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수확

텃밭의 고구마를 수확했다. 봄에 2천원어치 모종을 사다가 심어 여름 내내 줄기를 따서 먹고 가을이 되어 두 버킷이나 되는 뿌리를 선물로 받았다. 이웃이 가져다 준 것들까지 합하면 한 겨울 먹을 만큼의 양이다.

고구마를 온전히 캐기가 쉽지 않다. 특히 수직으로 깊이 박혀 있는 것은 끝까지 조심스럽게 파주지 않으면 끝이 부러져 버린다. 끝이 잘린다고 먹는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아쉬운 생각이 든다. 그래도 고구마 캐는 기술이 늘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서두르지 않고 꼼꼼이 작업을 해서 그런 건지 작년에 비하면 온전한 것들이 훨씬 많다.

옆에서 함께 작업하던 아내가 무척 좋아한다. 물론 나도 충만된 기분이다. 금액으로 따지면 몇 천원 어치에 불과하지만 우리 스스로 키웠다는 사실 때문일 게다. 10여 년 전에 처음 고구마를 심었을 때는 완전히 실패했다.

세종 때인가 고구마를 대마도에서 처음 들여와 재배를 시작했는데 아마도 나처럼 실패했었던 같다. 임금께서 대마도주에게 고구마 재배 전문가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키우기 쉬운 작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작년에 비해 고구마 알이 굵다. 둔덕을 크게 만들었기 때문인가. 이웃이 충고를 해줘서 금년에는 둔덕을 큼지막하게 만들었다. 뿌리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충분해야 한다는 이웃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친정에 갔던 아내가 열흘만에 돌아왔다. 더 머물 것이라 예상했는데 갑자기 돌아온 것이었다. 정읍역까지 마중을 나갔다. 100일만에 본 것처럼 반가웠다.

아내가 오니 집에 활기가 넘친다. 혼자 있어도 그래야 하는데. 아무래도 아직은 혼자보다 둘이 있는 게 나은가보다. (2020-10-23)

Solitude의 우리 말 역어는?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어휘가 풍부한 언어로 간주된다.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영어 표현이 별로 없지만, 영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한글 표현은 엄청 많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유독 ‘혼자 있음’에 대한 우리말 어휘는 상대적으로 매우 빈곤하다. 혼자 있음은 그냥 단순히 홀로 있는 객관적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혼자 있어 외롭고 쓸쓸하다는 심리 상태까지 포함할 수도 있으며, 그와 반대로 혼자 있어서 편안하고 즐겁다는 심리 상태까지 나타낼 수도 있다. 영어로 isolation, lonliness, solitude라는 표현이 그 상황들에 각각 대응한다. 그렇다면 우리 말로는 그에 상응하는 표현이 무엇일까? 고립, 고독, ??? 세 번째 solitude에 해당되는 우리 말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과문한 탓인가?

나는 그것이 내 어휘 부족 탓이라기보다 혼자 있음에 관한 우리 말 표현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독을 즐긴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 말은 사실 형용 모순이다. 고독이라는 어휘가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서를 담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즐긴단 말인가. 고독을 즐긴다는 말은 번거로운 사람관계에서 벗어나 혼자 있음으로서 느끼게 되는 한적함과 평안함을 즐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나 우리 사회에 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 그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적극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삶을 배격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혼자 있음에 관한 표현의 빈곤은 바로 그런 사회적 배경 때문이 아닐까?

그야말로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요즘같은 세상에 작가와 인문학자들은 혼자 있음에 대한 다양한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들을 발굴해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고독사’라는 표현이 맘에 들지 않는다. 혼자 살다 죽는 것이 모두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죽음을 보는 사람들이, 기자들이 그렇게 감정이입하고 있을 뿐이리라. 고독사 대신  ‘고립 사망’ 혹은 ‘독사(死)‘, 아니면 그냥 ‘혼자 죽음’ 따위의 보다 중립적인 어휘로 바꿀 수는 없을까? 물론 그래봐야 혼자 있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선입견 혹은 편견이 지워지지 않겠지만 혼자 살다 혼자 죽는 현상에 대해 적극적은 아닐지라도 최대한 중립적으로 대해주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다고 반드시 외롭고 쓸쓸하지 않다. 반대로 혼자 있어서 자유롭고 심지어 행복한 사람도 적지 않다. 제발 우리 사회가 그들의 삶을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생동안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학자라는 직업이 그러하고, 전원 생활이 그러하다. 30년이 넘는 직업 생활, 10년이 넘는 전원 생활이 모두 결혼 상태에서 보낸 세월이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아이들은 일찍 집을 떠났으며, 직장이 먼 탓에 아내와 별도로 살림을 한 세월도 제법 길었다.

