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관한 몇 가지 진실(1): 일과 잉여

매월 급여 명세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화를 누르기 쉽지 않다. 정부가 가져가는 세금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라. 세금이 많아서가 아니다. 내 몸에 빨대를 꽂고 있는 잉여들, 세금 도둑들 때문이다.

세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은 “쓸데없는 일은 ‘일’이 아니라 ‘잉여’다” 라는 명제이다. 적어도 정부 부문에 관한 한 “쓸데없는 일”는 형용모순이다. 쓸데없는 일은 일이 아니다.

정부에 관해서 ‘쓸모’에 대한 판단 기준은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민 혹은 주민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가, 둘째는 그 일을 직접 수행하는가이다. 이 두가지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잉여이다.  실내에서 하는가 실외에서 하는가, 기획인가 집행인가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관련이 없다.

(일과 잉여의 구분에 대한 예시)

1. 환경미화

일: 동네 쓰레기통에 버려진 쓰레기의 수거 행위

잉여:  쓰레기를 치우라고 지시하는 행위, 쓰레기 수거를 민간 업체에게 용역을 주고 관리하는 행위

2. 재난 예방

일: 태풍이 몰아 닥칠 때, 취약 지역, 취약 가구를 방문하여 피해가 일어날 요인을 줄이는 작업

잉여: 면사무소 안에서 확성기를 통해서 피해 방지에 유념하라고 방송하는 행위

3. 사회복지

일: 취약 가구를 방문하여 노약자를 살피고 도와주는 행위

잉여: 사회복지정보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외부 업체에 용역을 주는 행위

4. 교육

일: 학생을 지도하는 행위

잉여: 교사나 학교 운영을 감독하는 행위

5. 범죄 예방

일: 동네와 마을 순찰을 도는 행위

잉여: 마을 CCTV 설치와 관리 업무를 외부업체에게 용역 주는 행위

6. 정책 수립과 예산

일: 정책을 기획하고 예산을 수립하는 행위

잉여: 정책 기획과 예산 수립을 용역화 하는 행위

몇 가지 사례를 보았다. 어떤 공무원의 업무가 일인가 잉여인가를 판단하는 업무는 잉여이다. 그것은 머슴(공무원)의 역할이 아니라 주인(국민 혹은 주민)의 역할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정부는 수백년 묵은 잘못된 공무원 제도 때문에 발생하는 잉여가 너무 많다. 왕정과 독재정은 오래 전에 종식되었지만 그 시대에 형성된 관료 제도와 문화가 온존되어 왔다. 더구나 안정성 중심의 관료체제는 21세기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과 너무 맞지 않다.

지금과 같은 신분보장=정년보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직업공무원제도 아래에서는 세상이 빨리 변할수록 정부 내에 잉여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한다. 신분보장=정년보장이 신분보장=임기보장이라는 원칙으로 바뀌어야 한다. 약간의 예외를 둘 수는 있겠지만 공무원제도의 기본틀이 임기제 혹은 계약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정부는 ‘용역’ 국가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현재도 정부의 일 중 상당 부분이 용역화된다. 공무원은 용역 관리자이고 외부 업체가 실제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용역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대신에 그 정책이 꼭 필요하다면 그 정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아예 해당 정책을 수행하는 부서 전체를 모듈식으로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관료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대안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한 가지만 손질하면 가능하다. 정년보장이라는 제도를 없애고 모든 공무원을 임기제 혹은 계약제로 바꾸는 것이다. 만약 전문성이 필요해서 장기 계약이 필요한 경우라면 그런 자리는 보수를 낮게 책정하고, 반대로 계약 기간이 짧은 자리는 보수를 더 많이 주어서 보상에 균형을 맞춰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이긴자가 다 가져가는 방식으로는 정부의 잉여를 줄일 길도, 효율적인 정부를 실현할 길도 없다.

