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이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되려면….

우리 나라에서는 좀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치와 행정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 정권은 국가 운영에 있어 군대식 지휘, 즉, 비민주적 권위주의가  통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반면에 진보 정권은 지도자가 올바른 목표와 의지만 지니면 관료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관료란 집권자(당)이 공포와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따라 오지도 않고, 정의의 깃발을 나붓낀다고 따라오지도 않는다. 이 중요한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탓에 지난 20년 동안 대부분의 보수 정권도 진보 정권도 국가 운영에 성공하지 못했다.

관료는 정권의 압력을 피해갈 수 있는 100가지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정권은 짧고 관료는 길다고 믿는다. 불행하게도,  짧게는 1백년, 길게는 7백년 동안 그들의 믿음이 틀린 적이 없다.

정치가가 국가가 나아가야할 올바른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을 잘 설득할 수 있다고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을 수는 있지만 정권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정치가가 뛰어난 행정 원칙과 능숙한 스킬로 관료를 장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서 위대한 국가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고 정권을 성공시킬 수 있다.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해방 이후 이들 대통령 중 과연 누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위대한 국가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가? 김대중일 것이다. 박정희는 산업화를 성공시켰지만 비명에 갔고, 김영삼은 문민화는 성공시켰지만 국가를 재정 위기에 처하게 했다. 노무현은 탈권위주의 정치를 시작했지만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DJ는 탁월한 설득력을 지닌 대중적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한 지도자였다. 비록 김종필과의 연합을 통해서 겨우 정권을 잡았고 여소야대의 약한 정부였으며, 아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어느 정부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경제 위기의 극복, 부정부패의 해소, 정보화 추진, 전자정부의 구축, 남북대립의 완화 등을 상기해 보라.

DJ는 행정 관료를 잘 이해했다. 그는 이념이나 좋은 뜻, 혹은 힘만으로는 관료를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장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지를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행정 관료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적재 적소에 기용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과연 어떻게 될까? 문 대통령이 착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주장처럼 선한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대 국회, 대 야당 관계를 놓고 보면 정치적 리더십이 눈에 띄지 않는다. 행정 능력은 이제 겨우 허니문 기간이 끝났다. 지금부터 행정 관료들의 저항과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과연 DJ만큼 해낼 수 있을까? 과거에 노무현을 보좌해서 통치한 경험이 있으니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부디 집권 후반기에 행정 관료의 포로가 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윤영민, 2018-07-08)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진실

에피소드 1) 오늘 아침 동아일보에 “트럼프, 무식이 화근이다”라는 컬럼이 실렸다. 그 글에서 그 신문의 논설위원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북핵 협상 열차에 덜렁 올라탄 트럼프“가 북미회담 이후 자신이 저지른 난감한 실수를 수습하느라 급급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에피소드 2) 오늘 아침 중앙일보에 실린 6.13 지방선거 결과에 관한 인터뷰에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런 언급을 했다.

“문 대통령이 용기 있게 새로운 대북 정책을 추구한 공이 있다. 문제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보수·진보 모두 전쟁 위협을 느낄 정도로 걱정을 하는 상황이었다가 극적으로 반전됐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풀어나갈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점은 문재인 정부엔 행운이었다. 그러나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인 결정의 결과물이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은 정말로 북핵문제에 관해 무지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 판단이 빚어낸 결과일까? 필자는, 이 두 개의 에피소드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 나라의 소위 오피니언 리더나 정치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미국 대통령의 언행에서 보고싶은 것만을 보는 오류에 빠져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다.

한 마디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대해 ‘무지’하지도 않고, ‘즉흥적’으로 북핵 문제를 다루지도 않고 있다. 트럼프가 천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과 한국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언론인, 정치인, 심지어 지식인보다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북핵에 관해 정보와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훨씬 타당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을 조롱하는 것은 사실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미국 국민과 미국 선거 제도에 대한 몰이해이고 모독이며,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미국 정보기관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트럼프를 옹호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적어도 민주국가에서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느 나라이건,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트럼프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언행에는 세 가지 입장이 투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전통적 고립주의, 사업가적 실용주의, 새로운 방식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이 그것이다.

그는 공화당의 고립주의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국(혹은 미국인)의 사활이 걸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외 문제에 개입하지 말자는 입장이다. 그가 외치는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는 그러한 전통을 표현하는 구호이다. 미국 기업들의 이익과 미국민들의 일자리와 번영이 정책의 지상 목표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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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관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 미국 본토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국가인 북한이 미국의 통제 밖에 있는 상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치적인 방법으로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면 남한에 대규모의 미군을 주둔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비용이 많이 드는 한미 군사 훈련도 계속할 이유도 없다.

