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아직 믿기지 않는다.

일생동안 내가 또래 중 유일하게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몇 번 회의를 같이 했을 뿐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황무지였던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에서 세운 업적은 실로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풍부한 아이디어, 탁월한 업무 추진력, 그리고 높은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서울 시장을 출마하며 정계에 뛰어 들었을 때, 그의 결정이 다소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능력이 서울시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 시장은 충분히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앞장 서서 타파하려 했던 잘못된 사회 관행에 그 자신이 빠져버렸던 모양이다. 너무 안타깝다. 피해자가 있다면 그에게 위로를 보내고, 세상을 등진 박 시장에게도 애도를 표한다.

오늘 오래 오래 기억될 인물 중 한 명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2020-07-10)

귀촌단상(3): 소독

어제 늦은 오후 누군가가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에 소독약을 뿌리고 있었다. 길에 나가보니 비닐 하우스를 하는 영관씨였다. 이장이 소독약과 기름을 타면 그것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분무기에 넣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뿌리는 것이었다.

여름날 저녁 무렵에는 하루살이에 모기까지 가세하여 온갖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곤 한다. 그것을 잠재우는데 소독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 약을 뿌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여름이 되면 마을 일에 헌신적인 몇몇 이웃들이 늘 그 일을 맡아 해준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이장은 면사무소에 가서 소독약과 기름을 받아오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차나 오토바이에 분문기를 매달고 다니면서 약을 분사한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이다. 주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해야할 일들이 적지 않다. 눈치우기, 방재, 모정(시정) 수리, 당산나무 낙엽 치우기 등등. 전원에 살려면 그런 역할을 기꺼이 떠맡아서 해야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치껏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

자기 집에만 쏙쏙 들락거리면 결국 외톨이가 된다. 외톨이로는 전원에서의 생존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생존력을 높이려면 이웃들과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협력이 어느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쌓아둔 정과 친분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웃들과 마을 일을 함께 하고 나서 막걸리 한 잔을 하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것은 생존을 넘어서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2020-07-09)

귀촌 단상(1)

주위 사람들은 내가 귀촌한 지 얼마 안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은 제법 되었는데도 말이다.

경기도 분당 도심에 살다 건강 악화로 이천시 마장면으로 이사한 게 2009년 1월이니 어언 12년 6개월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전남 장성으로 이사온 지도 벌써 만 8년이 되었다.

6년 동안은 이천과 장성에 두 곳에 집을 갖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부담스럽고 집 관리도 너무 힘들어 2년 전에 이천 집을 팔았다. 자식들을 생각해서 서울 근교에 집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한 가장 잘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집앞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이 정도의 집을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가이다. 궁금해 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답하기 참 난감한 질문이다. 땅값을 넣느냐, 정원을 단장하는 비용을 넣어야 하는지, 보수하고 개축하면서 들어간 비용도 넣어야 하는지, 게다가 밖으로 보이는 비용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인테리어 비용인데, 그것을 어디까지 포함해야 하는지….조건에 따라 그야말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물론이고, 우리 가족 모두가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마을을 좋아한다. 사실 그러기 쉽지 않다. 가족 구성원들의 니즈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하다. 은퇴 후 살 곳을 고르는 일을 결코 서둘러서는 안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집요하게 발품을 팔아야 한다. 몇 해가 걸릴 수도 있다. 그 사이 땅값이 치솟을 수도 있고, 인건비나 자재값이 오를 수도 있다. 그래도 서두르면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에게 잘 맞는 마을이나 동네가 어떤 곳인지, 병원, 마켓, 식당 등의 편의시설에의 접근성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지, 친한 친구들과 지낼 수 있는 거리에 있는지, 형제나 자식들과는 교류하기 쉬운 위치인지 등부터 시작해서 주위에 환경을 오염시킬 시설은 없는지, 이웃들이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은 아닌지 등등 정말로 따져봐야 할 요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조건들을 따지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자기 자신과 배우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냉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좀 변하면 되지, 아내가 좀 변하면 되지,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면 되지….그런 가정은 세우지 않는 게 현명하다. 60살이 넘으면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 자기가 환경에 적응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맞는 환경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모습의 집에 사는가는 그런 점들을 모두 고려한 후에 즐겁게 할 수 있는 결정이다. 집은 형편에 맞추어 마련하면 된다.

귀촌에 대한 모범답안은 없는 듯하다. (2020-07-02)

생애 가장 보람있는 공사

12월에 시작한 차고 리모델링 공사가 사랑채 리모델링 공사로 확대되어 6월에야 끝이 났다. 작년 2월에는 지붕에 기와를 얹고, 벽채를 스타코플렉스 리뉴로 다시 칠했으며, 미니 온실을 설치했고, 큰 방의 벽에 모두 편백 루바를 붙였다. 그러니 사랑채 리모델링의 2단계 작업이었던 셈이다.

