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상

앞뜰 단풍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앞뜰이 붉고 노랗다. 길건너 서원 뜰의 단풍도 붉은 빛, 우리 집 울타리 남천도 붉은 빛이다. 거기에 잔디가 금빛으로 바뀌어 가며 가을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늦가을 정원에서는 크게 할 일이 없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화분들을 따뜻한 실내로 옮기고 수전들이 얼지 않도록 중간 밸브를 잠그고 용처가 사라진 물 호스들을 잘 말아서 창고에 보관하는 정도의 소소한 일이 있을 뿐이다.

실내에서도 청소와 같은 일상적 일이 있을 뿐이다. 지난 겨울에 창호를 삼중창으로 대폭 교체해 단열을 강화했고, 거실에 냉난방기를 들여오고 늘어난 전기 수요에 대비해 태양광 발전기를 추가로 설치했다. 태양광 발전이 시간당 6kw가 되었으니 아마도 난방을 대부분 전기로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되면 기름 보일러나 벽난로를 거의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름 보일러는 비용이 많이 들고 벽난로는 관리에 손이 많이 간다.

집의 외양도 중요하고 정원의 풍경도 중요하지만 집이란 무엇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해야 한다. 물론 폭풍우에 안전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데 관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러한 기본이 보장되는 집은 없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지은 집이라도 몇 년 지나지 않아 틈이 생기고 낡은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집이 그 일부인 자연의 이치이다.

때문에 집짓기 못지 않게 보수와 유지가 중요하다. 내가 홀연히 떠나더라도 집이 잘 유지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겠다는 계획을 내년에는 모두 실행해 놓아야겠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늘에 뜻과 후손들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고 가야할 것이다. 작은 집과 집안의 역사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이라.

계절도 가을이지만 내 삶도 가을이다. 계절이 바뀜이 슬퍼할 대상이 아니듯이 인생의 흐름도 슬퍼할 대상이 아니다. 모두 잠시 왔다가는 여행일 뿐이다. 아쉽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렇다고 여행이 슬프기까지는 않은 것처럼. (2019-11-07)

명예퇴직을 신청하다

지난 10월 28일 학교 당국에 명예퇴직서를 제출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한 끝에 그렇게 하는 것이 현재 나로서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양대에 마흔둘에 입사해 육십다섯에 퇴직하니 남들보다 한참 늦게 들어가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나오는 셈이다. 정보사회학과 학생들이 모두 졸업할 때까지 남아주지 못해 학생들에게 미안할 뿐 그 외에는 전혀 아쉬움이 없다. 내가 학과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정보사회학과 생기면서 한양에 부임했고, 내가 학과를 없애지 않았지만 정보사회학과 없어지면서 한양을 떠난다.

한양에 들어가면서, 길어야 25년이 되지 않을 교수생활이니 좌고우면하지 말고 이곳에서 커리어의 승부를 내자는 내 결심이 별로 잘못되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당국은 내게 충분한, 아니 분에 넘치는 자유와 존중을 주었고 학생들은 내 열정에 잘 호응해 주었다. 남부럽지 않은 호사였다. 대학원이 약한 점은 아쉬웠지만 어느 직장에 간들 그 정도의 아쉬움이 없겠는가.

지난 해 11월 21일 여기에 공적 생활을 마감한다는 글을 올리고(공적 생활을 마감하며….) 직업 이외의 공적 활동을 끝냈으니, 1년만에 직장 생활을 마감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다. 내년 3월부터는 거의 사적인 생활만 남는다.

아마도 내게는 은퇴의 충격이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이미 8년 전부터 은퇴 후의 삶을 기획하고 추진해 왔으니,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나름 단단히 준비했다는 생각이다. 아름다우면서도 그닥 불편하지 않은 곳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고, 시골생활에 대한 적응을 충분히 했다.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자식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재정도 확보했다. 시골에서는 대도시에 비해 생활비가 훨씬 적게 든다는 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은퇴 후에는 수입을 늘리려고 애쓰기 보다는 수입에 맞춰 사는 게 현명할 것인데 시골생활은 그점에서 크게 이롭다.

멀리 떨어진 직장에 다니면서 전원생활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지만 12년을 그렇게 살았다. 국내 최고 명의라는 의사가 회복불능이며 머지않아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린 지 13년이 되었지만 나는 앞을 잘 보고 있다. 내 눈을 7~8년 동안 보살펴 준 지금의 주치의는 2년 전 내게 “난 당신이 녹내장이라는 사실도 의심스럽다”고 의아해 했다. 시신경이 급속히 죽어가는 현상이 멈춰 버린 것이다.

육십 전에 실명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는데 지금까지 앞을 잘 보면서 강의를 해왔고 이렇게 멀쩡히 글을 쓰고 있다. 거의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그리고 작은 스트레스의 전원생활을 빼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한번도 녹내장 약을 쓴 적이 없고 수술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이 내 눈에 해준 게 없다.