그는 평생동안 부동산 개발업자로 살았다. 부동산 분야에서 비즈니스는 반드시 승패로 귀결되는 게임이 아니다. 피아가 분명하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극단적인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내가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다면 경쟁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 무방하다. 그것은, 얻는 게 있으면 주기도 해야하는 하나의 거래이다. 또한 거래에서 최대한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라면 위협, 허세, 속임수, 친근함, 칭찬이나 아부 같은 립서비스, 밀당, 정직 등 어떤 언행이나 태도도 구사할 수 있다. 이는 사업가적 실용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을 보면 다양한 전략적 언행이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대선 때 한반도 정책의 방향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는 김정은과 나란히 햄버거를 먹으면서라도 더 나은 비핵화정책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어제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미 199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 지도자와의 대화에 맹렬히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 취임 후 북한과 대화에 나서기 전까지 그는 북한과 김정은을 향해 거친 언설을 쏟아부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되고 난 후 트럼프가 극적으로 변했던 것일까? 아마도 트럼프의 정책적 입장에 관해 그보다 더 잘못된 해석은 없을 것이다.

그가 내뱉는 말만 가지고 판단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때로는 무식하고 때로는 막무가내이거나 즉흥적이며 변덕이 죽끓은 듯한 인사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언행을 거래와 협상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의 언행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발견된다.

끝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의 어떤 미국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커뮤케이션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선거 때부터 주류의 대중매체와는 척을 지고 트위터라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대중과 소통한다. 미국 대통령의 공식적 발화가 도날드 트럼프라는 개인의 사적 대화의 틀 속에서 터져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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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지적처럼, 21세기에는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등 정보기술 덕분에 연극의 시대가 되었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말하는 일상적 연극공연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21세기적 연극공연의 탁월한 기획자이며 연기자이다. 무대, 소구 관객(target audience), 배역(character), 출연진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이 주도하는 공연에 대한 팀웍, 공감 획득, 그리고 공연의 궁극적 성공을 위해 각종 연극 기법을 거침없이 구사한다. 기존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포획되어 있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은 그러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본질도, 또 그것을 구사하는 트럼프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것이 결코 낯설지 않는 것임에도 말이다.

‘말에 품위가 없다’, ‘주류 언론과 싸우려고만 한다’, 이 말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평가이다. 그런데 그 말들, 언젠가 들어본 익숙한 언급들이 아닌가? 맞다. 16, 17년 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귀에 따갑도록 듣던 표현이다. 그 때 우리는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의 동일한 이유로 지금 우리는 트럼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기반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선구자였다. 당시는 SNS가 아니라 블로그가 겨우 시작되던 시절이었고, 아직 웹사이트의 게시판이 지배적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시 그 어느 정치인보다 일찍 쌍방향적 소셜미디어를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국가의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기존의 사고 프레임–냉전주의, 지역주의, 보수주의–과 기득권에 격렬하게 도전했다. 당시 노 대통령의 발화나 행동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치인이나 유권자가 부지기수였다. 주류언론인 조중동은 노 대통령의 모든 것을 공격했다. 당연히 그의 탈인습적인 언행은 집중적인 비판을 면치 못했다. 노 대통령을 상기하면서 트럼프를 봐보라. 놀랍도록 유사한 행보를 읽을 수 있다.

트럼프는 언행에 있어 일관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행동이나 정책이 좌충우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일관성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그는 미국의 국익을 미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다. 그에게 예외란 없다. 그래서 소위 전통적인 우방국들이 아우성이다. 피아의 구분이 불분명해졌다. 정확히는 지금까지의 피아 구분이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적과 싸우려 하지도 않는다. 적을 굳이 패배시키려하지도 않는다. 설령 ‘적’과 윈윈하더라도 미국의 이익을 얻어내면 그만이라는 입장이다.

필자의 눈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데자뷰를 넘어서 트럼프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빙의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곤 한다. 진실은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인 조중동이 노무현을 공격하고 배격했듯이 지금 미국사회의 주류 언론인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가 트럼프를 공격하고 배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봐보라. 그것은 거의 전쟁터이다. 미국 주류 언론의 기자들이 질문을 통해서 트럼프 대통령을 거의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양상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인정사정없다. 조중동 기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필자가 볼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구사하는 말은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막말’은 결코 아니다. 막말이라는 표현은 주류 언론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노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된 언어 폭탄이다. 고도로 계산된 발화가 어찌 부주의하게 내뱉는 막말일 수 있겠는가. 거칠게 보이는 표현은 상대의 위선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고 엄포를 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기득권 사회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도 미국 기득권의 일부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적어도 개입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인, 정부관리, 무기 제조업체와 무기상, 주류 언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이익 카르텔을 해체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그렇게 해야만 미국 군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나아가 미국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의 ‘줄타기’를 보면서 그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이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불태울 마녀이거나 최소한 사형을 언도받아야할 악당이어야 한다. 그것은 남한의 극우보수만이 아니라 미국의 개입주의 카르텔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네오콘’에는 이념이 없다. 공존과 평화 대신 대립과 전쟁을 통해서 추구되는 이익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북미회담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할만한 지도자로 인정했다. 김정은에게는 뿔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에게는 뿔이 없다고 폭로해 버렸다. 그러니 위태위태한 것이다.

