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폭력–해법 없는 야만

사이버 폭력은 영어로 online violence (혹은 cyber-bullying)로 불리기도 하고 online harassment로 불리기도 한다. 폭력(violence)은 법적으로 명백한 범죄이지만 harassment(괴롭힘)은 범죄일 수도 있고, 단순한 도덕적 혹은 윤리적 일탈일 수도 있다. 이 표현상의 애매함은 사이버 폭력에 내재한, 해소될 수 없는 모순 혹은 이중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그것이 지닌 사회적 심각성을 시사한다.

Image result for online violence

가벼운 형태의 사이버 폭력이 ‘괴롭힘’이고 심각한 형태의 사어버 폭력이 ‘폭력’인 것이 아니다. 그 두 용어가 단지 사이버 폭력의 강도를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가해자 입장에서 보는가 아니면 피해자 입장에서 보는가를 질적으로 구분해 주는 용어로 봐야 한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괴롭힘’도 있고 ‘폭력’도 있겠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오직 ‘폭력’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재밌자고 한 말인데요.” “화가 나서 그냥 한 마디 한 것 뿐이에요.” “좀 튀어볼라고 쓴 것 뿐인데.”

사이버 폭력 가해자를 인터뷰할 때 듣게 되는 전형적인 반응들이다. 가해자들은 사이버 폭력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는 행동으로 인식하거나 기껏해야 가벼운 일탈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가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자를 비아낭거리거나 다소 심한 농담을 한 정도, 좀 더 심하면, 약간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는 행위, 아주 심각한 경우라해야 침을 뱉거나 따귀를 때리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가해자는 그것을, 주먹으로 상대가 부상을 당할 정도로 때리거나 둔기를 내려치는 범죄, 더구나 칼로 찌르는 행동 같은 중대한 범법 행위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Related image

이와는 달리 사이버 폭력의 피해자들 대부분–그것을 좀 넉넉하게 받아들이자는 문재인 대통령은 소수의 예외에 속할 것이다–은 사이버 폭력이 심각한 사회 범죄라고 생각한다. 가해자 개개인은 가벼운 비난이나 욕설만을 했어도 그렇다. 수백명, 수천명, 혹은 수만명이 비난과 욕설을 쏟아내면 그것을 담담하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사이버 폭력으로 인한 심리적, 나아가 사회적 피해는 워낙 위중하다. 피해자는 오랜 기간 극도의 분노, 좌절, 공포에 사로 잡히고, 불면증은 물론이고 위통, 근육통 등 신체적 이상이 수반되기도 한다. 명사들의 경우 그 피해가 심리적 혹은 신체적 상태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은 직장이나 직업을 잃고 영원히 사회적으로 매장되기도 한다. 명사들에게는 명예나 이미지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명예를 잃거나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은 사회적 죽음이나 다름 없다.

Image result for consequence of online violence

사이버 폭력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그러한 의식 격차(awareness gap)는 사이버 폭력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중대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소리 한번 지르거나 침 한번 뱉었는데 상대가 죽어버리는 현상이 사이버 폭력이다.

사이버 폭력은 인터넷 야만(野蠻)이다. 사이버 폭력의 피해자는, 때로 성폭력, 성추행, 혹은 성희롱을 저지른 성범죄 혐의자일 수 있고, 때로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 수 있으며, 때로 남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 특정 사회적 사건과는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일 수도 있다. 문제는 흔히 아직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피해자’에 대한 일종의 여론 재판이 끝나 버리곤 한다는 사실이다. 법적 판결을 받기도 전에 이미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사형’이 집행되어버리곤 한다는 사실이다. 그 재판에서 선고는 사형 뿐이고 집행은 즉결이다.