큰 질병에 관해서는 세 주체의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역할, 의사가 하는 역할, 그리고 환자 자신이 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나는 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의사는 별로 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 눈의 건강은 하느님의 선처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건강으로 인한 몇 차례의 고비를 잘 넘기고 교수생활을 마치게 되어 정말 기쁘다. 정년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오래하지 않았는가.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전임 교수로서 한달 보름 정도의 강의가 남았다. 학생들에게도 내게도 즐거움이 가득한 수업이 되도록 해야겠다.  (2019-11-02)

은목서 향기는 집을 감아돌고

은목서꽃

집에 내려오니 은목서 향기가 나를 반긴다. 팔각정의 창문을 열어두면 곱고 강렬한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운다. 바야흐로 은목서의 계절이다.

8년 전에 이식한 은목서가 많이 자라 가지 끝이 지붕 자락 근처까지 올라왔다. 아마도 내년에는 지붕 끝에 닿을 것이다. 팔각정에 비치는 서향 햇빛을 막으려 심은 나무인데, 가을에는 향기가 덤이다.

은목서 안에는 벌레가 많은 지 작은 새들도 많이 날아든다. 이제 태풍도 지나갔으니 내일 아침에는 테라스에서 차를 마셔도 좋으리. 커피에 진한 꽃향기와 경쾌한 새소리가 더해 질 것이다. (2019-10-03)

가을 입문

화훼단지에 가서 가을꽃을 사왔다. 오늘 비가 내린다니 어제 서둘러 심으려는 것이었다.

앞뜰의 꽃마차에 전시한 화분을 갈았다. 큰 마차에는 펜타스를, 작은 마차에는 소국 화분을 올렸다. 지나가는 이웃 아주머니들이 좋아하실 것이다.

꽃마차의 펜타스와 소국

테라스의 꽃도 가을 정취가 나도록 보라빛 소국 화분을 추가했다. 아직 꽃들이 만개하지 않았지만 조금 있으면 소국, 용담, 카멜레온이 소담스럽게 피어날 것이다.

테라스의 소국, 용담, 카멜레온(채송화)

앞 도로와 마주한 경계화단에는 지난 봄에 이식한 백공작과 보라공작, 남천이 가득하다.

경계화단의 백공작과보라공작
대문, 남천, 영산홍,보라공작, 백공작

이제 잔디를 몇 번만 잘라주면 올해가 갈 것이다. 한여름처럼 잔디가 쑥쑥 자라지 않는다. 어제는 앞뜰 잔디를 잘랐다.

앞뜰과꽃마차

손, 펜, 그리고 글

너무 오래 컴퓨터로 글을 쓰다보니 손글을 잃어버렸다.  그 변화는 단지 필기구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깊이 생각한 후에 글을 썼다. 평소에 메모는 해두었지만 그것을 엮어서 글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더 이상 크게 손질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생각이 잘 정리된 후에 원고지나 노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드로 글을 쓰면서부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비로소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긴 편집 시간을 갖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머지않아 커리어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최근 문득 문득 다시 손으로 글을 쓰고싶다는 충동이 일곤 했다. 그러다 엊그제는 맘을 크게 먹고 수성펜 세 자루를 샀다.

그런데, 어제 우연치고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래 전 석사 학위 지도 학생이었던 제자로부터 몽블랑 펜을 선물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25년이 넘는 커리어에서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기품있는 필기구였다.

과연 과분한 선물을 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그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 전부터 내게 만년필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그에게 차마 돌려준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약속했다. 앞으로 그 펜으로 글을 쓰겠노라고.

행복한 우연이다. (윤영민, 2018-05-24)

커피 그라인더 구입

SAMSUNG CSC
Zassenhaus La Paz mill

18년 전 남대문 시장에서 구입한 커피 그라인더를 퇴역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2년 전 일본제 Kalita를 구해서 몇 번 사용했으나, 뚜껑이 없어 원두가 튀어나오고, 커피분 담는 상자가 너무 작아 분이 넘치는 불편이 있어 사용을 포기했다.

최근에 손이 아파서 커피 갈기가 어려워 자동 그라인더를 구입했다. 편하기는 한 데 커피 맛이 현저히 떨어져서 결국 다시 수동 그라인더로 돌아왔다.

지난 금요일(6/3) 남대문 시장에 가서 독일 자센하우스 라파즈 밀을 구했다. 수입상가(옛날 도깨비시장) 지하 1층 161호 우신상사(02-319-5770)에서 24만원 달라는 것을 흥정을 해서 겨우 2만원 깍고 현찰로 구입했다.

상품이 격조가 있다. 뚜껑은 황동, 내부 부품은 7천도의 고열에서 생산된 탄소강철, 목재 부분은 너도밤나무라고 한다. 자센하우스 커피 그라인더 중 가장 고가 제품이다.

몇 번 사용했는데 아직 손에 익지 않다. 원두가 잘 흘러내려가지 않아 공회전이 자주 발생한다. 잘 되다 안되다 하니 며칠 더 사용해보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교환을 해야할 듯 싶다.

커피 맛은 훌륭하다. 라파즈 밀은 미분이 많이 나와 쓴 맛이 발생한다는 지적도 있는데 우리에게 그런 문제는 없는 것 같다.

사람도 물건도 한번 인연을 맺으면 오래 가야한다. 지난 번 독일산 그라인더를 18년 사용했으니 이번 제품도 그렇게 오랜 사용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커피그라인더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