인간의 지식은 쉽게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반드시 많은 노력을 들여서 학습을 해야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업그레이드에 한계가 있다.  인간은 언젠가 여러가지 이유로 적응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Fortran과 DOS를 배워서 컴퓨터를 시작한 기술자에게 AI 개발 업무를 맡긴다고 상상해 보라. 그냥 그것은 불가능하다.

정부 내에서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요술 방망이가 바로 ‘용역’이다.  용역 관리자는 얼마든 변신이 가능하다. 심지어 자신이 용역을 내주는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실제로 그런 경우가 흔하다–용역을 관리할 수 있다. 업무 수준이 엉터리일 것이 불을 보듯하고 벤더(vender)들의 손바닥에서 놀아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말이다.

용역 관리를 감독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면 감독자들도 그 업무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거대한 용역 비즈니스가 발생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서 잉여로 가득찬 용역 정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일하는 공무원은 많아도 무방하다. 비용은 좀 많이 들지만 국민, 주민이 편해진다.

그러나 잉여는 과감히 제거되어야 한다. 아마도 그러면 정부 예산의 3분의 1정도, 잘하면 절반 정도는 절약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천년 래의 사회혁명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두 종류의 사회계급이 존재한다. 공무원과 일반인이다.  헌법에는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으로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이 나라의 주인은 공무원이다. 머슴이 주인 자리를 차리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들은 제 위치에 돌려보내고 국민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21세기의 진정한 혁명이다. (2018-08-25)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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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은 중요하다. 스스로 어떤 잘못을 했는가를 살피는 일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반성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우리의 뇌가 소극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이상적인 기준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후회스런 기준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못지않게 무엇을 잘 했는가를 발견하고 그 점을 최대한 키워나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이 점점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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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게 하니 문제가 생기는구나.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도 필요하지만, “야, 이렇게 하니 잘 되는구나. 앞으로도 꼭 그렇게 해야지.”라는 의지를 불태우는 자세도 꼭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두뇌와 근육의 신경세포를 적극적, 긍정적 모드로 바꾸는 비결이리라. (윤영민, 2018-07-09)

손, 펜, 그리고 글

너무 오래 컴퓨터로 글을 쓰다보니 손글을 잃어버렸다.  그 변화는 단지 필기구만 달라진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예전에는 깊이 생각한 후에 글을 썼다. 평소에 메모는 해두었지만 그것을 엮어서 글로 만드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었다. 더 이상 크게 손질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생각이 잘 정리된 후에 원고지나 노트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그런데 워드로 글을 쓰면서부터는 키보드를 두드리며 비로소 본격적으로 생각하고 생각을 정리한다.  그리고 긴 편집 시간을 갖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머지않아 커리어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부담이 작용했는지 모르겠다) 최근 문득 문득 다시 손으로 글을 쓰고싶다는 충동이 일곤 했다. 그러다 엊그제는 맘을 크게 먹고 수성펜 세 자루를 샀다.

그런데, 어제 우연치고는 상당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래 전 석사 학위 지도 학생이었던 제자로부터 몽블랑 펜을 선물받은 것이었다. 그것은 25년이 넘는 커리어에서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기품있는 필기구였다.

과연 과분한 선물을 받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그 제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랜 전부터 내게 만년필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그에게 차마 돌려준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약속했다. 앞으로 그 펜으로 글을 쓰겠노라고.

행복한 우연이다. (윤영민, 2018-05-24)