Related image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에 대해서든 집단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복수나 응징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범죄에 대한 판단과 처벌은 오직 국가의 사법기구만에게만 부여되어 있으며 반드시 법률에 따라야 한다(죄형법정주의). 경찰이나 검찰이 범죄를 인지하거나 범죄 피해자의 고발이나 고소가 있으면 사법기구가 범죄를 조사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하며 피해자를 대신해서 형을 집행한다. 그리고 그 형은 범죄 행위에 대해 적절한 수준이어야 한다. 2-3년 정도 실형을 살아야 하는 범죄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할 수는 없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사법권은 국가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고 사법부는 사회 정의(正義)의 최종 담지자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범죄 혐의자(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사람)에게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심판과 처벌이 발생한다. 제어되지 않은 대중의 분노–그것은 왕왕 근거가 잘못 된 것이곤 하다–가 순식간에 한 사람의 사회적 생명을 끝장내 버린다. 거기에는 적법한 절차, 적절한 형량, 정당한 집행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것은 집단적 린치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 개개인은 양심의 가책은 커녕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댓글 한 마디 올렸을 뿐인데, 수백, 수천의 댓글들이 합쳐져서 당하는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린치요 형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문명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러한 사회적 범죄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도 아니고 표현의 자유도 아니다.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그냥 흉악한 범죄일 뿐이다.

Image result for lynch mob

현대판 야만인 사이버 폭력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사이버 폭력이 인터넷 사용자의 자율적인 방법이나 교육을 통해서 해결될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사이버 폭력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의식 격차가 너무 크며, 사이버 폭력은 대단히 가볍고 충동적이며 순식간에 발생해 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엄격하게 한다고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해 행동의 성격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피해의 정도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사이버 문화의 향상이나 교육을 통한 인식의 제고가 필요하겠지만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는 공간에 대한 통제가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인터넷 포털, 인터넷 매체, SNS 운영 업체에 대해 예방 책임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무분별한 댓글이 방치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업체들의 상업적 동기이다.

모든 인터넷 포털, 인터넷 언론, SNS에 대해 실명제를 의무화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명제를 도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벼운 비난, 퍼나르기, 신상털이는 실명으로도 얼마든 행해진다. 페이스북의 경우 사용자가 실명은 물론이고 자신의 얼굴까지 공개하고 있지만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관련 업체들은 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고 거세게 저항할 것이다. 그런데 실명제가, 정부가 그 저항을 강제로 잠재우고 시행할 정도로 효과적인 제도인지 의문이다.

답답하다. 과연 사이버 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해법은 없을까? (윤영민, 2018-3-25)

Related image

‘기억’으로 충분한가?…

“나라 잃은 국치일, 기억하겠습니다.” “3.1 운동, 기억하겠습니다.” “일제의 만행, 잊지 않겠습니다.” “4.3 비극, 기억하겠습니다.” “순국선혈의 희생, 기억하겠습니다.” “4.19 정신, 기억하겠습니다.” “5월 광주, 기억하겠습니다.” “6월 민주화 운동, 기억하겠습니다.” “세월호 참사, 잊지 않겠습니다.”….

마땅히 기억해야 하는데 내가 잊어버린 역사적 사건이 또 없을까? 우리는 기억해야할 것이 많은 나라이다. 사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과거를 잊어버리는 국민에게 비극은 되풀이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기억의 다짐은 뭔가 아쉽고 허전하다. 기억해서 어쩌자고?

기억하겠다는 다짐이 문자 그대로 역사적 사건 자체를 잊지 말자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요즘 내게는 그 다짐이 그렇게 들린다. 나만 그런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안된다”, “나는 광주에 개입한 적이 없다”,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려고 온 독일 동포를 추방하다….이 한심한 에피소드들은 모두 지난 40여년 동안 우리가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오지 못한 결과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제창하는 문제가 그렇게 중대한 사회적 쟁점인가.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하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문제는 그 때 광주 시민들이 지키려했고 보여주었던 정신이 아직까지도 나라의 중심이 서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5월 광주’로 집약되던 민주,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헌신, 협동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우리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광주에서도 그런 정신을 찾기가 어렵다. 대신에 그 자리를 집단 이기주의, 개인주의, 황금만능, 쾌락과 허영, 출세주의, 불평등, 사회적 배제, 관료주의, 권위주의, 불신이 채우고 있다. ‘5월 광주’는 표를 얻기 위해 ‘광주’를 추켜세우는 정치인들의 헌사 속에나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중립적 역사란 잘 해야 허상이고 대부분 기만이다. 역사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관적 편집과 해석이다. 민족 공통의 기억은 소중히 지켜져야 하고 역사는 정의의 편에서 기술되어야 한다.

