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회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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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니아꽃

사피니아를 심었다. 새로운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폴리스(polis, 도시국가)에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폴리스를 통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사회적(혹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에 꽃을 심는 나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더 크게 공감한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내게 왜 푸른산에 사느냐 물으니)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미소로 답하고 한가로움을 즐기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이 강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과는 다른 천지 아닌가)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자연과 일체가 된 이백은 인간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찌질한 사람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백의 심정이 이해 된다.

인간이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기보다 관계적 존재이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끝없이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대체로 그 대상이 사람이지만 사실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꽃일수도 나무일 수도 있고, 고양이나 개일수도 있으며, 책이나 펜일수도 있고, 스마트폰이나 PC일수도 있다. 앞으로는 그것이 로봇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관계이든 상호 요구가 존재한다. 그 요구는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단순한 기대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요구에 응답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상호 요구와 응답은 부담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는 웃사람의 요구와 아랫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배우자, 자식, 부모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우리와의 관계 속에 들어온 비인간적(non-human) 존재도 요구(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곤 하지만 사실 비인간적 존재의 요구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특정 존재가 지닌 관계의 비중이 커질수록 요구도 그만큼 증가한다.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베란다나 정원에서 가꾸는 화초, 나무, 채소, 심지어 돌까지도 각각 나름의 요구가 있다. 집안 곳곳에 비치한 장식품은 아니 그런가. 수시로 먼지를 털어내고 잘 닦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인간을 넘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사물까지 분석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actor-network)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무척 설득력 있게 보인다. 그 이론이 비인간 행위자 중 테크놀로지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백처럼 깊은 산속에서 산다고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관계가 더욱 뚜렷해진다. 꽃, 나무, 돌, 풀, 이끼, 벌레, 해, 달, 별, 비, 심지어 바람과도 예사롭지 않는 관계 속에 들어간다.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진다고 삶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

죽음 이후에 맺게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하련다. 살면서 맺게 되는 관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충분히 괴롭고, 충분히 즐겁고, 충분히 부담스럽고,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는가.

정원에 피는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그것은 인연이다.

글쓴이: 만리거사

한양대학교 ERICA 캠퍼스 정보사회학과의 윤영민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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