대학에서의 사회과학 수업, 어떻게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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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사회과학 수업에서 교수는 자신이 강의하는 사회 문제나 쟁점에 대해 ‘정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학 수업에서는 중고등학교 때처럼 표준화된 교과서식 해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강의하는 교수가 분석 문제나 쟁점에 대해 자신의 의견이나 입장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교수는 자신의 목소리(주장) 톤을 최대한 낮춘다. 그래야 학생들이 사회 현상에 대해 다양한 이론과 입장을 분석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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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이, 교수가 학생이라는 포박된 청중(captive audience)에게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공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게 되면, 강의는 추종자, 비판자, 그리고 무관심한 자를 생산하는 설득 행위가 되어 버린다. 강의가 일종의 상품 광고로 전락해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대학에서 교수는 학생들로 하여금 사회 문제나 쟁점에 관련된 다양한 관점, 입장, 이론, 사실 등을 검토하도록 요구한다. 교수들은, 학생이 무슨 의견이나 입장을 갖고 있는가보다 학생이 자신의 의견, 입장, 혹은 느낌을 얼마나 기품있게 제시할 수 있는가에 주목한다. 학생에게 그러한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 대학 교육의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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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강의실은, 교수의 ‘정견’ 발표장이 아니듯, 학생들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그것은 흔히 선입견이나 편견이곤 한다–을 확인하거나 강화하는 장소가 아니다. 물론 이 말은 학생들이 자신의 신념이나 의견을 주장해서는 안되는다는 의미가 전혀 아니다. 그보다는 교수나 다른 학생들의 의견과 입장을 존중하는 열린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은 서로 다른 생각이나 입장을 가진 타인(교수, 학생 등)을 만나서 자신의 생각을 형성하고, 발전시키며, 수정한다. 수업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학생들은 남을 존중하는 자세를 갖고 토론에 임해야 한다. 물론 이는 교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교수도 학생들을 존중해야 한다는 말이다.

매년 신입생을 마주하면, 나 스스로 대학교육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교수와 학생은 어떤 관계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좋은 반성의 기회이다. (윤영민, 2018-04-15)

 

사이버 폭력–해법 없는 야만

사이버 폭력은 영어로 online violence (혹은 cyber-bullying)로 불리기도 하고 online harassment로 불리기도 한다. 폭력(violence)은 법적으로 명백한 범죄이지만 harassment(괴롭힘)은 범죄일 수도 있고, 단순한 도덕적 혹은 윤리적 일탈일 수도 있다. 이 표현상의 애매함은 사이버 폭력에 내재한, 해소될 수 없는 모순 혹은 이중성을 보여주며, 나아가 그것이 지닌 사회적 심각성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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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형태의 사이버 폭력이 ‘괴롭힘’이고 심각한 형태의 사어버 폭력이 ‘폭력’인 것이 아니다. 그 두 용어가 단지 사이버 폭력의 강도를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것은 가해자 입장에서 보는가 아니면 피해자 입장에서 보는가를 질적으로 구분해 주는 용어로 봐야 한다. 가해자 입장에서는 ‘괴롭힘’도 있고 ‘폭력’도 있겠지만, 피해자 입장에서는 오직 ‘폭력’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재밌자고 한 말인데요.” “화가 나서 그냥 한 마디 한 것 뿐이에요.” “좀 튀어볼라고 쓴 것 뿐인데.”

사이버 폭력 가해자를 인터뷰할 때 듣게 되는 전형적인 반응들이다. 가해자들은 사이버 폭력을 전혀 문제가 될 게 없는 행동으로 인식하거나 기껏해야 가벼운 일탈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가해자 입장에서는 피해자를 비아낭거리거나 다소 심한 농담을 한 정도, 좀 더 심하면, 약간 화를 내거나 욕설을 퍼붓는 행위, 아주 심각한 경우라해야 침을 뱉거나 따귀를 때리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가해자는 그것을, 주먹으로 상대가 부상을 당할 정도로 때리거나 둔기를 내려치는 범죄, 더구나 칼로 찌르는 행동 같은 중대한 범법 행위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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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는 달리 사이버 폭력의 피해자들 대부분–그것을 좀 넉넉하게 받아들이자는 문재인 대통령은 소수의 예외에 속할 것이다–은 사이버 폭력이 심각한 사회 범죄라고 생각한다. 가해자 개개인은 가벼운 비난이나 욕설만을 했어도 그렇다. 수백명, 수천명, 혹은 수만명이 비난과 욕설을 쏟아내면 그것을 담담하게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사이버 폭력으로 인한 심리적, 나아가 사회적 피해는 워낙 위중하다. 피해자는 오랜 기간 극도의 분노, 좌절, 공포에 사로 잡히고, 불면증은 물론이고 위통, 근육통 등 신체적 이상이 수반되기도 한다. 명사들의 경우 그 피해가 심리적 혹은 신체적 상태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로 인해 그들은 직장이나 직업을 잃고 영원히 사회적으로 매장되기도 한다. 명사들에게는 명예나 이미지가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명예를 잃거나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은 사회적 죽음이나 다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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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폭력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그러한 의식 격차(awareness gap)는 사이버 폭력의 해결을 어렵게 만드는 가장 중대한 요인 중 하나일 것이다. 소리 한번 지르거나 침 한번 뱉었는데 상대가 죽어버리는 현상이 사이버 폭력이다.

