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때때로 시를 찾는 이유

다쳐서 병원에 누운 아들에게 릴케를 가져다 주었다. 왜 시를 읽어야 하냐면서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나는 왜 시를 읽는걸까.

꽃을 심고선 아니 필까 걱정하고

꽃이 피면 질까 걱정하네

꽃이 피는 것도 꽃이 지는 것도 모두 걱정을 만드니

꽃 심는 재미를 모르겠구나. (<고려한시 3백수>, 154쪽)

꽃을 가꾸던 이규보(1168-1241)의 심정이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 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9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한 목소리가 전해질 수 있겠는가.

 개울은 나직이 노래를 하고

먼지와 도시는 먼 곳에 있다.

우듬지는 여기저기 눈짓을 하여

나를 지치게 한다.

숲은 깊고 세상은 멀다.

나의 마음은 맑고도 크다.

창백한 고독이 그의 무릎에

나의 머리를 포근히 눞혀 준다. (<릴케시집>)

“개울은 나직이 노래를 하고 먼지와 도시는 먼 곳에 있다….창백한 고독이 그의 무릎에 나의 머리를 포근히 눞혀 준다.” 개울을 바라보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한 심정이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을까. 시가 아니라면 오래 전 먼 독일에 살았던 시인과 이렇게 공명할 수 있겠는가.

이규보와 릴케가 지닌 언어와 정서의 구조가 나의 것과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시에 공감하는데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짜릿함을 즐기는데 그 정도의 댓가야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는 마음을 울리는 노래이다. 귀를 울리지 않는 대신에 천년을 넘나들 수 있다. 그 정도면 가까이 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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