지금 싯점에서는 어지간한 필부도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적 언행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시간이 흘렀건만 우리 나라의 정치인과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는 아직도 그의 정체가 분명히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역할 기대에 눈이 멀어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거나 그의 자유분방해 보이는 수사에 현혹되어 진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한반도 문제에 관해 최소한 트럼프 씨가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고,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머리 회전이 비상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그의 행보를 예측하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친 김에 트럼프 대통령이 흔쾌히 인정하는 파트너인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그리고 그의 카운터파트인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서도 일국의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태도를 인정해야 비로소 현재의 한반도 문제가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윤영민, 2018-06-15)

트럼프, 문재인 그리고 김정은의 자아 표현 전략(2)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도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초기 반응은 한 마디로 “죽을래? 끝장을 내버릴거야. 짜식, 까불고 있어” 였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과격한’ 행동이 “미국과 대화를 하고싶다”,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신호”라고 해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극적인 트윗을 쏘아올렸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제재의 강도를 높여가도록 국제사회를 휘몰아갔다.

북한은 미국의 그러한 ‘협박’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편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적발언에 대해 모욕적 발언으로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쪽 공해상을 향해 장거리 미사일을 쏘았다. 마치 이판사판 한판 붙어보자는 듯한 자세였다.

두 사람의 불놀이에 한반도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위기 속으로 치달았다. 마치 누군가 금방이라도 핵단추를 누를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개시할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정치는 명분과 실리를 두고 벌이는 게임이다. 특히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정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 국가의 대표 선수(정상)의 한 마디 한 마디, 일거수 일투족이 그냥 나오는 법은 없다. 모두 관련국과 그 나라들의 대표 선수의 반응을 염두에 둔 계산적이고 전략적이라고 보면 된다. 게임의 목표는 승리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쟁자를 압도하는 승리보다는 최대한의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정상들은 게임에서 명분과 실리를 거두기 위해 전략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

대표 선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팀 전체의 전력이 약하다면 게임을 이길 수 없다. 국제정치에서도 국력이 약하면 정상이 아무리 뛰어나도 마이너 리거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운동 경기에서 대표 선수의 능력이 팀 성적의 중요한 요소이듯이 국제정치에서도 정상 요인(leader factor)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일한 국력이라도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하면 국제정치라는 게임에서 훨씬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제정치 국면에서 정상의 전략적 자아표현(strategic self-presentation)이 주목받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에 발표된 Edward Jones와 Thane Pittman(1982)의 논문, “Toward a general theory of strategic self-presentation”은 현재 긴박하게 전개되는 트럼프, 문재인, 김정은 세 사람의 국가 지도자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바라보는데 유용한 시각을 준다. 조운스와 피트먼에 의하면, 전략적 자아표현이란, 사람들이 목표 인물(target person)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특정한 인상을 갖게 만듦으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power)을 강화하려고 하는 언행을 말한다. 세 정상이 내놓는 발언이나 취하는 행동이 딱 그런 전략적 자아표현에 해당된다.

그들에 의하면, 전략적 자아표현에는 크게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환심사기(ingratiation), 겁주기(intimidation), 자기 PR(self-promotion), 모범화(exemplification), 간구(supplication)가 그것이다. 여러 가지 말, 표정, 행동이 환심사기에 속하지만, 특히 아부(flattery)가 대표적이다. 환심을 사려는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들에 의하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환심을 사는가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 목표 인물의 환심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둘째,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가, 셋째, 환심을 사는데 사용되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인가이다.

겁주기는 리스크가 큰 전략이다. 겁주기의 중심은 위협(threat)인데, 잘못 사용하면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상호 관계의 파국만 초래할 수도 있다.

자기 PR은 자신을 능력자로 보이려는 전략이다. 자기 PR이 성공하려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모범화는 상대에게 자신을 성실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식시키려는 전략이다. 그것은 상대에게 자신을 보고 따라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끝으로 간구는, 자신이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전략이다. 흔히 아이들이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관심이나 도움을 받고자 할 때 그 전략을 사용한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상호 관계는 겁주기로 시작했다. 지난 1년 동안 북한이 내보낸 메시지를 종합해 보면, 현재 김정은이 절실히 희망하는 것은 자신과 북한의 안전 그리고 경제발전이다. 그런데 그 관건을 미국–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쥐고 있으며, 김정은은 그 점을 대단히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북한과 미국의 오랜 적대 관계를 생각할 때 트럼프의 관심을 끌기 위해 김정은이 선택할 수 있는 자아표현은 겁주기 외에 없었을 것이다. ICBM에 핵탄두를 실어서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고 북한이 트럼프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트럼프가 김정은과 햄버거를 먹으며 대화할 수 있다고 트윗을 날리고 김정은이 트럼프와 대화할 수 있음을 시사했을 때 과연 어느 언론사가 진지하게 그 말을 받았었던가.