‘5월 광주’에 대한 해석과 살아남은 자들의 부채 갚음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가? 진정 어떤 세상을 후세에 물려주고 싶은가? 그런 세상을 가져오기 위해 나는,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과 행동 속에 ‘5월 광주’의 정신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사회적 기억이다.

‘5월 광주’를 살아있는 역사로 만들지 않고 단순한 기억 속에 묶어두려 하는 한 그것은 빠른 속도로 잊혀질 것이다.  이 땅에 5월 정신은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끼고 있다.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로서 나는 그것이 두렵고 안타깝다. (2016/5/18. 윤영민)

‘세월호’, 문명의 시금석

the-territory-of-expertise-machine-vs-human-expert-vs-group-of-amateurs-13-638

1950년 알렌 튜링은 기계가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기 위한 이미테이션 게임을 구상했다. 2016년 구글은 기계가 인간보다 더 뛰어나게 사고할 수 있음을 검증하기 위해 바둑에 도전했다. 전자를 튜링 테스트 버전 1.0이라고 부른다면,  후자를 튜링 테스트 버전 2.0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튜링과 구글이 시도했던 것과 유사하게 나는 국가 관리자들이 문명인으로 사고할 수 있는가를 검증하는 게임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공무원이 되고 정치인이 되도록 제도화했으면 좋겠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공감능력 테스트이다. 따뜻한 심장을 가지고 있는가를 검증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꼭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나는, 당신은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가? 다른 하나는, 당신은 세월호가 왜 2년 이상 인양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가? 그 시험을 세월호 테스트라고 불러도 좋으리라.

그리고 세월호 테스트에서 얻은 고위공직자의 점수, 대통령과 국회의원 후보의 점수는, 마치 재산 공개하듯이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세월호 참사는 국가 관리자들에 의해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세월호포스터

3백 명이 넘는 사람이 근해에서 침몰하는 여객선에 갇혀 죽는 사회, 그것은 문명사회가 아니다. 또한 ‘실종’된 시신이 머무르고 있을 여색선을 2년 이상 바다 속에 방치하는 나라, 그것은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다.

모든 사회에는 권력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간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 결여된 권력은 벌거벗은 폭력일 뿐이다. 그것이 사회주의이든 자본주의이든, 그것이 진보이든 보수이든, 앙리 레비의 표현처럼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다.

우리를 야만으로 만드는 것은 예절의 부재도, 법률의 흠결도, 그리고 기술의 부족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존중하지 않는 문화, 국민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국가, 그리고 오직 권력과 돈에 대한 욕심에 의해 지배되는 정치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공감문명(empathic civilization)이라고 부른다.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정보통신기술 덕분에 지구적 공감, 생태적 공감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840여 쪽에 달하는 <공감의 시대>에서 그에 대해 이론적, 경험적 증거를 깨알같이 제시한다.

empathy_big

우리 사회가 21세기 공감 문명의 일부인지를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세월호’가 시금석이다. 아직까지 우리는 문명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문명국가가 되려면 세월호를 한시 바삐 인양하고, 참사의 원인을 밝히며, 피해자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공감이 충만한 사회를 만들어 한다. 희생자들의 가족을 따뜻하게 품어 주어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세월호’에 진 빚을 갚아야 우리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

부디 이 땅에 인간 존중의 문화 그리고 공감의 정치가 꽃피었으면 좋겠다.

asdfasdfa

‘율도국’에 나타난 ‘어린 왕자’

SAMSUNG CSC 어제 저녁 집 근처의 장성 군립도서관에서 열린 고전 소설 독서 동아리 모임에 갔다. 지난 달 10여명이 모여서 시작했는데, 어제 열린 첫 모임에 주최측인 군립도서관 직원 두 명과 나, 그렇게 3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는 적었지만 우리는 <홍길동전>과 <어린 왕자>를 가지고 두 시간이 넘도록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참석자가 적어서 다행히 실컷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3백 여년 전 조선 최고의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허균은 <홍길동전>에 자신의 유토피아 기획을 제시했다. 처절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세기말 조선은 전쟁과 궁핍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적서 차별, 부정부패 등 정치와 사회현실도 백성들의 눈에는 절망적 상태였으리라. <홍길동전>에는 그러한 시대에 대한 허균의 인식이 깊이 베어 있다.

