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 우리 정치의 목을 조르다: 또 불행한 대통령을 보게 될 것인가

한국의 지식인들은 현대 한국사회를 유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학자들의 태도를 반기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유교란 ‘삼강오륜’, 권위주의, 노인 정치, 가부장제, 도덕주의, 제사, 위선, 과거 지향 등과 같은 시대착오적 원칙이나 도덕적 적폐와 동일시된다. 그러니 한국사회가 유교적이라는 해석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냉정히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아직 뼛속까지 유교적이다. 기독교가 전래된 지 1백년이 훨씬 넘었고 국민의 3분의 1 이상이 기독교 신자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유교 사회이다.

유교적 유산은 마치 한국인의 유전자에 박혀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서양의 이론과 개념만 가지고 한국의 정치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경전적 유교와 현실적 유교를 구분해야 한다. 경전에서 읽히는 유교와 현실에서 구현된 유교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문화와 정치를 규정하는 프레임은 경전 속의 유교가 아니라 6백년 조선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어온 문화적 규범과 사회 관계로서의 유교이다.

나이, 성별, 지위,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사회적 연대와 배제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은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되어 국가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 맹목적인 충성과 의리는, 그것이 설령 범죄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것일지라도 사회적으로 칭송받거나 적어도 용인되는 반면 배신은, 그것이 설령 정의를 위한 내부 고발일지라도 비난 받는다.

예컨대 나이를 보면, 아직 우리는 대학입시의 동점자 처리, 공직 선거의 동일 득표자 처리,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임시 동일한 선수자 처리 등에서 한 살, 아니 단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우대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 원칙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지 않는가.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지금도 사회질서의 한 축인 것이다.

유교 정치는 한 마디로 모럴폴리틱(moralpolitik)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김상준, 2011). 유자(者)들의 자아실현은, 자아 수양에서 시작되며 국가 경영에의 참여를 통해서 완성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下)가 바로 자아실현의 요체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유자들은 성왕(王)의 이념을 가지고 때로는 왕권을 강화, 수호하고 때로는 반대로 왕권을 견제, 견인한다. 물론 유자들은 신민들에 대해서도 유교적 질서의 지킴이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 투쟁에서 유자들은 칼과 화살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와 논리”를 핵심 무기로 사용했다(김상준, 2011: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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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으로 표현하면, 학문을 하는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학문의 목표는 지상에 ‘바른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고 지식인이라면 필히 ‘바른 세상’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지식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 특히 정치적 실천이 으뜸으로 강조된다.

물론 정치를 하기 전에 먼저 수신(身)과 제가(家)를 해야 한다. 왕에게 성인(人)이 되길 요구하듯이 유자들도 서로에게 도덕가(道德家)가 되기를 요구했다. 업무 수행의 유능함은 그 다음 문제였다. 아무리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흠결을 가지고 있으면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우리의 정치가 유교적 모럴폴리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다음 몇 가지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첫째,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들은 대부분 임기 후반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도덕적 비판에 직면했고 그중 몇 사람은 그로 인해 고통스런 말년을 보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그들이 어떻게 한결같이 유사한 운명에 처했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둘째, 2000년 도입된 고위공직자의 인사청문회는 후보자의 직무적합성이나 능력에 대한 검증은 뒷전이고 도덕적 검증에서 시작해서 도덕적 검증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덕적 검증에 집착했다. 후보자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도덕적 흠결을 문제 삼아 결국 후보자를 낙마시키고 그를 임명한 대통령과 집권당에게 도덕적으로 흠집을 냈다. 한 마디로 인사청문회는 여야 그리고 언론이 참여하는 도덕정치, 도덕 투쟁이 장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은 해당 직책에 가장 적합하고 유능한 인물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흠이 가장 작은 인물을 장관에 임명해야 할 정도였다.

셋째, 1990년 대까지도 학생 운동이 정치사회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3.1 운동 때부터 계산해도 적어도 70여년 동안 우리 나라 정치의 한 축을 학생들이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 운동, 광주학생운동,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해방 이후 좌우대립, 한국전쟁 때의 학도군, 4.19, 한일회담 반대 데모, 3선 개헌 반대 데모, 유신체제 반대운동, 광주민주학쟁, 6월 민주화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순간에는 항상 학생 세력이 있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지식인이 지닌 실천적 특성을 무엇보다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넷째,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가 무척 활발하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 지식인들은 사회적 불이익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물학적 생명까지 바치면서 정권 비판에 앞장 섰다. 대학교수들의 정치 참여–그것이 집권 세력을 위해서든 비판 세력을 위해서든–는 ‘폴리페서’라는 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활발하다.

조선 시대 이래 모럴폴리틱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전통(혹은 구조)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역사적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울 때, 통치자가 사리사욕과 부정부패에 빠졌을 때 지식인들은 어김없이 하나의 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아마도 그 덕분에 오랜 세월 하나의 민족으로서 살아남았고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으며 민주화와 산업화를 성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자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을 이어가는 지식인들의 지나친 관념적, 도덕적 집착은 조선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지금 다시 우리 정치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 우리 정치는 지금, 민주화와 개혁이 명분과 구호, 그리고 형식에 머무르고, 국가 부분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자율적이 됨으로써 과잉국가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 국가를 책임있게 경영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정치 권력만 향유하는 사회적 잉여가 되고 있다. 대통령과 집권당은 정책의 성공적 집행과 정부의 효율적 운영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파 정권은 힘과 공포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고, 좌파 정권은 대의(大義)와 국민의 지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찌기 마키아벨리가 지적했듯이 군주가 당위성, 사명감, 선의, 스타일 등으로 위업을 이룰 수는 없다. 특히 유교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트 관료를 장악하고 그들을 국가 경영에 있어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능력이 필요하다. 집권하는 능력과 국가를 경영하는 능력이 다르다는 말이다.

관료를 장악하고 그들을 적극적인 동반자로 만들지 못하는 정권은 집권 초기를 지나면서 점차 관료의 포로로 전락한다. 이 법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모럴폴리틱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우리 사회는 관료국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관료 국가는 모험 회피적이고 잉여적이며, 통제적이다. 관료는 끝없이 조직을 확대재생산하고 규제를 양산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더구나 놀랍게도 그들은 정치적 대의나 의지를 삼킬 수 있는 엄청난 수단과 능력을 갖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다.

비도덕적 정치가 도덕이라는 명분과 위선의 늪에 빠져 있는 동안 무도덕적 관료는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서 나라를 끌고 간다. 개인적으로 그들은 ‘대과없이’ 임기를 마치면 되고 집단적으로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하면 된다. 그리고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는 늘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그 뿐이다.

모럴폴리틱은 우리의 정치를 청와대 문 앞에서 멈추게 한다. 국가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영향이 대통령이 머무르는 청와대를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선임자들보다 착하기는 하지만 역시 실패한 대통령을 다시 한번 보게될 것 같다는 우려가 드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2018-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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