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의 꽃

김종량 이사장이 란을 보내주었다. 작별의 꽃이다. 사립대에서 교수에 대한 인사권은 재단 이사장에게 있다. 그래서 김 이사장이 란을 보냈을 것이다.

23년 전 한양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될 때 김 이사장은 총장이었다. 면접 때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이 기억난다. 내 이력서에 적힌 신문 컬럼 리스트를 보고 그가 내게 물었다.

“이 컬럼들은 윤 박사가 모두 직접 쓴 것인가요?”

나는 그 질문에 적잖이 당혹했지만 짧지만 확고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게 그와의 인연, 그리고 한양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임용된 지 2년 반쯤 되었을 때 그는 나를 불러서 한양대의 인터넷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한양’이라는 부서를 부총장 직속기구로 만들고 그 조직의 장이 되었다.

나는 안산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인터넷 한양 업무는 서울캠퍼스에서 수행해야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김 총장은 내게 잠실에 있는 학교 아파트 한 채를 내주었다.  4년 동안 내가 한양대 인터넷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있어 김 총장은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그 동안 학과 운영과 수업이 뒷전에 되어버린 탓에 나는 학생들에게 무척 미안했다.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했던 나는 총장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고 보직을 그만 두었다. 건강 문제도 있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총장의 ‘애정’을 ‘배신’했고 그와의 ‘각별’했던 인연이 끝이 났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한양의 1천5백명의 교수 중 평범한 1인이 되었다.

돌이켜보니 한양을 위해 내가 좀 더 기여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인터넷을 변신시킨 것말고 나는 어떤 점에서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사장께는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그래서 저 작별의 난은 내게 다소 각별한 느낌이 든다. 이사장은 그저 이번에 퇴직하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난을 보내도록 지시했을 뿐이겠지만 말이다. (2020-01-24)

친구의 마음

몇 달 전 전주에 사는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그는 거실 벽의 그림을 보더니 너무 어둡다고 밝은 그림으로 바꾸어 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지만 플란테이션 노동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커피 찌꺼기로 형상화한 부조여서 분위기가 좀 어두웠다. 내가 좋은 생각이라고 응수했더니 자기가 소장한 그림 중 하나를 장기대여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면 좋지요”라고 건성으로 응답했다.

작가 미상

그런데 그 친구가 엊그제 전화를 하더니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으니 그림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상의해서 포구 그림을 선택했다.

어제 그가 그림을 가지고 와서 함께 걸었다. 거실이 한층 환해보였다.

마침 김치를 담은 날이어서 수육을 삶아 새 김치와 어리굴젓에 친구 부부와 막걸리를 한잔 했다. 늙은 나이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몇몇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2019-12-20)

어떤 사회학자의 죽음

새벽에 눈을 뜨고 갑자기 한신갑의 근황이 궁금했다. 정말 뜬금없는 일이었다. 안지는 오래되었지만 단 한번도 친근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마지막 본 것은 몇년 전 공항 대합실에서 둘째의 귀국을 기다릴 때였다. 그는  악수조차 건네지 않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우리는 그 정도로 대면대면한 사이였다. 그런데 꼭두 새벽에 그의 안부가 궁금해 진 것이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니 “2019년 9월 12일자로 한신갑(서울대교수)씨 별세”라는 부고 기사가 떴다. 그 부고를 믿을 수 없어 구글에서도 검색을 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홈페이지에 “고 한신갑 교수”라고 뜨는 걸 보니 그가 세상을 떠난 게 분명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인데….그의 사인이 궁금했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86년 미국 South Carolina 주 Columbia에 있는 USC에 유학을 가니 사회학과에 나보다 1년 먼저 유학을 와 있었다. 그와 나는 그곳의 석사과정에 1년을 함께 재학했다. 함께 강의를 수강한 적은 없고 유학생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 자리를 같이 하는 정도였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거리가 멀었다.