작품 속 홍길동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치세에, 재상의 집안에서, 영웅적 자질을 완벽하게 갖춘 서자로 세상에 태어났다! 아,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 설정인가. 엄격한 노예제, 신분제의 사회인 조선 초기에 서자로 태어났다! 그것도 영웅호걸의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재상의 집안에서…. 허균은 초인적 영웅이 나타나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길 소망했으리라.

그가 의적의 모습으로 오던 왕의 모습으로 오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적떼 활빈당 수령 홍길동은 조선을 구제하지 못하고 결국 조선을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되지 않는가. 허균은, 세종대왕이라는 최고의 성군과 홍길동이라는 초인적 영웅의 만남을 사회 개혁과 혁신을 낳지 못한 채 끝나게 만든다.

적서차별로 대변되는 모순된 사회구조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허균에게도 도전하기에 너무 벅찬 상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허균은 홍길동과 활빈당이 조선의 율법이 미치지 않은 율도국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만든다. 그것도 홍길동이 왕이 되어서 말이다.

허균은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이렇게 그린다. “새 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시절이 태평하여 풍년이 들고,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임금이 베푼 덕이 온 나라에 퍼져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었다(101쪽).” 허균은 홍길동이 영웅의 꿈을 이루었다고 칭송하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아름답구나! 길동이 행한 일들이여! 자신이 원한 것을 흔쾌하게 이룬 장부로다. 비록 천한 어미 몸에서 태어났으나 가슴에 쌓인 원한을 풀어 버리고, 효성과 우애를 다 갖춰 한 몸의 운수를 당당히 이루었으니, 만고에 희한한 일이기에 후세 사람에게 알리는 바이다(105쪽).” 전쟁이 없고, 백성의 육신이 편안하고 부유하게 사는 사회가 율도국에 실현시킨 허균의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과연 율도국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왕이 된 홍길동과 그 집안은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에서 백성들도 과연 두루두루 행복했을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바로 ‘율도국’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홍길동전>이 끝나는 지점에서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율도국’을 찾아온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의 어른들이 얼마나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허균이 율도국에 그렸던 유토피아를 이루었다.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조선 시대의 귀족은 물론이고 왕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에 산다.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서 주워가는 사람이 없기도 하다. 물건 나름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 유토피아의 주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국민이다. 자살률 1위, 자살 증가율 1위, 노인빈곤율 1위 등등 어느 지표로 보아도 우리 국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에서도 사람들이 불행할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권위와 지배, 부유함과 편리함, 그리고 일에 집착한 사람들(‘어른들’)은 무엇이 삶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성장의 댓가인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는 독자를 발가벗기는 거울이다. 우리의 민낯, 몸뚱이, 그리고 마음 속까지 남김없이 보여주는 무서운 거울이다. 초인적 영웅들은 유토피아의 기반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영웅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진정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데 영웅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아니 초인적 영웅을 기다리는 한, 영웅 의존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모두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즉각적 실천이 필요하다

chartoftheday_4903_renewables_account_for_over_half_of_sweden_s_energy_n 아내가 미세먼지에 대한 자료를 부탁해서 몇 가지 찾아서 보내주었다. 오늘은 외국어체험센터에 중학생들이 교육받으러 온다는데, 미세먼지에 대해 수업하겠다는 것이다. 미세먼지의 정의, 미세먼지의 영향, 미세먼지의 발생요인, 그리고 미세먼지의 가장 큰 발생요인 중 하나인 화석연료의 의존성에 관한 자료를 찾아주었다.