혼자 있음을 즐기지 못하면 좋은 학자가 되기 어렵다. 깊이 있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고립은 필수적이다. 연구실 혹은 서재에서 홀로 긴 시간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 학자에 적합하다.

혼자 있다고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미하일 바흐찐의 주장처럼 인간은 대화하는 존재이다. 사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자주 대화한다. 자신 자신과도 대화하고, 인터넷이나 전화, 그리고 책이나 논문을 통해서 다른 연구자들과 소통하고, 이웃이나 친구와도 대화하고, 자연과도 소통한다.

학자는 그냥 적극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그것이 직업 생활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적극적 고립을 어떤 어휘로 묘사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오늘 아침 내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2020-10-19)

시내 병원에 가는 날

특별히 건강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늙은이는 병원에 자주 간다. 나도 한 달에 한 두번은 병원에 가야한다. 한 달에 한번은 읍내에 있는 내과에 들려 몇 가지 질환에 대해 진찰을 받고 약을 타야하며, 한 달에 한 두번은 멀리 광주 시내에 있는 병원들에 가서 주기적으로 진찰을 받고 약을 받아야 한다.

읍내에 가든 광주에 가든 병원 가는 날은 나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함께 처리한다. 가급적 읍내나 시내에 가는 횟수를 줄일려고 노력하다보니 중요한 외출을 중심으로 일을 묶어서 하는 것이다.

오늘은 광주 시내의 병원에 가는 날이다. 한 40km 정도를 가야하기 때문에 비교적 큰 외출에 속한다. 내 일상은 통상 반경 30km를 넘지 않는다.

큰 외출에는 약간의 기대나 궁금함 심지어 설레임도 있다. 의사 선생이 내 병에 대해 무어라고 언급할까 하는 궁금함, 병을 잘 관리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그리고 대도시에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설레임도 있다. 큰 외출이라고 해야 고작 서너 시간에 불과하지만 시골 거주자에게는 생활에 약간의 변화를 줄 수 있는 순간이다.

은퇴 후 시골 생활이 재직시의 도시 생활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아마도 쇼핑이 사라졌다는 점일 것이다. 대부분의 일상 용품은 인터넷으로 구매하고 옷가지 정도나 시내에 나가 골라야 하는데 옷을 사지 않으니 시내에서 쇼핑할 일이 거의 없다. 직장에 출근하지 않으니 아내도 나도 옷을 구입하지 않는다. 옷장에 걸려있는 외출복들을 충분히 입고나서 여생을 마칠 수 있을 지가 오히려 고민이라면 고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시내 병원에 가는 날은 내게(아마도 식구들에게도) 즐거운 날이다.

“여보, 우리 라이프 스타일을 미니멀리즘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라고 내가 묻자 아내가 머리를 젓는다.

아냬: “에고, 무슨 미니멀리즘…편리한 것 좋아하고, 이렇게 가진 게 많은데…”

나: “맞아. 그래도 의식주 중 ‘의’와 ‘식’은 그렇게 봐도 되지 않을까….”

아내: “그래요. 뭐, 그 정도는.” (2020-10-16)

은퇴자의 시간

지금 아내와 내게 가장 소중한 자산은 시간이다. 신께서 우리에게 허용하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 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나날이 남은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직에 있을 때만 바쁜 줄 알았는데 은퇴자에게도 고정 지출 시간이 크게 줄 지 않는다. 여전히 하루에 적어도 3분의 1은 수면, 식사, 세면 등 재생산을 위한 기초활동에 나간다. 또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일 하루에 30분은 아내와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보낸다. 그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커피마실 때 마음이 여유로울 뿐이다. 적어도 한 달에 두 번 병원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친구나 이웃과 보내는 시간도 주당 5시간 정도로 거의 비슷하다. 매일 1시간 정도의 산책 시간도 고정이다. 이전 보다 좀 더 여유롭게 하늘, 구름, 해, 달, 별, 논, 밭, 숲 따위를 바라보고 느낄 뿐이다. 학자로서 생활하는데 보내는 시간도 여전하지만 많이 줄어들었다. 하루에 4시간 정도를 넘지 않는 것 같다.

달라진 점은 무엇보다 매일 1시간 남짓을 가드닝에 쓴다는 것이다. 한 겨울을 빼고는 매일 정원에 있는 잔디, 꽃, 나무를 보살피려 하고 있다. 심신의 건강에 아주 좋은 것 같다.

당분간은 주중에 하루 세 시간 정도 산행에 시간을 보낼 것이다. 등산 스틱이 무릎 통증의 예방에 도움이 되길 바랄 뿐이다.

