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펜, 그리고 글

너무 오래 컴퓨터로 글을 쓰다보니 손글을 잃어버렸다.  그 변화는 단지 필기구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깊이 생각한 후에 글을 썼다. 평소에 메모는 해두었지만 그것을 엮어서 글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더 이상 크게 손질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생각이 잘 정리된 후에 원고지나 노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드로 글을 쓰면서부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비로소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긴 편집 시간을 갖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머지않아 커리어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최근 문득 문득 다시 손으로 글을 쓰고싶다는 충동이 일곤 했다. 그러다 엊그제는 맘을 크게 먹고 수성펜 세 자루를 샀다.

그런데, 어제 우연치고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래 전 석사 학위 지도 학생이었던 제자로부터 몽블랑 펜을 선물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25년이 넘는 커리어에서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기품있는 필기구였다.

과연 과분한 선물을 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그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 전부터 내게 만년필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그에게 차마 돌려준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약속했다. 앞으로 그 펜으로 글을 쓰겠노라고.

행복한 우연이다. (윤영민, 2018-05-24)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