나중에 그가 코넬대 교수로 가 있다가 귀국해 서울대학교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언젠가 학회 세미나에서 한 번 같은 발표장에 자리한 적이 있었지만, 악수를 하고 몇 마디 인삿말을 주고받은 다음 바로 헤어졌다.

그런데 몇 년 전 그에 관한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학원생 성희롱, 갑질, 연구비 횡령에 관한 기사였다.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그의 해임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대학원생들이 그의 잘못에 대해 상세하게 적은 글을 읽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스무 가지가 넘는 죄상이 깨알 같이 적혀 있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정말 못되게 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함께 대학원에 다닐 때를 떠올려 보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20여 년의 세월이 못된 성질을 바꿀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대자보에 학생들이 써서 올린 그의 죄상에 대해 절반은 공감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비난이 많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성격이 좀 못되기는 하지만 그가 그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으로부터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복직하려고 할 때 학생들은 물론이고 동료 교수들마저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나는 나 같으면 그냥 학교를 그만 둘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때늦게 그의 부고 기사를 본 것이었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살이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돌연사가 아닐까 추측된다. 그 정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면 나 같아도 죽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원에서 수리사회학을 공부하고 사회연결망분석의 전문가가 되었다. 사회연결망분석은 당시 똘똘한 미국 사회학 대학원생들에게 인기 있는 분야였다. (나도 잠시 그 분야를 탐색하다가 지나치게 비이론적이고 데이터 의존적이라서 손을 뗐다. 전혀 흥미가 나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 사이 빅데이터 시대가 되고나고 그 분야는 온갖 학문 전공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왔다고 도래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이룰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가 다소 요란스럽게 보낸 학자로서의 일생 동안 성취한 것이 무엇인가. 긴 인류 역사에서 한 톨의 모래만큼이나 될까. 기껏해야 한번의 파도만으로도 흔적 없이 쓸려가버리는 모래성에 불과할 것이다.

나라고 다를까? 누구라고 다를까? 어쩌면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그토록 허무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이가 가깝지는 않았지만 늦게나마 그의 명복을 빈다. (2019-12-16)

떠남…(2) 대학에서의 수업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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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에 눈을 떴다.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 가르치고 싶은 게 좀 많이 남아서 정교하게 수업 시나리오를 짰다. 1분도 허비할 수가 없다. 마지막 공연이다!

이 공연이 끝나면 나는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 지구 여행에서 피할 수 없는 ‘직업’과 ‘노동’이라는 무게로부터 말이다.

남보다 1년 빠른 7살에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대학도 남보다 1년 빠른 19살에 입학하였으나 고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남보다 한참 늦은 29살에야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직장 생활 2년 6개월 하고 남보다 한참 늦은 32살에 유학을 가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고, 남보다 한참 늦은 39살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오래하게 되었지만, 사회학 분야의 세계 최고 대학원에서 걸출한 학자들로부터 직접 학문과 삶을 배우는 행운을 안았다.

그 후 예상치 않게 3년 동안이나 시간 강사와 임시직 연구원을 전전하는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남보다 한참 늦은 42살에야 겨우 대학 정규직 교원이 되었다. 나를 더욱 강하고 겸손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배려였던가.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교수직을 지병으로 인해 몇 차례 위기를 겪고 이제 남보다 1년 반 빠르게 물러난다.

교수가 된 후 6개월만에 학과장이 되었고, 2년반만에 부처장이 되었으며, 3년반만에 차관급 대통령 자문위원이 되었다. 남들은 대학 재직 30년이 넘어야 받는 홍조근정훈장을 대학 재직 5년만에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여받았다. 교수가 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초고속이었던 셈이다.

사단법인 한국정보사회학회를 창립했고, 재단법인 아시아미래재단을 만들었으며, 사단법인 한국데이터사이언스학회를 설립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위원으로 5년 이상 봉사했고,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 시민단체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저술에 있어서는 2편의 저서가 문화관광부와 대한민국 학술원에 의해 우수도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고, 10여 편의 저서와 20여 편 이상의 논문, 그리고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연구보고서를 썼다.