은퇴 후에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거나 뉴스를 읽는데 보내는 시간도 많이 늘었다. 하루에 2-3시간은 거기에 쓰는 것 같다.

그 밖에 한 달에 한번은 여행을 간다. 팬데믹 때문에 멀리는 못가지만 시간상으로 최소한 하루 정도 걸리는 여행은 한다.

공부하고 글쓰는 학자로서의 시간이 현직에 있을 때는 대부분 생업에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봉사에 사용된다. 약간의 시간만 재정 수입을 위한 강의에 사용될 뿐이다. 이점은 적지 않은 변화이다.

다음 주부터는 아내와 함께 점토 공예를 시작하기로 했으니 하루에 1-2시간은 거기에 쓸 것이다. 오늘 작업 공간을 준비했으니 점토와 도구만 오면 바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살펴보니 은퇴자의 생활이 시간상으로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 실제 하루가 참 빨리 지나가고 일주일, 한 달, 심지어 1년도 금세 지나가는 것 같다. 지구 여행 자체도 그렇게 잠깐일 것이다. (2020-10-10).

산행

우리나라에서 은퇴자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일상은 아마도 산행일 것이다. 아내와 나도 산행 대열에 나섰다.

집에서 승용차로 10분만 가면 축령산 입구이다. 우리가 현재의 거주지로 이사 온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축령산의 접근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 온 지 8년 동안 축령산에 오른 것은 1년에 한 번 정도였다.

10여 년 전 오른쪽 다리의 연골이 닳아서 등산을 멈춘 후 산을 좀 멀리했다. 하지만 이제 서두르거나 무리할 필요가 없는데 등산을 다니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일주일에 몇 번은 2-3시간씩 축령산을 걸으면 어떨까요?”

그제 아침 커피를 마시며 아내에게 제안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은퇴 후 등산을 처음 시작했다.

아내가 너무 좋아했다. 물론 나도 좋았다. 주변 경치를 실컷 느끼며 걸었다. 세상사에 쫓기지 않으면서 산행을 다니는 맛이 이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울창한 편백 숲에 난 호젓한 임도가 홀연히 우리를 영화 속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렇게 좋은 산과 숲을 지근거리에 두고 있는데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어제는 조금 늦은시간에 축령산에 올랐다. 사람들이 그제보다 더 없었다. 사람들을 마주칠 때마다 마스크를 써야 해서 여간 불편하지 않았는데 다행이었다.

어제는 숲속  평상에 누웠다. 함께 간 둘째가 평상에 누워보고 싶다고 했다. 50여 미터는 실히 될 나무들이 하늘로 쭉쭉 뻗어 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오후에 3 시간을 산행에 쓰니 아내도 나도 갑자기 바빠졌다. 그래도 산행은 그럴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지 싶다. 산행이 무엇보다 내가 매일 복용하는 약의 양을 줄여주었으면 좋겠다.

첫날 산을 내려오다가 아내가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불편해 했다. 그래서 당장에 등산 스틱을 주문하고 어제는 임시 스틱을 쓰게 했다. 아내가 훨씬 편안해 했다. 등산 스틱이 배달되면 다음 주부터는 아내도 나도 좀 더 편안하게 산을 내려올 수 있을 것이다. (2020-10-09)

삶에서 음식이란?

우리 집은 먹기 위해서 산다고 말할 정도로 먹는 것에 목숨을 걸지는 않지만 그래도 음식과 식사를 참으로 중시한다. 나의 부모님이 그랬고, 아내와 내가 그랬으며, 내 아이들이 그렇다. 아니 부모님보다는 내가, 나보다는 아이들이 더 그런 것 같다. 대충 먹는 경우가 흔치 않다.

요즘 나는 가급적 이러한 집안의 전통을 지켜가려고 노력한다. 식사 준비와 마무리가 주부와 같은 누군가만의 고통이 되지 않는 한 나는 그러한 전통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의식주 중에서도 특히 ‘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 사는 것이 부유하게 살거나 권력을 누리며 사는 것이 아니듯이 잘 먹는 것은 화려하고 값비싼 음식을 섭취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잘 먹으려면 몇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음식에 좋은 식자재를 사용해야 하고, 식단이 건강상의 요구에 잘 맞아야 하며 물론 음식의 맛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음식은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공간에서, 적절한 양을, 적절한 예법을 갖추고 먹어야 한다.

일생을 살아오면서 때로는 너무 가난해서 굶거나 겨우 허기를 면하면서 지내기도 했고, 때로는 너무 바빠서 식사를 소홀히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잘 먹으며 지내려 노력하고 있다.

