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도국’에 나타난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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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집 근처의 장성 군립도서관에서 열린 고전 소설 독서 동아리 모임에 갔다. 지난 달 10여명이 모여서 시작했는데, 어제 열린 첫 모임에 주최측인 군립도서관 직원 두 명과 나, 그렇게 3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는 적었지만 우리는 <홍길동전>과 <어린 왕자>를 가지고 두 시간이 넘도록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참석자가 적어서 다행히 실컷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3백 여년 전 조선 최고의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허균은 <홍길동전>에 자신의 유토피아 기획을 제시했다. 처절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세기말 조선은 전쟁과 궁핍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적서 차별, 부정부패 등 정치와 사회현실도 백성들의 눈에는 절망적 상태였으리라. <홍길동전>에는 그러한 시대에 대한 허균의 인식이 깊이 베어 있다.

작품 속 홍길동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치세에, 재상의 집안에서, 영웅적 자질을 완벽하게 갖춘 서자로 세상에 태어났다! 아,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 설정인가. 엄격한 노예제, 신분제의 사회인 조선 초기에 서자로 태어났다! 그것도 영웅호걸의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재상의 집안에서….

허균은 초인적 영웅이 나타나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길 소망했으리라. 그가 의적의 모습으로 오던 왕의 모습으로 오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적떼 활빈당 수령 홍길동은 조선을 구제하지 못하고 결국 조선을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되지 않는가.

허균은, 세종대왕이라는 최고의 성군과 홍길동이라는 초인적 영웅의 만남을 사회 개혁과 혁신을 낳지 못한 채 끝나게 만든다. 적서차별로 대변되는 모순된 사회구조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허균에게도 도전하기에 너무 벅찬 상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허균은 홍길동과 활빈당이 조선의 율법이 미치지 않은 율도국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만든다. 그것도 홍길동이 왕이 되어서 말이다.

허균은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이렇게 그린다.

“새 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시절이 태평하여 풍년이 들고,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임금이 베푼 덕이 온 나라에 퍼져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었다(101쪽).”

허균은 홍길동이 영웅의 꿈을 이루었다고 칭송하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아름답구나! 길동이 행한 일들이여! 자신이 원한 것을 흔쾌하게 이룬 장부로다. 비록 천한 어미 몸에서 태어났으나 가슴에 쌓인 원한을 풀어 버리고, 효성과 우애를 다 갖춰 한 몸의 운수를 당당히 이루었으니, 만고에 희한한 일이기에 후세 사람에게 알리는 바이다(105쪽).”

전쟁이 없고, 백성의 육신이 편안하고 부유하게 사는 사회가 율도국에 실현시킨 허균의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과연 율도국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왕이 된 홍길동과 그 집안은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에서 백성들도 과연 두루두루 행복했을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바로 ‘율도국’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홍길동전>이 끝나는 지점에서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율도국’을 찾아온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의 어른들이 얼마나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허균이 율도국에 그렸던 유토피아를 이루었다.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조선 시대의 귀족은 물론이고 왕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에 산다.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서 주워가는 사람이 없기도 하다. 물건 나름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 유토피아의 주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국민이다. 자살률 1위, 자살 증가율 1위, 노인빈곤율 1위 등등 어느 지표로 보아도 우리 국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에서도 사람들이 불행할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권위와 지배, 부유함과 편리함, 그리고 일에 집착한 사람들(‘어른들’)은 무엇이 삶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성장의 댓가인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는 독자를 발가벗기는 거울이다. 우리의 민낯, 몸뚱이, 그리고 마음 속까지 남김없이 보여주는 무서운 거울이다.

초인적 영웅들은 유토피아의 기반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영웅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진정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데 영웅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아니 초인적 영웅을 기다리는 한, 영웅 의존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모두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윤영민, 2016/02/26)

글쓴이: 만리거사

한양대학교 ERICA 캠퍼스 정보사회학과의 윤영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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