작년 2월에 리모델링을 마친 후의 모습이다. 잔디까지 새로 깔았다.

퇴직 후 승용차를 한 대로 줄여서 차고가 불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작업실로 사용했다.

이번에는 작업실을 거실과 주방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차고 입구의 자동셧타를 제거하고 벽채를 만들었다. 동네의 최상순 사장이 도와줘서 벽채를 만들 수 있었다. 큼지막한 3중 창호를 달고 유럽식 문을 달았다.

새로 만든 벽채에 스타코플렉스를 바르고, 문 위에는 고정 차양을, 창문 위에는 접이식 어닝을 부착했다. 그렇게 하면 집에 들어가면서 우산을 접을 때 비를 피할 수 있고,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지 않을 것이다.

중문을 설치할까말까 고민하다 결국 설치했다. 하기를 백번 잘 했다는 생각이다. 아내가 바닥 타일을 잘 골랐다. 현관 벽과 천장에 편백 루바를 붙였더니 현관에 들어서면 마치 숲에 들어가는 것처럼 기분이 상쾌하다.

이번 차고 리모델링의 백미는 window bed이다. 슈퍼싱글 베드에 맞추어 길이와 폭을 설계했다. 식구 모두 윈도우베드에서 쉬는 걸 좋아한다. 특히 둘째는 갑상선 수술 후 저기에서 쉬기도 하고 자기도 하며 요양하고 있다. 너무 좋단다.

차고의 북쪽 벽에 설치된 가스보일러 두 대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다 유리문으로 칸막이를 설치하고, 냉장고와 세탁기가 들어가는 다용도실을 만들었다. 혹시라도 거실에서 잠을 잘 경우 보일러 소리, 냉장고 소리, 냉장고 불빛 등이 숙면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공사는 대성공이었다. 보일러실의 팬이 24시간 돌아가지만, 보일러가 돌아가도 유리문들을 닫으면 소리도 불빛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이곳에서도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주방과 식탁을 설치했다. 식탁은 책상으로도 쓸 수 있도록 큼직한 것으로 구비했다.

거실 바닥은 원래 차고 바닥 위에 10cm 두께의 강화스티로폼을 깔아 바닥 단열을 확실히 하고, 그 위에 보일러 엑셀 파이프를 깔았다. 바닥 마무리는 5mm 두께의 친환경 LG 장판으로 했다.

4월에 아내가 대장암 수술을 한 후에는 마음이 바뀌어 공사를 대폭 확장해서 사랑채 전체를 아내가 편안하게 요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신시켰다.

천장 단열을 철저히 보강하고, 작은 방 화장실과 큰 방 화장실을 완전히 뜯어서 바닥은 물론이고 벽채 방수를 모두 다시 했다. 큰 방 화장실과 작은 방 화장실 사이의 벽은 허물고 대신에 유리문을 설치해 왕래가 가능하게 했다. 작은 방은 아내가 사용하므로 화장실을 확장해서 이동식 욕조를 놓았다. 방은 15mm 두께의 코르크 바닥재를 깔고 벽과 천장은 모두 편백 루바를 붙였다.

공사는 대성공이다. 안채의 안방에서 수술 후 불면증에 시달리던 아내가 사랑채의 새 방에서는 잠을 아주 잘 잔다. 이보다 기쁜 일이 없다.

직영으로 공사를 하느라 몇 달 동안 고생을 좀 하기는 했지만, 결과가 좋아 보람이 있다. 에어컨을 설치는 했지만 아마도 여름 내 에어컨이 필요 없으리라 생각된다. 오는 겨울에 저비용으로 난방을 해낸다면 100점짜리 집이 될 것이다.

이제 사랑채가 아내가 지내는 공간이 되었으니 안채가 되고, 안채는 내가 쓰는 공간이니 사랑채가 되었다. 사랑채와 안채가 뒤바뀐 것이다.

4월에는 아내가 대장암 수술을 받고, 6월에는 둘째가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일찍 암이 발견되고 수술 경과도 좋다. 둘이 서로 위로 하면서 내가 만들어 준 공간에서 건강을 회복 중이다.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있는 공사를 한 것 같다. (2020-06-25)

‘교수’에서 ‘명예교수’가 되다

총장_이사장의 감사패, 집 아이들의 감사패, 학생들의 감사 인사

오늘(2020-03-01)자로 한양대학교 정보사회미디어학과의 명예교수에 임용되었다. 아마도 한양대에서 받는 마지막 인사 발령이리라.

우리 사회에서 명예교수는 여러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첫째, 더 이상 전임교원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전임교원이 갖는 모든 권한과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 신분이다. 한 마디로 퇴임 교원이다. 둘째, 적어도 20년 이상 교수직을 대과없이 수행하고 퇴임했다는 의미이다. 교수직을 수행했다고 모두가 명예교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셋째, 비정규직 교수라는 의미이다.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70세까지는 학교에서 강의를 주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 일하지 않으면 급여가 없다.