다행히 시골에서 지내다보니 잘 먹고 지내기가 어렵지 않다. 계절에 맞는 좋은 식재료를 저렴하게 혹은 거의 돈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으며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다.

반찬 가짓수도 적고 식사 양도 많지 않지만 꼼꼼하게 준비된 음식을 프로토콜에 맞추어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수 있으면 행복하다. 게다가 식후에 커피나 차를 정성스럽게 끓여서 디저트와 함께 먹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이러한 일상을 얻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일하며 일생을 보내는 것이 아닌가.

때로는 우리가 삶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 건 지, 무엇이 중요한 지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쩌면 일상의 작은 행복, 그것이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갖고자 했고, 가지려고 하고, 또 가졌으면 하고 소망하는 것이 아닐까. 음식과 식사는 바로 그 일상을 채우는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2020-10-05)

남천(南天) 예찬

8년 전 칠십 그루를 정원에 이식한 후 아내와 나는 남천 사랑에 빠졌다. 그 후 이백오십 그루를 더 이식해 지금은 3백 그루가 넘는 남천이 집의 3면에 걸쳐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다. 나는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남천을 살핀다. 혹시 병충해를 입지나 않는지, 강한 비바람에 꺾이지나 않는지, 잘 자랄 수 있는 공간은 충분한 지 등에 대해 신경을 쓰고 , 너무 키가 큰 나무는 지지대를 세워서 서 있는 힘을 보강해준다. 눈이나 비가 많이 오면 가지들이 위태롭게 숙여지곤 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식한 남천 중 죽은 나무가 거의 없다. 내가 잘 보살폈기 때문이기보다 근본적으로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추위에 약하다는데 아직 얼어죽은 경우는 없다.

남천의 영어 속칭이 sacred bamboo 혹은 heavenly  bamboo라고 한다. 정말로 천국 나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식물이다. 가을에는 단풍처럼 붉은 잎이 많고 겨울에는 지탱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붉은 빛 열매를 매달고 있다. 남천의 잎이 무슨 색인지는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같은 계절에도 나무들이 다양한 색을 보여준다. 초록은 기본이고 적색, 황색, 갈색, 연초록….나무마다 참으로 다양하다.  나란히 서 있음에도 잎색깔만 보면 전혀 다른 나무들처럼 보일 정도이다.

집의 뒷쪽 울타리에는 아직 남천을 심지 않았지만, 언젠가 뒤 울타리를 정비할 때 앞쪽처럼 남천을 심게 될 것이다. 아내와 내가 공통적으로 이렇게 오랫동안 좋아하는 나무가 드물기 때문이다. (2020-10-05)

은목서 향기와 좋은 집

내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내음 중 하나는 은목서의 꽃향기이다. 그것은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묘한 매력이 넘치는 향기이다.

현관 주위 적어도 십여 미터 이상은 은목서 향기로 가득하다. 바람 방향에 따라서는 몇 십터 밖에서도 그 향기를 느낄 수 있다.

은목서의 꽃은 보일락말락할 정도로 조그맣다. 그 작은 꽃들이 수백 수천 합쳐져서 신비로운 향기를 내뿜는 것이다.

8여 년 전 현관 곁 삼보정(팔각정) 앞에 심은 나무가 무척 자랐다. 해마다 20cm 이상 자라는 것 같다.  역시 집이라는 작품은 세월이라는 마스터에 의해 완성되는 모양이다.

“여기는 마치 내 몸에 꼭 맡는 옷을 입은 것 같아요. 안채의 안방은 항상 좀 쌀쌀하다고 느꼈는데 이 곳은 항상 따뜻해요. 실내 희망 온도를 20도로 맞춰 놓았는데, 실내 공기가 밤에도 27도에요. 너무 신기해요.”

사랑채에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아내가 감사하다는 눈빛으로 말했다. 이렇게까지 단열이 잘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작년에 아내 침실 앞에 유리 온실을 붙였고, 금년 봄에 지붕 단열을 보강하였으며, 욕실을 북쪽 벽 전면으로 확장하고 방바닥을 코르크재로 바꾼 효과를 단단히 보는 것 같다. 큰 창을 통해 햇빛이 들어오면서도 방이 외부와 직접 닿는 면을 없앤 때문인가.

사랑채의 거실 겸 주방은 바닥 공사를 완전히 새로 했다. 10cm 두께의 강화 스치로폼으로 바닥 단열을 하고 그위에 엑셀 파이프를 설치한 다음 마감을 하고 그 위에 5mm 짜리 친환경 장판을 깔았다. 보일러를 전혀 돌리지 않는데도 쾌적하다. 안채에서는 늘 실내화를 신었던 아내가 사랑채에서는 맨발로 지내면서 너무 좋아한다.