신문 컬럼도 많이 썼다. 어느 중앙 일간지에는 내 이름의 기명 컬럼을 20회 연재했고, 명사컬럼 필진으로도 참여했다, 많을 때는 한 해 50개 이상의 신문 컬럼을 기고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 TV 좌담,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념 대담 등 방송에도 가끔 출연했다.

정권 후반 자식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DJ가 안타까워 정부 일에 끌려들어갔다. DJ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매료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회학자가 전자정부 전문가가 되었다. 전자정부는 대통령으로서 DJ가 추진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전자정부 일을 하는 동안 20개 이상의 정보 시스템 구축을 도왔다. 공인인증서 보급 및 국가 암호기반 구축, G4C(민원 24), 국민신문고, 나이스 등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많은 세금을 들여서 구축한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를 오픈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정부의 요청을 받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덕분에 2018년에는 전자정부 50년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해 꽤나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정치가와 행정직이 자유로운 내 영혼에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고 일찍 손을 털었다.

크게 화려할 것은 없었지만 짧은 지구여행 동안 하느님이 내게 주신 능력과 기회를 최대한 살려서 원없이 달렸고 많은 행운을 누렸다. 이 여정을 허락해준 하느님과 부모님, 날 버리지 않고 38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준 아내, 결함 투성이의 아빠를 잘 참아준 세 아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그 모든 추억과 부담을 뒤로 하고 은퇴자의 삶을 시작한다. 해방이다!

 

떠남….(1)

대학을 떠난다는 사실이 드디어 실감나기 시작했다.

몇 주에 걸쳐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 7~8명과 돌아가면서 점심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수십명이 한꺼번에 모여 퇴임식을 갖기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지난 화요일(2019-12-03)에는 수업에서 만나지 못하는 학생들과 송별회를 가졌다. 주로 3~4학년 학생들이 참석했다.

학교 앞 미스터피자에서 작별모임을 끝내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함께 피자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신입생 O.T.에서 나를 처음 만났던 자리를 기억하는 학생들, 연구실에서의 개인 면담을 기억하는 학생들, 특정 과목의 수업 때문에 나를 기억하는 학생들, 2015년 필암 집 방문을 기억하는 학생들….학생들이 나와 얽힌 다양한 모습을 회상해 주었다.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으랴.

그 송별연에서의 대화와 소그룹의 학생들과 나누었던 대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몇 가지만 기록해 두어야겠다. 그것은 교수가 자신의 수업을 얼마나 정성들여 진행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여러 학생들이 고등학생 때 ‘수포자’였다가 내가 가르치는 통계 수업을 듣고 통계에 자신이 생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들은 사회조사분석사 시험을 치겠다거나 심지어 데이터 분석 분야로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며 희망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그들은 내게 가르치는 일에 대해 커다란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학생들이 한두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실 몇 년 전 사회통계 수업을 맡게 되면서 나는 하나의 결심을 했다. 학생들에게 통계는 물론이고 그에 관련된 수학을 배우는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회과학 전공을 택한 적지 않은 학생들이 소위 수포자인데, 그들이 즐겁게 통계를 배우게 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아마도 그 학생들은 중고등학교에서 이런 경험을 했을 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 선생님은 “이것은 여러분이 초등학교에서 다 배웠지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이것은 여러분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다 배운 내용이지요?” 혹은 최악의 경우에는 “여러분 이것 다 학원에서 배웠지요?” 하면서 수업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다져주지 않은 채 진도를 나가는 경험 말이다. 대학에서마저 그렇게 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새로운 수학 지식을 획득할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어도 70~80%의 학생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지 않는 한 학생들이 강의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무엇이든 추가해 가르치기로 했다. 그것이 엑셀 사용법이든 아니면 수학이든. 진도를 나가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학생들이 강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학생은 이 얘기를 내게 꼭 들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왔다면서 학기 중간 강의 평가에 대한 경험을 얘기했다. 원래 강의평가는 익명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자신이 쓴 강의 평가 내용을 밝혔다. 30여 년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강의평가에 자신은 엑셀을 처음 배워서 잘 따라가지 못하니 강의를 천천히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썼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간시험 기간 후 내가 수업에서 엑셀로 문제를 푸는 과정을 눈에 띄게 천천히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 이런 교수님도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학생들의 강의 평가를 그다지 성실하게 읽지 않은 교수이다. 특히 최근에 도입된 학기 중간 강의 평가를 나는 통상 읽지 않는다. 수업으로부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서이다. 그런데 이번 학기는 예외적으로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그 학생이 쓴 강의 평가를 보고 내가 학생들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간시험 기간 후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강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수업에서 그 변화를 느낀 것이었다.