사이버 폭력은 인터넷 야만(野蠻)이다. 사이버 폭력의 피해자는, 때로 성폭력, 성추행, 혹은 성희롱을 저지른 성범죄 혐의자일 수 있고, 때로 범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동을 했을 수 있으며, 때로 남이 저지른 비행에 대해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일 수도 있고, 때로 특정 사회적 사건과는 관계없는 엉뚱한 사람일 수도 있다. 문제는 흔히 아직 진실이 밝혀지기도 전에 ‘피해자’에 대한 일종의 여론 재판이 끝나 버리곤 한다는 사실이다. 법적 판결을 받기도 전에 이미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사형’이 집행되어버리곤 한다는 사실이다. 그 재판에서 선고는 사형 뿐이고 집행은 즉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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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에 대해서든 집단에 대해서든 타인에 대한 직접적인 복수나 응징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 그것은 명백한 범죄 행위이다. 범죄에 대한 판단과 처벌은 오직 국가의 사법기구만에게만 부여되어 있으며 반드시 법률에 따라야 한다(죄형법정주의). 경찰이나 검찰이 범죄를 인지하거나 범죄 피해자의 고발이나 고소가 있으면 사법기구가 범죄를 조사하고 적법한 절차에 따라 재판하며 피해자를 대신해서 형을 집행한다. 그리고 그 형은 범죄 행위에 대해 적절한 수준이어야 한다. 2-3년 정도 실형을 살아야 하는 범죄자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할 수는 없다. 현대 문명사회에서 사법권은 국가에게만 배타적으로 주어지고 사법부는 사회 정의(正義)의 최종 담지자이다.

그런데 인터넷에서는 범죄의 직접적인 피해자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범죄 혐의자(혹은 그렇게 추정되는 사람)에게 충동적이고 무책임한 심판과 처벌이 발생한다. 제어되지 않은 대중의 분노–그것은 왕왕 근거가 잘못 된 것이곤 하다–가 순식간에 한 사람의 사회적 생명을 끝장내 버린다. 거기에는 적법한 절차, 적절한 형량, 정당한 집행 따위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그것은 집단적 린치이다.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 개개인은 양심의 가책은 커녕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사소한’ 댓글 한 마디 올렸을 뿐인데, 수백, 수천의 댓글들이 합쳐져서 당하는 사람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린치요 형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가 문명 사회에 살고 있다면 그러한 사회적 범죄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언론의 자유도 아니고 표현의 자유도 아니다. 당하는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그냥 흉악한 범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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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야만인 사이버 폭력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 사이버 폭력이 인터넷 사용자의 자율적인 방법이나 교육을 통해서 해결될 것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사이버 폭력에 대한 가해자와 피해자의 의식 격차가 너무 크며, 사이버 폭력은 대단히 가볍고 충동적이며 순식간에 발생해 버리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에 대한 법적 처벌을 엄격하게 한다고 해결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가해 행동의 성격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피해의 정도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사이버 문화의 향상이나 교육을 통한 인식의 제고가 필요하겠지만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는 공간에 대한 통제가 필수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인터넷 포털, 인터넷 매체, SNS 운영 업체에 대해 예방 책임을 부여해야 할 것이다. 사실 무분별한 댓글이 방치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그 업체들의 상업적 동기이다.