오랫동안 아내는 손발이 차가워서인지 추운 걸 싫어했었는데, 더구나 금년 봄 암 수술을 받은 이후에는 더욱 더 따뜻한 환경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랑채에서의 생활이 그렇게 좋은 모양이다. 물론 본인의 독립적인 공간을 갖게 되었다는 점도 한 몫 하겠지만.

좋은 집이라는 무엇인가?

그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집이 공통적으로 몇 가지 기본적인 조건은 갖춰져야 하겠지만 사람마다 좋아하는 집이 다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굳이 한다면 좋은 집이란 집 주인의 선호에 꼭 맞는 집이다.

그런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 주인의 선호가 변하기도 한다. 단독주택이 좋은 점은 집주인의 바뀌는 선호나 니즈에 맞추어 집을 변화시켜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집도 지난 8년 동안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큰 틀은 바뀌지 않았지만 세부적인 모습은 참으로 많이 달라졌다. 8년 만에 방문한 사람이 크게 놀랄 정도로 변했다. 8년 후에는 또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하기야 노부부가 아침에 정성스럽게 끓인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는 담소를 나눌 수 있다면, 집이 어떤 모습이면 어떠하랴. 행복은 무엇보다 마음에 달려 있는 것을. (2020-10-03)

온실 채소가 나오다

온실 화분에서 웃자란 열무순을 솎아서 아침 샐러드에 올렸다. 한 열흘 전에 씨앗을 뿌린 채소들이 싹이 나온 것이다. 맛은 모르겠지만 느낌은 좋았다.

오늘은 잔디를 깎았다. 어쩌면 금년 마지막 잔디깎이일지도 모르겠다. 날이 시원해지면서 잔디 자람이 눈에 띄게 더디어졌다.

내년에는 힘이 좀 덜 들게 잔디를 관리하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한 해 한 해 지나면서 힘든 일을 피하려고 자꾸 요령을 부리게 된다. 늙어가기 때문이리라. (2020-10-02)

이발기를 소환하다

이발기 셋

어제는 아내에게 머리 손질을 맡겼다. 25년만인 것 같다.

1986년 가을 어느날 캠퍼스에서 마주친 동료 유학생이 내 머리를 보고 경악했다. 이용 경험이 전혀 없는 아내가 가위만으로 머리카락을 잘라 놓았으니 내 머리 모양이 기겁을 할만도 했다. 결국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고쳤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아내의 머리깎기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와서까지 한참 계속되었다.

그런데 아내에게 다시 이발기를 들도록 요청한 것이다. 읍내에서 몇 군데 이발소를 가보았지만 하나도 맘에 들지 않았다. 어떤 이발사는 면도를 얼마나 거칠게 하던지 이발하고 한 사흘 동안 얼굴이 아팠고, 어떤 이발사는 머리를 발로 자른 것처럼 엉망으로 만들어 놓았으며, 어떤 이발사는 이발하면서 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도 7-8년 동안 그들에게서 머리를 깎았으니 나름 오래 참았다.

어제 깎고 보니 아내의 솜씨가 녹슬지 않았다. 더구나 아내는 내 머리를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 주지 않는가. 제대로 대접받은 느낌이다. 다만 노안 때문에 머리카락 겨누기를 쉽지 않아 하는 아내에게 미안했을 뿐이다.

내가 평생 품고 살아온 생각 중 하나는 지식인에게 검박(朴) 보다 더 큰 힘은 없다는 것이다. 지식인의 역할은 발언이다. 소신을 밝혀서 세상이 바르게 가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인의 혀가 꼬이면 더 이상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다.

지식인의 혀를 비트는 유혹이 많다. 돈, 권력, 출세, 허영, 물욕, 편안함, 게으름 등 생활을 느슨하게 만드는 모든 것은 지식인을 부패하게 만드는 유혹이다.

20대부터 나는 지식인을 지향하며 살아왔다. 항상 원칙에 충실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탈을 하더라도 오래지 않아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검박한 생활의 핵심은 무엇보다 주어진 수입에 감사하며 그 범위 내에서 살아가는 자세이다. 생활이 방만해지면 추가적인 소득을 필요로 하게 된다. 추가적인 소득을 갈망하면, 남의 눈치를 보고, 적당히 타협하고, 더 나아가 아부하고, 투기하고, 심지어 부정까지 저지르게 된다.

오랜만에 아내에게 머리를 맡기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좀 더 바르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지출이 줄고 정신도 맑아지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2020-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