미국과 북한이 험악한 말은 물론이고 미사일 실험과 제제 강화로 전쟁 분위기가 끝없이 상승하고 있을 때 한국의 국민과 대통령은 얼마나 공포에 떨어야 했던가. 미국과 북한이 전쟁에 들어가면 일차적, 그리고 최대의 피해자가 남한이 아니던가. 그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남한의 대통령이라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미국 ‘큰 형님’이 알아서 잘 해주길 넋놓고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해 7월 미국 방문을 기점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를 만나서 긴 회담을 하고, 베를린에서 평화를 지향하는 ‘신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으며, 중국에서는 ‘굴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이 모범화 전략을 취했던 것으로 해석한다. “신뢰할만한 지도자 나아가 자국민을 위해 간절하게 평화를 원하는 지도자”라는 인식을 트럼프, 시진핑 같은 주요 당사국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김정은에게도 굳게 각인시켰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눈물겨운’ 노력은 평창 올림픽을 통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지점에서는 미국과 북한도 대화 국면에 들어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입장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미국도 북한도 그렇지는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사실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김정은 못지 않게 트럼프에게도 절실히 필요했다. 여러 가지 스캔들로 국내 정치에서 코너에 몰려 있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북핵 해결이 가을에 있을 중간 선거에서 승기를 잡게 해줄 묘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에 대표팀을 보내겠다는 의지로 남한에게 대화의 제스처를 보냈고, 핵무기 완성을 선언하면서 역설적으로 미국과의 대화 의사를 내보냈다. 평창올림픽은 미국과 북한, 즉, 트럼프와 김정은에게 대화를 시작할 명분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부터 문재인 대통령의 언사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자아표현 전략이 모범화에서 환심 사기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반도 대화국면 전환에 관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모든 공을 돌리는 모습,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을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은 때로 국민들이 “저렇게까지 해야하나”하는 측은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때 즈음해서 1년 전만 해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파격적인 방식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남북 정상이 만나고 북미 회담이 약속되고,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이 대화 국면에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북한에 대해 가장 호전적이었던 아베 수상마저도.

모범화와 환심 사기를 결합한 자아표현 전략–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으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는 자신의 의사를 정직하게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지도자로,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의 뜻을 가감없이 전달해 줄 수 있는 민족 지도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된다.

문 대통령은 1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미국과 북한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세계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언론인들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 겸손한 지도자, 현명한 지도자, 그리고 집요한 지도자라는 놀라운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 로버트 라이시(클린턴 행정부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UC Berkeley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을 이렇게 극찬했다.

“Over the years, I have come across many presidents and prime ministers, and have worked with many of their governments. But rarely if ever have I witnessed someone as talented, intelligent, humble, and progressive as President Moon.”

한반도에서 평화를 향한 게임은 아직, 그리고 앞으로도 한참 동안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을 수도 있다. 70여 년 동안 지속되어온 적대와 불신이 어찌 단 시간내에 사라지겠는가. 부디 정치 지도자들이 현명한 말과 행동으로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길 기원한다. (윤영민, 2018-05-28)

트럼프, 문재인 그리고 김정은의 자아 표현 전략(1)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아는 어떤 여론 조사기관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예측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주요 매체들은 트럼프 후보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영향력도 떨어지고 극보수 성향인 폭스 TV 정도가 예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1월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당당히 백악관에 입성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전례없는 방식의 정치를 시작했다. 그를 정치적 이단아쯤으로 조롱하듯 묘사하는 미국의 주류 매체들의 보도를 한 수 접고 보더라도 그는 ‘정치적인 것(political)’과는 거리가 먼 태도와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의 정치 코드를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동맹국이나 이웃 국가와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도 존중하지 않았다. 게다가 후보 때는 물론이고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그가 세계와 소통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채널은 트위터(Twitter)였다. 그는 거의 매일 온갖 문제에 대해 트윗을 날렸다.

Trump twitt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전대미문의 트위터 정치를 선보인 것이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공개하는 미국 대통령–다른 나라의 국가수반도 그렇다–의 전통적인 소통방식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홍보, 의전, 혹은 외교 팀에 의해 사전에 걸러지고 조정되는 소통과는 크게 다른 방식이다. 한 국가 정상의 발언이 트위터라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대단히 개인화된 메시지의 형태로 거의 매일 터져나오는 것이다.