우리나라의 신재생 에너지 비율이 1% 정도인데, 스웨덴은 50%가 넘는다. 대기오염을 예방하기 위해 화력발전의 비중을 줄여야 하고, 국민의 안전을 위해 핵발전의 비중도 줄여야 한다. 그럴려면 한편으로 에너지 사용을 자제하고, 다른 한편으로 태양광, 풍력, 조력, 지열 등과 같은 재생에너지의 사용을 늘여야 한다. 다행히 우리 나라는 풍부한 재생에너지 자원을 갖고 있다.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얽히고 섥힌 이해 관계 때문이다.

우리 나라의 노인은 얼마나, 왜 가난한가?

빈곤율001

노인들의 삶의 어려움을 나타내는 지표 중 하나는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그냥 ‘노인 빈곤율’이라고도 함)이다.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이렇게 계산된다. 한 사회의 65세 이상 노인을 연간소득 기준으로 한 줄로 세웠을 때, 딱 가운데 해당되는 소득(중위 소득이라고 함)의 50% 미만인 계층이 65세 노인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노인 빈곤율은 49.6%로, 위 표에서 보듯이 OECD 회원국 중 단연 1등이다. OECD 국가 평균이 12.6%이니, 그것의 거의 네 배나 되는 수준이다. 그런데, 18-25세 인구층이나 25-65세 인구층에서는 우리나라의 상대적 빈곤율이 OECD 국가 평균보다 낮다. 이는 우리나라에 가난한 사람들이 다른 OECD 국가들에 비해 많은 편이 아닌데 유독 노인층에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왜 그럴까? 다음 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시사한다.

빈곤율2001

시장 소득을 기준으로 산출한 노인 빈곤율을 보면 우리나라가 61.3%로 다른 OECD 회원국들에 비해 다소 낮은 편이다. 시장소득이란 요소 소득(근로소득+사업소득+재산소득)과 사적 이전소득(퇴직금, 개인연금 등)을 합한 소득을 말한다.

그런데 가처분 소득을 기준으로 산출한 노인 빈곤율은 우리나라가 49.6%로 다른 OECD 회원국들에 비해 매우 높다. 가처분 소득이란 시장 소득과 공적 이전 소득(공적연금 등)을 합한 것에서 비소비지출(소득세, 사회보험료 등)을 뺀 소득을 말한다.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에 있어 노인층에게 주어지는 공적 이전 소득이 노인 빈곤율을 현저하게 낮추고 있는 반면 우리 나라에서는 공적 이전 소득이 작아서 노인 빈곤율을 별로 낮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가난한(가처분 소득이 아주 작은) 노인들이 무척 많다. 그 이유는 일하는 노인들이 적어서가 아니라 노인들에게 주어지는 공적 이전 소득이 작기 때문이다.

이 자료들은 노인에 대한 공적 이전 소득을 늘리는  길이 우리 사회의 노인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특히 노인 인구 비율이 현저하게 높은 호남 지방에는 노인층에 대한 공적 이전 소득의 확대가 절실하다고 판단된다. (윤영민, 2015/12/30)

교육을 다시 생각한다

 

교육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그것이 수행해야하는 사회적 역할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교육(혹은 공공의 교육 기관)은 네 가지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한다.

첫째, 삶의 질(quality of life)을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 학생들의 인지 능력과 인성(품)을 높임으로써 그것이 가능해 진다. 둘째, 삶의 기회(life chances)를 높이는데 기여해야 한다. 사회적 상승 이동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셋째, 민주주의를 실천한 시민(citizens)을 육성해야 한다. 민주국가에서 시민 육성은 근대적 공민교육이 분명하게 지향하는 목표이다. 넷째, 국가 경쟁력 제고에 기여해야 한다. 학교, 특히 대학은 국가 경제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고 창조적인 연구를 수행해야 한다. 교육 제도와 현실을 평가하고 대안을 수립할 때는 이 네 가지 측면을 적절히 고려해야 한다.