모든 인터넷 포털, 인터넷 언론, SNS에 대해 실명제를 의무화하는 것을 고려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실명제를 도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벼운 비난, 퍼나르기, 신상털이는 실명으로도 얼마든 행해진다. 페이스북의 경우 사용자가 실명은 물론이고 자신의 얼굴까지 공개하고 있지만 사이버 폭력이 발생하고 있지 않는가. 더구나 관련 업체들은 언론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에 대한 탄압이라고 거세게 저항할 것이다. 그런데 실명제가, 정부가 그 저항을 강제로 잠재우고 시행할 정도로 효과적인 제도인지 의문이다.

답답하다. 과연 사이버 폭력에 대한 효과적인 해법은 없을까? (윤영민, 2018-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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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사회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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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니아꽃

사피니아를 심었다. 새로운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폴리스(polis, 도시국가)에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폴리스를 통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사회적(혹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에 꽃을 심는 나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더 크게 공감한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내게 왜 푸른산에 사느냐 물으니)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미소로 답하고 한가로움을 즐기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이 강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과는 다른 천지 아닌가)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자연과 일체가 된 이백은 인간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찌질한 사람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백의 심정이 이해 된다.

인간이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기보다 관계적 존재이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끝없이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대체로 그 대상이 사람이지만 사실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꽃일수도 나무일 수도 있고, 고양이나 개일수도 있으며, 책이나 펜일수도 있고, 스마트폰이나 PC일수도 있다. 앞으로는 그것이 로봇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관계이든 상호 요구가 존재한다. 그 요구는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단순한 기대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요구에 응답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상호 요구와 응답은 부담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는 웃사람의 요구와 아랫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배우자, 자식, 부모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우리와의 관계 속에 들어온 비인간적(non-human) 존재도 요구(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곤 하지만 사실 비인간적 존재의 요구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특정 존재가 지닌 관계의 비중이 커질수록 요구도 그만큼 증가한다.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베란다나 정원에서 가꾸는 화초, 나무, 채소, 심지어 돌까지도 각각 나름의 요구가 있다. 집안 곳곳에 비치한 장식품은 아니 그런가. 수시로 먼지를 털어내고 잘 닦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인간을 넘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사물까지 분석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actor-network)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무척 설득력 있게 보인다. 그 이론이 비인간 행위자 중 테크놀로지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백처럼 깊은 산속에서 산다고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관계가 더욱 뚜렷해진다. 꽃, 나무, 돌, 풀, 이끼, 벌레, 해, 달, 별, 비, 심지어 바람과도 예사롭지 않는 관계 속에 들어간다.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진다고 삶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

죽음 이후에 맺게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하련다. 살면서 맺게 되는 관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충분히 괴롭고, 충분히 즐겁고, 충분히 부담스럽고,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는가.

정원에 피는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그것은 인연이다.

내가 때때로 시를 찾는 이유

다쳐서 병원에 누운 아들에게 릴케를 가져다 주었다. 왜 시를 읽어야 하냐면서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나는 왜 시를 읽는걸까.

꽃을 심고선 아니 필까 걱정하고

꽃이 피면 질까 걱정하네

꽃이 피는 것도 꽃이 지는 것도 모두 걱정을 만드니

꽃 심는 재미를 모르겠구나. (<고려한시 3백수>, 154쪽)

꽃을 가꾸던 이규보(1168-1241)의 심정이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 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9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한 목소리가 전해질 수 있겠는가.

 개울은 나직이 노래를 하고

먼지와 도시는 먼 곳에 있다.

우듬지는 여기저기 눈짓을 하여

나를 지치게 한다.

숲은 깊고 세상은 멀다.

나의 마음은 맑고도 크다.

창백한 고독이 그의 무릎에

나의 머리를 포근히 눞혀 준다. (<릴케시집>)

“개울은 나직이 노래를 하고 먼지와 도시는 먼 곳에 있다….창백한 고독이 그의 무릎에 나의 머리를 포근히 눞혀 준다.” 개울을 바라보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한 심정이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을까. 시가 아니라면 오래 전 먼 독일에 살았던 시인과 이렇게 공명할 수 있겠는가.