트럼프의 트위터 정치는 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인들까지도 당황하게 만들곤 한다. 미국 정부 관리는 물론이고 미국의 언론인, 유권자, 기업인, 그리고 외국의 정상, 관리, 외교관, 언론인, 기업가, 심지어 국민들마저도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그의 트위터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백악관 보좌관의 임명과 해임, 국무장관의 임명 등과 같은 주요 인사의 통보에 트위터를 사용하고, 외국의 정상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트위터에 올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내놓는 공적 메시지와 도날드 트럼프라는 개인의 사적 메시지가 뒤섞이면서 대통령직의 수행이 트럼프 개인의 매우 개인적인 선호, 의사결정, 그리고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일자리를 늘이겠다는 공약을 실천에 나선 트럼프는 그 자신이 정의한 미국의 국익–미국내 투자 확대, 일자리 증가, 무역 역조 개선–이라는 오직 하나의, 그것도 매우 단기적 관점에서 대외 관계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겠다는 듯이 무섭게 달려 들었다. ‘설마’ 하면서 눈치를 살피던 국가들과 기업들이 트럼프가 허풍쟁이가 아님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 영국, 대한민국  등의 국가들, 그리고 미국 내외의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트럼프의 신호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투자를 늘리겠다는 약속과 행동, 무역 역조를 개선하겠다는 약속과 조치가 줄을 이었다. 그들은 트럼프가 그들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사업가’ 대통령을 상대하고 있음을 인식했고, 아직은 미국도, 그 미국의 힘을 휘두르는 트럼프 대통령이 결코 종이 호랑이가 아님도 실감했다.

그런데 어느날 동북아시아의 한반도 북쪽에서 강펀치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아직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그런 나라가 별로 없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발사 실험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급 진전되는 것이었다. (윤영민, 2018-05-27)

사이버 폭력–해법 없는 야만

사이버 폭력은 영어로 online violence (혹은 cyber-bullying)로 불리기도 하고 online harassment로 불리기도 한다. 폭력(violence)은 법적으로 명백한 범죄이지만 harassment(괴롭힘)은 범죄일 수도 있고, 단순한 도덕적 혹은 윤리적 일탈일 수도 있다. 이 표현상의 애매함은 사이버 폭력에 내재한, 해소될 수 없는 모순 혹은 이중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그것이 지닌 사회적 심각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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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형태의 사이버 폭력이 ‘괴롭힘’이고 심각한 형태의 사어버 폭력이 ‘폭력’인 것이 아니다. 그 두 용어가 단지 사이버 폭력의 강도를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가해자 입장에서 보는가 아니면 피해자 입장에서 보는가를 질적으로 구분해 주는 용어로 봐야 한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괴롭힘’도 있고 ‘폭력’도 있겠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오직 ‘폭력’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재밌자고 한 말인데요.” “화가 나서 그냥 한 마디 한 것 뿐이에요.” “좀 튀어볼라고 쓴 것 뿐인데.”

사이버 폭력 가해자를 인터뷰할 때 듣게 되는 전형적인 반응들이다. 가해자들은 사이버 폭력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는 행동으로 인식하거나 기껏해야 가벼운 일탈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가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자를 비아낭거리거나 다소 심한 농담을 한 정도, 좀 더 심하면, 약간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는 행위, 아주 심각한 경우라해야 침을 뱉거나 따귀를 때리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가해자는 그것을, 주먹으로 상대가 부상을 당할 정도로 때리거나 둔기를 내려치는 범죄, 더구나 칼로 찌르는 행동 같은 중대한 범법 행위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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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사이버 폭력의 피해자들 대부분–그것을 좀 넉넉하게 받아들이자는 문재인 대통령은 소수의 예외에 속할 것이다–은 사이버 폭력이 심각한 사회 범죄라고 생각한다. 가해자 개개인은 가벼운 비난이나 욕설만을 했어도 그렇다. 수백명, 수천명, 혹은 수만명이 비난과 욕설을 쏟아내면 그것을 담담하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사이버 폭력으로 인한 심리적, 나아가 사회적 피해는 워낙 위중하다. 피해자는 오랜 기간 극도의 분노, 좌절, 공포에 사로 잡히고, 불면증은 물론이고 위통, 근육통 등 신체적 이상이 수반되기도 한다. 명사들의 경우 그 피해가 심리적 혹은 신체적 상태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은 직장이나 직업을 잃고 영원히 사회적으로 매장되기도 한다. 명사들에게는 명예나 이미지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명예를 잃거나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은 사회적 죽음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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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폭력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그러한 의식 격차(awareness gap)는 사이버 폭력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중대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소리 한번 지르거나 침 한번 뱉었는데 상대가 죽어버리는 현상이 사이버 폭력이다.

