 즉,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의 선별이 그 어느 때보다 손쉬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어울린다. ‘공감’의 이름으로 서로 맞장구를 치고 아첨한다. 긍정적 피드백을 한없이 주고 받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긍정적 피드백의 무한반복에 오랫동안 길들여지면, 이견이나 반대의 목소리를 참지 못한다. 그 때문에 평생동안 절대권력을 지녔던 리어 왕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의 진솔한 정직, 가장 충성스런 신하의 용기있는 반대를 참지 못했던 것이다.

<리어 왕>의 비극은 사랑이나 배신이 아니라 절대권력에서 잉태한다. 절대권력자가 아니고는 말만 가지고 자신의 왕국을 나누어주는 ‘게임’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딸을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보통 아빠라면 누구도 한판의 말장난에 운명을 걸지 않을 것이다. 한 순간의 말보다는 평소에 나타났던 애정과 존경을 훨씬 높이 평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자기맘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권력자만이 그런 짓을 할 것이다. 그리고 평소에 이견이나 반대 목소리를 충분히 경험했던 왕이라면 충직한 신하를 한번의 반대 때문에 추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리어 왕>은 말에 의해 빚어질 수 있는 비극의 극한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절대권력의 구조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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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절대권력이 존재하던 궁정에서나 있었던 무한한 긍정적 피드백, 즉, 아첨이 소셜미디어에서 일상화된다. 소셜미디어라는 선물경제에서 아첨은 선물이 되어 한없이 순환한다. 나는 너를 추켜세우고 너는 나를 추켜세우는 대화가 무한히 반복된다. 인터넷에 절대권력은 없지만 아첨의 비극은 진행형이다. ‘반향실’ 덕분이다.

민주주의는 사로 다른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성립한다. 다른 생각과 주장을 인정하고 포용할 때 건강한 민주주의가 가능하다. 만약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반향실로 세상을 가득 채운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를 근본부터 위협하게 될 것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나타나는 경향을 보면 이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리어 왕>의 비극이 주는 경고를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윤영민)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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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탐구에는 이미 그 당시에도 돈이 들었다. 당시의 위대한 예술 보호자들, 즉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왕들, 페르가몬의 아탈리아 사람들, 그 외 다른 통치자들이 학문 연구를 후원했다.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이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과 같은 대형 교육 및 연구 시설에서 여유있게 작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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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들은 학문을 장려할 때 응용 학문이 아닌 순수 학문에 관심을 쏟았다(<알렉산드리아>, 160-161).”

인류는 진보하는가? 역사를 읽으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점을 깨닫곤 한다. 기원전 3세기의 알렉산드리아보다 21세기 서울의 정치와 대학이 더 나은 것 같지 않다. (윤영민)

임서기(林棲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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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에 벌써 숲에 들어갔어야 했다. 조금 늦었지만 자유를 찾아 떠난다.

“명상과 고행”을 위해 숲 대신 마을을 선택했다. 자유는 숲이 아니라 이웃 속에 있다고 믿는다.

4백년 동안 서원과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 없었다. 한 마디면 족했다.

“21세기 서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현판식에 함께 한 이웃들의 함박 웃음에서 공감을 읽는다. (윤영민)

첫눈…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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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 내리면 장미들과 헤어진다. 다시 만나려면 봄을 기다려야 한다.

“교수님, 꿈이 뭐에요?”

5년 전쯤 한 학생이 물었다. 아직 50대 중반이었던 나는 그 질문에 무척 당황했었다.

지금 다시 그 질문을 받는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 때처럼 당혹해 하진 않을 것 같다.

아직 꿈도 있고, 소망도 있다. 언제든 차례가 되면 홀가분하게 떠날 준비를 하곤 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해두고 싶은 일들도 있다. 그렇다고 일을 서두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

언젠가 10만 광년쯤 떨어진 어떤 별에서 먼 지구를 바라보며 나는 이렇게 아쉬워 하고 있을런 지도 모른다.

“저토록 눈부시게 아름다운 행성에서 왜 그렇게 쫓기며 살았을까?” (윤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