이규보와 릴케가 지닌 언어와 정서의 구조가 나의 것과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시에 공감하는데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짜릿함을 즐기는데 그 정도의 댓가야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는 마음을 울리는 노래이다. 귀를 울리지 않는 대신에 천년을 넘나들 수 있다. 그 정도면 가까이 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사회과학 에세이를 잘 작성하려면

학생들의 중간시험을 채점하고 났더니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을 충분히 주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관식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논술 형식을 갖추어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오직 서너명의 학생들만이 형식적 요건을 충족한 답안을 제출했다.

학생들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객관식 문제들에 대해 잘 대답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학생들이 대체로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왜 주관식 문제를 답하는데 압도적 다수가 실패했을까? 고등학교 때 논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 그런 문제를 풀 때 고등학교에서 배운 논술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회과학에 필요한 논리 전개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것일까?

대학원생 때 학부 교양 과목 조교를 하면서 겪은 어이없는 경험이 생각난다. 그 때도 중간 시험이었다. 시험 감독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답을 나열식으로 작성하면 안되나요? 저는 2시간 동안에 에세이를 작성할 수 없는데요.”

담당 교수가 분명히 에세이로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그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미국에 유학 온 지 최소한 2년이 넘은, 그것도 미국에서 입학이 가장 까다로운 학교 중의 하나에 재학 중인 학생이 영어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 학생 뿐이 아니다. 나는 대학생들의 논리 전개 능력 부족을 수업 시간의 대화에서도, 집 아이들의 글이나 말에서도 무척 자주 경험한다. 그래서 대학생들을 위해 에세이 작성 방법을 간략히 소개하기로 했다. 그것은 말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회과학 에세이의 기본 형식

위 그림에 사회과학 에세이의 기본 형식을 간명하게 제시했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모든 주장에 서론-본론-결론의 3단 형식을 갖추라. 에세이 전체로는 당연히 3단 형식을 갖추어야 하지만, 서론, 본론, 결론 각 부분 자체에도 3단 형식을 갖추고, 심지어 모든 단락(paragraph)도 가급적 3단 형식을 갖추도록 한다.

둘째, 사회과학 에세이는 실증적이어야 한다. 본론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 증거가 꼭 자신이 수집한 것일 필요는 없으며, 꼭 학문적 연구 결과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반드시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각 부분을 살펴 보자면, 우선 서론에서는 에세이에서 공략할 주제를 제시하고, 그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쟁점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여러 가지 관점, 연구결과, 혹은 이론을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하여 서술하면 좋다.  다음에 자신이 에세이에서 초점을 맞출 연구 문제(research question)를 질문의 형태로 서술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주장(가설)을 제시한다. 그 주장(가설)은 에세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

본론에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가설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경험적 증거를 구할 것인지에 대해 언급한다. 엄격한 과학적 에세이가 아니라면, 꼭 자신이나 타인의 과학적 연구 결과가 아니라도 괜찮다. 신뢰할만한 언론의 보도, 상업적 조사기관의 연구 결과, 혹은 전문가의 견해가 인용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주어진 여건 아래에서 최상의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자신의 주장이나 가설이 너무 추상적일 경우 그 주장(가설)을 보다 덜 추상적인 주장(가설)으로 쪼개고, 각각의 주장(가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본론의 뒷 부분에서 결과를 종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에세이에서 자신이 수행한 검증이 다른 사람들의 발견과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에 대해 논의한다.

결론에서는 주제와 연구문제에 대한 자신의 발견(주장과 검증 결과)을 간략히 서술하고하고, 그것이 지닌 주제에 대한 함축성, 나아가 사회적(혹은 학술적) 함축성을 제시한다. 끝으로 자신의 에세이가 지닌 한계에 대한 언급을 덧붙인다.