사이버 폭력은 인터넷 야만(野蠻)이다. 사이버 폭력의 피해자는, 때로 성폭력, 성추행, 혹은 성희롱을 저지른 성범죄 혐의자일 수 있고, 때로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 수 있으며, 때로 남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 특정 사회적 사건과는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일 수도 있다. 문제는 흔히 아직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피해자’에 대한 일종의 여론 재판이 끝나 버리곤 한다는 사실이다. 법적 판결을 받기도 전에 이미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사형’이 집행되어버리곤 한다는 사실이다. 그 재판에서 선고는 사형 뿐이고 집행은 즉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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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에 대해서든 집단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복수나 응징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범죄에 대한 판단과 처벌은 오직 국가의 사법기구만에게만 부여되어 있으며 반드시 법률에 따라야 한다(죄형법정주의). 경찰이나 검찰이 범죄를 인지하거나 범죄 피해자의 고발이나 고소가 있으면 사법기구가 범죄를 조사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하며 피해자를 대신해서 형을 집행한다. 그리고 그 형은 범죄 행위에 대해 적절한 수준이어야 한다. 2-3년 정도 실형을 살아야 하는 범죄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할 수는 없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사법권은 국가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고 사법부는 사회 정의(正義)의 최종 담지자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범죄 혐의자(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사람)에게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심판과 처벌이 발생한다. 제어되지 않은 대중의 분노–그것은 왕왕 근거가 잘못 된 것이곤 하다–가 순식간에 한 사람의 사회적 생명을 끝장내 버린다. 거기에는 적법한 절차, 적절한 형량, 정당한 집행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것은 집단적 린치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 개개인은 양심의 가책은 커녕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댓글 한 마디 올렸을 뿐인데, 수백, 수천의 댓글들이 합쳐져서 당하는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린치요 형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문명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러한 사회적 범죄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도 아니고 표현의 자유도 아니다.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그냥 흉악한 범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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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야만인 사이버 폭력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사이버 폭력이 인터넷 사용자의 자율적인 방법이나 교육을 통해서 해결될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사이버 폭력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의식 격차가 너무 크며, 사이버 폭력은 대단히 가볍고 충동적이며 순식간에 발생해 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엄격하게 한다고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해 행동의 성격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피해의 정도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사이버 문화의 향상이나 교육을 통한 인식의 제고가 필요하겠지만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는 공간에 대한 통제가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인터넷 포털, 인터넷 매체, SNS 운영 업체에 대해 예방 책임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무분별한 댓글이 방치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업체들의 상업적 동기이다.

모든 인터넷 포털, 인터넷 언론, SNS에 대해 실명제를 의무화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명제를 도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벼운 비난, 퍼나르기, 신상털이는 실명으로도 얼마든 행해진다. 페이스북의 경우 사용자가 실명은 물론이고 자신의 얼굴까지 공개하고 있지만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관련 업체들은 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고 거세게 저항할 것이다. 그런데 실명제가, 정부가 그 저항을 강제로 잠재우고 시행할 정도로 효과적인 제도인지 의문이다.

답답하다. 과연 사이버 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해법은 없을까? (윤영민, 2018-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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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으로 충분한가?…

“나라 잃은 국치일, 기억하겠습니다.” “3.1 운동, 기억하겠습니다.” “일제의 만행, 잊지 않겠습니다.” “4.3 비극, 기억하겠습니다.” “순국선혈의 희생, 기억하겠습니다.” “4.19 정신, 기억하겠습니다.” “5월 광주, 기억하겠습니다.” “6월 민주화 운동, 기억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잊지 않겠습니다.”….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데 내가 잊어버린 역사적 사건이 또 없을까?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 많은 나라이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과거를 잊어버리는 국민에게 비극은 되풀이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기억의 다짐은 뭔가 아쉽고 허전하다. 기억해서 어쩌자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잊지 말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내게는 그 다짐이 그렇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안된다”, “나는 광주에 개입한 적이 없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온 독일 동포를 추방하다….이 한심한 에피소드들은 모두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오지 못한 결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제창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대한 사회적 쟁점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문제는 그 때 광주 시민들이 지키려했고 보여주었던 정신이 아직까지도 나라의 중심이 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5월 광주’로 집약되던 민주,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헌신, 협동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광주에서도 그런 정신을 찾기가 어렵다. 대신에 그 자리를 집단 이기주의, 개인주의, 황금만능, 쾌락과 허영, 출세주의, 불평등, 사회적 배제, 관료주의, 권위주의, 불신이 채우고 있다. ‘5월 광주’는 표를 얻기 위해 ‘광주’를 추켜세우는 정치인들의 헌사 속에나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중립적 역사란 잘 해야 허상이고 대부분 기만이다. 역사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편집과 해석이다. 민족 공통의 기억은 소중히 지켜져야 하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서 기술되어야 한다.