  • 삶의 질 향상

학교에서는 무엇보다도 독립된 인격체로서 세상을 사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skills), 철학, 그리고 태도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점이 교육의 본원적 기능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학교 교육이 글을 읽고 쓰고 숫자를 계산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도움이 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지능력을 넘어서 창의력이나 종합적 사고력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있는 지는 의문이다.

더구나 학교 교육이 현실 문제의 해결 능력을 길러주는 지는 더욱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시험문제를 푸는 능력은 높아지는데, 개인적으로는 물론이고 동료와의 협력을 통해서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다.

철학과 태도 교육은 더욱 빈곤하다. 학교 교육이 경쟁심만 부추기고 각자 도생 능력만 높일 뿐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웃을 배려하는 성품, 그리고 동료나 이웃과 협력하는 기술과 능력을 길러주는데는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대학 교육비는 물론이고 중고등학교 교육비가 과도하게 커서 학생 본인과 부양자의 삶의 질을 크게 떨어트리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녀의 삶의 질을 확보해 주기 위해서 부모의 삶의 질을 떨어트려야 하는 상황이다. 자녀의 미래가 부모의 현재를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 삶의 기회 향상

현대 사회에서 학교는 사회적 지위의 변화나 재생산이 일어나는 장소이다. 낮은 사회 계층에게는 사회적 상승 이동의 통로가 되고, 특수층에게는 사회적 지위를 대물림하는 수단이 된다. 학교가 지위 대물림 수단이 되는 현상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학교가 계층 상승 이동의 관문이 되도록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얼마 전까지도 우리 교육은 “개천에서 용이 나게” 했다. 그러나 교육제도가 점차 사회적 상승이동의 통로 대신에 사회적 지위 재생산의 도구가 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서민은 물론이고 웬만한 중산층마저 감당하기 어려운 교육비(사교육비 포함), 특수층 자녀에게 유리한 대학입시제도 등이 계층을 뛰어넘는 경쟁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 민주시민 육성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는 정치제도이다.  학교는 민주주의 교육장이어야 한다. 시민으로서 갖추어야 할 지식과 태도를 교육할 뿐 아니라 비판, 토론, 협의, 합의 등 실제 민주적 절차와 관행이 학생들의 몸에 충분히 밸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

또한 학교는 서로 다른 계층간의 교류가 일어나는 공간이어야 한다. 서로 다른 계층 출신의 아이들이 만나서 서로 이해, 공감, 협력하는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한다. 그래야 우리 민족이 하나의 민주적 공동체로 유지될 수 있다.

민주주의 교육장으로서의 학교가 지닌 역할은 특히 취약하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정치가 발전하지 못하는 가장 중대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교육이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 국가경쟁력 제고

경제가 글로벌화되면서 국가간, 그리고 기업간 경쟁이 치열해졌다. 글로벌한 경제 환경에서 교육은 국가 경쟁력의 제고라는 또 다른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특히 대학은 연구를 통해서 새로운 기술개발에 앞장 서야 하고 국가 경제가 필요로 하는 전문 인력을 배출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교육은 이점에서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지금까지의 ‘추격 경제’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를 육성하는데 우리 교육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우리 교육은 인지능력 제고, 경쟁심 고취, 그리고 인내심과 순응적 태도를 배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그러한 교육이 ‘선도 경제’에서도 충분할 지는 의문이다.

21세기의 선도 경제에서 필요한 창의, 공감, 그리고 협력 능력을 기르는데는 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되며, 대학에서의 창의적인 연구도 투입 대비 효과가 대단히 낮은 실정이다.