건강상의 이유로 정년보다 일찍 퇴임한 나는 남보다 이른 시기에 명예교수가 되었다. 이번 학기부터는 오프라인 강의는 하지 않고 온라인 강의만 한다. 현재의 건강 상태로 볼 때 만약 오프라인 강의를 지속했다면 교단에서 쓰러졌을 지도 모른다. 적시에 퇴직을 했다고 생각된다.

이로서 한양대로부터의 명예 퇴직 절차가 마무리되었다. 거의 내가 예상하고 원하던 대로 되었다. 무언가 ‘완성되었다’는 느낌이다. (2020-03-01)

신작로….떠남과 귀환의 길

강홍구 화백. 하동  대로변 풍경.

학교 연구실에 오랫동안 걸어두었던 친구 강홍구 화백의 사진 작품을 집 거실에 걸었다. 3미터가 넘는 벽에 거느라 땀을 뻘뻘 흘렸다. 사진 길이도 2미터 30센티 쯤이나 된다.

강홍구 화백 작품.

거실 중문을 열고 들어오면 정면에 바라보이는 자리이다. 거실 벽 상부에 거는 첫번째 작품이다. 그곳에는 일년 열두달 해가 비치지 않기 때문에 작품 걸기에 딱 좋은데, 너무 높아서 걸기가 쉽지 않은 게 함정이다. 그래도 강 화백의 작품은 비교적 가벼워서 아내와 함께 걸 수 있었다.

촌놈인 나에게 ‘신작로’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심지어 1960년대 신작로는 포장조차 되지 않았지만 내게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출구였다. 언젠가 신작로를 따라서 멀리 떠나리라 상상하곤 했는데 실제 60여년 가까이 세상을 떠돌았다.

지금은 마치 오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느낌이다. 이제 저 사진의 신작로는 떠남이 아니라 귀환으로 다가오고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 삶 자체가 여행인 것을. (2020-02-21)

작별의 꽃

김종량 이사장이 란을 보내주었다. 작별의 꽃이다. 사립대에서 교수에 대한 인사권은 재단 이사장에게 있다. 그래서 김 이사장이 란을 보냈을 것이다.

23년 전 한양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될 때 김 이사장은 총장이었다. 면접 때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이 기억난다. 내 이력서에 적힌 신문 컬럼 리스트를 보고 그가 내게 물었다.

“이 컬럼들은 윤 박사가 모두 직접 쓴 것인가요?”

나는 그 질문에 적잖이 당혹했지만 짧지만 확고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게 그와의 인연, 그리고 한양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임용된 지 2년 반쯤 되었을 때 그는 나를 불러서 한양대의 인터넷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한양’이라는 부서를 부총장 직속기구로 만들고 그 조직의 장이 되었다.

나는 안산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인터넷 한양 업무는 서울캠퍼스에서 수행해야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김 총장은 내게 잠실에 있는 학교 아파트 한 채를 내주었다.  4년 동안 내가 한양대 인터넷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있어 김 총장은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그 동안 학과 운영과 수업이 뒷전에 되어버린 탓에 나는 학생들에게 무척 미안했다.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했던 나는 총장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고 보직을 그만 두었다. 건강 문제도 있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총장의 ‘애정’을 ‘배신’했고 그와의 ‘각별’했던 인연이 끝이 났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한양의 1천5백명의 교수 중 평범한 1인이 되었다.

돌이켜보니 한양을 위해 내가 좀 더 기여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인터넷을 변신시킨 것말고 나는 어떤 점에서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사장께는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그래서 저 작별의 난은 내게 다소 각별한 느낌이 든다. 이사장은 그저 이번에 퇴직하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난을 보내도록 지시했을 뿐이겠지만 말이다. (2020-01-24)

친구의 마음

몇 달 전 전주에 사는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그는 거실 벽의 그림을 보더니 너무 어둡다고 밝은 그림으로 바꾸어 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지만 플란테이션 노동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커피 찌꺼기로 형상화한 부조여서 분위기가 좀 어두웠다. 내가 좋은 생각이라고 응수했더니 자기가 소장한 그림 중 하나를 장기대여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면 좋지요”라고 건성으로 응답했다.

작가 미상

그런데 그 친구가 엊그제 전화를 하더니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으니 그림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상의해서 포구 그림을 선택했다.

어제 그가 그림을 가지고 와서 함께 걸었다. 거실이 한층 환해보였다.

마침 김치를 담은 날이어서 수육을 삶아 새 김치와 어리굴젓에 친구 부부와 막걸리를 한잔 했다. 늙은 나이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몇몇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2019-1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