‘5월 광주’에 대한 해석과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 갚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가? 진정 어떤 세상을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가? 그런 세상을 가져오기 위해 나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과 행동 속에 ‘5월 광주’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기억이다.

‘5월 광주’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들지 않고 단순한 기억 속에 묶어두려 하는 한 그것은 빠른 속도로 잊혀질 것이다.  이 땅에 5월 정신은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고 있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로서 나는 그것이 두렵고 안타깝다. (2016/5/18. 윤영민)

‘세월호’, 문명의 시금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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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알렌 튜링은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기 위한 이미테이션 게임을 구상했다. 2016년 구글은 기계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게 사고할 수 있음을 검증하기 위해 바둑에 도전했다. 전자를 튜링 테스트 버전 1.0이라고 부른다면,  후자를 튜링 테스트 버전 2.0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튜링과 구글이 시도했던 것과 유사하게 나는 국가 관리자들이 문명인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공무원이 되고 정치인이 되도록 제도화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공감능력 테스트이다.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꼭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나는, 당신은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하나는, 당신은 세월호가 왜 2년 이상 인양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그 시험을 세월호 테스트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리고 세월호 테스트에서 얻은 고위공직자의 점수, 대통령과 국회의원 후보의 점수는, 마치 재산 공개하듯이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월호 참사는 국가 관리자들에 의해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세월호포스터

3백 명이 넘는 사람이 근해에서 침몰하는 여객선에 갇혀 죽는 사회, 그것은 문명사회가 아니다. 또한 ‘실종’된 시신이 머무르고 있을 여색선을 2년 이상 바다 속에 방치하는 나라,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모든 사회에는 권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권력은 벌거벗은 폭력일 뿐이다. 그것이 사회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그것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앙리 레비의 표현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다.

우리를 야만으로 만드는 것은 예절의 부재도, 법률의 흠결도, 그리고 기술의 부족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국가, 그리고 오직 권력과 돈에 대한 욕심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공감문명(empathic civilization)이라고 부른다.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지구적 공감, 생태적 공감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840여 쪽에 달하는 <공감의 시대>에서 그에 대해 이론적, 경험적 증거를 깨알같이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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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21세기 공감 문명의 일부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세월호’가 시금석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문명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문명국가가 되려면 세월호를 한시 바삐 인양하고, 참사의 원인을 밝히며, 피해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공감이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 한다. 희생자들의 가족을 따뜻하게 품어 주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세월호’에 진 빚을 갚아야 우리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부디 이 땅에 인간 존중의 문화 그리고 공감의 정치가 꽃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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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도국’에 나타난 ‘어린 왕자’

SAMSUNG CSC 어제 저녁 집 근처의 장성 군립도서관에서 열린 고전 소설 독서 동아리 모임에 갔다. 지난 달 10여명이 모여서 시작했는데, 어제 열린 첫 모임에 주최측인 군립도서관 직원 두 명과 나, 그렇게 3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는 적었지만 우리는 <홍길동전>과 <어린 왕자>를 가지고 두 시간이 넘도록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참석자가 적어서 다행히 실컷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3백 여년 전 조선 최고의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허균은 <홍길동전>에 자신의 유토피아 기획을 제시했다. 처절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세기말 조선은 전쟁과 궁핍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적서 차별, 부정부패 등 정치와 사회현실도 백성들의 눈에는 절망적 상태였으리라. <홍길동전>에는 그러한 시대에 대한 허균의 인식이 깊이 베어 있다.

작품 속 홍길동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치세에, 재상의 집안에서, 영웅적 자질을 완벽하게 갖춘 서자로 세상에 태어났다! 아,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 설정인가. 엄격한 노예제, 신분제의 사회인 조선 초기에 서자로 태어났다! 그것도 영웅호걸의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재상의 집안에서…. 허균은 초인적 영웅이 나타나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길 소망했으리라.

그가 의적의 모습으로 오던 왕의 모습으로 오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적떼 활빈당 수령 홍길동은 조선을 구제하지 못하고 결국 조선을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되지 않는가. 허균은, 세종대왕이라는 최고의 성군과 홍길동이라는 초인적 영웅의 만남을 사회 개혁과 혁신을 낳지 못한 채 끝나게 만든다.

적서차별로 대변되는 모순된 사회구조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허균에게도 도전하기에 너무 벅찬 상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허균은 홍길동과 활빈당이 조선의 율법이 미치지 않은 율도국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만든다. 그것도 홍길동이 왕이 되어서 말이다.