모든 사회과학 에세이가 이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에세이의 목적이나 상황, 그리고 작성자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변종이 가능하다. 논리 전개의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어떤 요소는 빠지기도 하고, 어떤 요소가 추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생 때는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히는 게 좋다. 글을 쓸 때든 말을 할 때든 사회과학도로서 주장을 할 때는 이러한 형식이 자연스럽게 갖춰지도록 해야한다. 응용은 그 다음이다.

두 사회학자의 언론 기고를 첨부한다. 질박한 문체의 글 하나와 화려한 문체의 글 하나이다. 위에서 제시한 형식을 가지고 두 글을 분석해 보기 바란다.

신광영 교수(중앙대 사회학과)의 한겨레신문 기고

송호근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의 중앙일보 기고

세월호 그리고 공감….

empathy

아들아, 아빠가 생각할 때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능력은 공감(empathy)이다. 그것은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동정과는 다르다. 물론 동정도 칭찬받을만한 마음이고 태도이지만 공감이란 그 보다 훨씬 훌륭한 모습이다.

공감이란 얼마 전에 너도 읽었던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Harper Lee)가 썼다시피 “상대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다.” 그것은 단순히 남의 어려운 상태를 안타까워하고 도움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 서 보려는 노력이다.

내가 보기에 공감보다 어렵고 훌륭한 태도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저명한 미국의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Roger Ebert)는 “나는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 공감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아빠도 그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달리 반신반인이 아닌 것 같다. 두 분의 공감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 뻗쳤다. 온 세상에 있는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함께 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감이 기껏해야 자신의 가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불가능한 놀라운 공감 능력이지. 우리가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공감이 가족에게만 국한되도록 놔둘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세월호가 침몰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해 말 아빠는 누군가에게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을 일주일에 한번은 만나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실천을 못하고 있다. 그냥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작은 격려라도 되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세월호

언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데 말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말보다 행동이 필요하단다.

지금처럼 세월호 비극을 내팽개친다면 우리 나라를 문명 사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비극을 잊지 않아야 하지만, 그 아픔을 푸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럴려면 행동이 필요하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말이다. (2016/04/16)

라플라스, 수학이 자유를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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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나의 새로운 역할 모형(role model)이다. 역할 모형을 갖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인가. 그는 1749년 3월 23일에 태어나 1827년 3월 5일 서거했다. 78세.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던, 인류 역사상 가장 극심한 격변과 혼란의 시대에 그는 오래 살았다. 그런데 가장 부러운 부분은 그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점이 아니라(장수가 부럽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말년에도 학문적 성과를 계속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래와 같은 베이즈 정리의 일반 공식을 발표한 것도 60세가 넘어서였다.

이 방정식을 말로 설명하면, 사건 가 발생했을 때 그것의 원인이 일 확률 는, 원인 가 주어졌을 때 사건 가 발생할 확률 에, 이것이 일어날 확률에 대한 최초의 추정치인 를 곱한 수를 가능한 모든 원인에서 사건 가 발생할 확률(사건 의 전체 확률)로 나눈 값과 같다.

뿐만이 아니다. 확률이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극한정리(Central Limit Theorem)을 발표한 것도 61세 때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마이다스(Midas)가 손을 대는 것마다 모두 황금으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라플라스가 손을 대는 것마다 모두 수학으로 바뀌었다. 수학 자체는 물론이고, 천체 역학,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통계학, 군사학, 인구학, 법학, 사회과학 그리고 신의 존재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모두 수학적 탐구 대상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의 전공이 무엇이었나고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의 영혼은 결코 어느 한 학문 분야에 갇힐 수 없었다. 그의 호기심은 지칠 줄 몰랐고, 그는 수학이라는 도구를 가지면 세상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 같다.

계량 사회과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회학자로 간주되는 던컨(Odis Dudley Duncan)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평생 방법론을 공부했던 이유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라플라스는 바로 그러한 자유인이 아니었을까. 전공이 무어냐는 물음이 모욕이 되는 학문적 유목민 말이다. 오늘날이라고 그런 유목민이 존재할 수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