우리 교육제도를 개선시키기 위해서는 이러한 인식을 토대로 구체적인 정책 대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윤영민, 2015/12/28)

우리가 살기 힘든 진짜 이유

  1. 우리 나라의 경제발전 수준이 낮지 않다. 물가를 반영한 우리 나라의 실질 국민소득(PPP GDP 35,400달러)은 일본, 영국, 뉴질랜드, 이탈리아, 이스라엘 등과 같은 수준이다.
  2. 우리 나라의 전체적인 소득 불평등 수준이 나쁘지 않다. 지니계수가 3.2 정도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프랑스, 캐나다와 비슷한 수준이다.
  3. 우리의 가계지출구조가 취약하다. 2015년 유럽연합의 한 보고서에 의하면 우리 나라 가구의 가계비 지출 중 교육비(6.7%)와 통신비(4.3%) 비율이 매우 높다. 아마도 학생 자녀를 둔 대부분의 가정은 실제로 대부분 그보다 훨씬 높은 비율의 교육비를 지출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상당히 많은 가정이 주택구입으로 인한 채무에 대한 원리금 상환 부담을 안고 살고 있다.
  4. 사회보장 제도가 취약하여 삶의 불확실성이 대단히 크다. 2014년 GDP 대비 복지 지출이 10.4%로 세계 주요국가 20개국 중 멕시코(7.9%) 다음으로 낮다. 참고로 프랑스는 31.9%, 일본은 23.1%, 미국은 19.2%이다. 2011년 기준 노인 빈곤율은 48.6%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2012년 기준 45.2%로, OECD 국가 평균인 65.9%에 훨씬 못미친다.
  5. 우리 나라는 개인(혹은 가족)이 삶의 무거운 짐을 대부분 져야한다. 교육, 사회적 성취, 취업, 주거, 기초 생활, 노후, 노부모 부양 등의 부담이 개인에게 주어진다. 국가나 사회 공동체의 역할이 너무 작다.
  6. 사람들이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학교 시험, 대학 입시, 취업, 승진, 사업 등 인생 동안 끝없는 경쟁에 시달린다.

이러한 현실은 국민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 위해 국가가 가져야할 정책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시사한다. (윤영민, 2015/12/27)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

경제민주화유종일
유종일 교수(KDI 국제정책대학원)가 손석춘 박사와의 대담을 통해서 경제민주화를 알기 쉽게 풀어주었다. 유 교수에 의하면 경제민주화는 공정경쟁, 분배정의, 참여경제라는 세 키워드로 정리된다.
‘공정 경쟁’은 대기업, 특히 극히 소수의 재벌기업에 의한 시장의 교란을 바로 잡아 자유와 창의를 살려내자는 주장이고, 분배정의는 마르크시즘이나 사회주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려는 대안이며, 참여경제는 자본의 독점적 지배를 극복하고 노동자, 시민, 소비자가 당당한 경제주체로 참여하는 경제를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 책은 딱딱한 경제 해설서가 아니다. DJ와 노무현이라는 민주정부의 지도자와의 경험을 경제민주화라는 관점에서 복기하고 있다. 유 교수 개인의 편향이 다분히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국가 운영을 회고하는데 누구라도 그런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다.
한 나라의 경제제도가 교과서에서 불쑥 튀어나오지 않는다. 역사 속에서 형성된다. 역사는 힘이 되기도 하고 넘을 수 없는 제약이 되기도 한다. 경제민주화의 시대를 가려면 과거의 유산을 잘 이해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얇지만 소중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실로 돌아와보면,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에서 경제민주화를 왜곡시킨 장본인들이 여전히 야당의 핵심부에 포진하고 있다. 만약에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들은 다시 대통령을 둘러싸고 인의 장막을 구축하려 할 것이다. 4.11 총선 당시 민주당의 공천에서 그 조짐이 드러났다. 권력을 남용해 총선에서 민주당의 참담한 패배를 초래하고 대선마저 지금과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그들은 대의 추구보다는 권력 장악이 우선인 집단이다. 모피아와 일부 ‘친노’가 야합해서 새 정부를 장악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과연 문재인 후보가 얼마나 그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까? 과연 문재인 후보에게 그런 결단을 내릴 정도로 경제민주화에 관해 깊이 있는 이해와 의지가 있을까? 의문스럽다.
우리나라에서 경제민주화는 더 많은 희생을 필요로 하고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할 지도 모르겠다. 경제민주화는 아직 시기상조인지도 모른다. (윤영민, 2012/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