허균은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이렇게 그린다. “새 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시절이 태평하여 풍년이 들고,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임금이 베푼 덕이 온 나라에 퍼져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었다(101쪽).” 허균은 홍길동이 영웅의 꿈을 이루었다고 칭송하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아름답구나! 길동이 행한 일들이여! 자신이 원한 것을 흔쾌하게 이룬 장부로다. 비록 천한 어미 몸에서 태어났으나 가슴에 쌓인 원한을 풀어 버리고, 효성과 우애를 다 갖춰 한 몸의 운수를 당당히 이루었으니, 만고에 희한한 일이기에 후세 사람에게 알리는 바이다(105쪽).” 전쟁이 없고, 백성의 육신이 편안하고 부유하게 사는 사회가 율도국에 실현시킨 허균의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과연 율도국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왕이 된 홍길동과 그 집안은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에서 백성들도 과연 두루두루 행복했을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바로 ‘율도국’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홍길동전>이 끝나는 지점에서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율도국’을 찾아온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의 어른들이 얼마나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허균이 율도국에 그렸던 유토피아를 이루었다.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조선 시대의 귀족은 물론이고 왕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에 산다.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서 주워가는 사람이 없기도 하다. 물건 나름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 유토피아의 주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국민이다. 자살률 1위, 자살 증가율 1위, 노인빈곤율 1위 등등 어느 지표로 보아도 우리 국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에서도 사람들이 불행할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권위와 지배, 부유함과 편리함, 그리고 일에 집착한 사람들(‘어른들’)은 무엇이 삶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성장의 댓가인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는 독자를 발가벗기는 거울이다. 우리의 민낯, 몸뚱이, 그리고 마음 속까지 남김없이 보여주는 무서운 거울이다. 초인적 영웅들은 유토피아의 기반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영웅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진정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데 영웅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아니 초인적 영웅을 기다리는 한, 영웅 의존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모두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즉각적 실천이 필요하다

chartoftheday_4903_renewables_account_for_over_half_of_sweden_s_energy_n 아내가 미세먼지에 대한 자료를 부탁해서 몇 가지 찾아서 보내주었다. 오늘은 외국어체험센터에 중학생들이 교육받으러 온다는데, 미세먼지에 대해 수업하겠다는 것이다. 미세먼지의 정의, 미세먼지의 영향, 미세먼지의 발생요인, 그리고 미세먼지의 가장 큰 발생요인 중 하나인 화석연료의 의존성에 관한 자료를 찾아주었다.

우리나라의 신재생 에너지 비율이 1% 정도인데, 스웨덴은 50%가 넘는다. 대기오염을 예방하기 위해 화력발전의 비중을 줄여야 하고,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핵발전의 비중도 줄여야 한다. 그럴려면 한편으로 에너지 사용을 자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태양광, 풍력, 조력, 지열 등과 같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을 늘여야 한다. 다행히 우리 나라는 풍부한 재생에너지 자원을 갖고 있다.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얽히고 섥힌 이해 관계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노인은 얼마나, 왜 가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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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의 삶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는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그냥 ‘노인 빈곤율’이라고도 함)이다.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이렇게 계산된다. 한 사회의 65세 이상 노인을 연간소득 기준으로 한 줄로 세웠을 때, 딱 가운데 해당되는 소득(중위 소득이라고 함)의 50% 미만인 계층이 65세 노인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49.6%로, 위 표에서 보듯이 OECD 회원국 중 단연 1등이다. OECD 국가 평균이 12.6%이니, 그것의 거의 네 배나 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18-25세 인구층이나 25-65세 인구층에서는 우리나라의 상대적 빈곤율이 OECD 국가 평균보다 낮다. 이는 우리나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많은 편이 아닌데 유독 노인층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왜 그럴까? 다음 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빈곤율2001

시장 소득을 기준으로 산출한 노인 빈곤율을 보면 우리나라가 61.3%로 다른 OECD 회원국들에 비해 다소 낮은 편이다. 시장소득이란 요소 소득(근로소득+사업소득+재산소득)과 사적 이전소득(퇴직금, 개인연금 등)을 합한 소득을 말한다.

그런데 가처분 소득을 기준으로 산출한 노인 빈곤율은 우리나라가 49.6%로 다른 OECD 회원국들에 비해 매우 높다. 가처분 소득이란 시장 소득과 공적 이전 소득(공적연금 등)을 합한 것에서 비소비지출(소득세, 사회보험료 등)을 뺀 소득을 말한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에 있어 노인층에게 주어지는 공적 이전 소득이 노인 빈곤율을 현저하게 낮추고 있는 반면 우리 나라에서는 공적 이전 소득이 작아서 노인 빈곤율을 별로 낮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가난한(가처분 소득이 아주 작은) 노인들이 무척 많다. 그 이유는 일하는 노인들이 적어서가 아니라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공적 이전 소득이 작기 때문이다.

이 자료들은 노인에 대한 공적 이전 소득을 늘리는  길이 우리 사회의 노인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특히 노인 인구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호남 지방에는 노인층에 대한 공적 이전 소득의 확대가 절실하다고 판단된다. (윤영민, 2015/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