그 학생이 고맙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수업 중 교수의 그 작은 변화를 그렇게 크게 느끼다니….

한 학생은 깨알 같은 글씨로 쓴 긴 내용의 편지를 주었다. 아마도 지난 10여년 동안 내가 받아본 가장 정성스러운 손편지가 아닌가 싶다. 편지는 내 수업들이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학생은 공부를 아주 잘 한다. 내 생각에 그는 학자적 자질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중간에 좌절하지 말고 꾿꾿하게 학문의 길을 간다면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학생의 편지를 오래 오래 간직해야겠다.

그 학생은 평소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그렇게 깊은 생각이 숨어있을 줄이야. 섬뜩하다!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고 임했던 수업들도 많았는데….학생들을 대할 때는 어느 순간에도 정성을 다해야 하거늘.

1백 여년 전 외증조부님은 당신이 가르치던 기숙 서당에서 한밤 중에 불이 났는데 학생들을 구하다 당신 생명을 잃었다. 그 정도의 정성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하는 건데 나는 그보다 한없이 부족했다. 부끄럽다. 내 후손 중 혹시 다시 선생이 나온다면 외증조부님만큼 지극 정성으로 학생을 사랑하길 바란다.

재직하는 동안 내가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쏟아놓은 기억의 토막들은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교수가 나름 가치와 보람이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더욱 열심히 지도하는 건 데….후회 막급이다. 그런데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학생들이 선물해 준 꽃다발은 내가 일생 받아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다. 화병에 꽃을 옮겨 놓던 아내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학생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서 더욱 그러했으리라.

아내가 학생들이 선물해준 꽃다발을 화병에 옮겨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다음 주가 마지막이다. 어떻게 끝내면 좋을까? 힘이 들어서 이번 주로 수업을 마치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배우겠다는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학생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해줘야겠다. (2019-12-05)

가을 단상

앞뜰 단풍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앞뜰이 붉고 노랗다. 길건너 서원 뜰의 단풍도 붉은 빛, 우리 집 울타리 남천도 붉은 빛이다. 거기에 잔디가 금빛으로 바뀌어 가며 가을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늦가을 정원에서는 크게 할 일이 없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화분들을 따뜻한 실내로 옮기고 수전들이 얼지 않도록 중간 밸브를 잠그고 용처가 사라진 물 호스들을 잘 말아서 창고에 보관하는 정도의 소소한 일이 있을 뿐이다.

실내에서도 청소와 같은 일상적 일이 있을 뿐이다. 지난 겨울에 창호를 삼중창으로 대폭 교체해 단열을 강화했고, 거실에 냉난방기를 들여오고 늘어난 전기 수요에 대비해 태양광 발전기를 추가로 설치했다. 태양광 발전이 시간당 6kw가 되었으니 아마도 난방을 대부분 전기로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되면 기름 보일러나 벽난로를 거의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름 보일러는 비용이 많이 들고 벽난로는 관리에 손이 많이 간다.

집의 외양도 중요하고 정원의 풍경도 중요하지만 집이란 무엇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해야 한다. 물론 폭풍우에 안전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데 관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러한 기본이 보장되는 집은 없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지은 집이라도 몇 년 지나지 않아 틈이 생기고 낡은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집이 그 일부인 자연의 이치이다.

때문에 집짓기 못지 않게 보수와 유지가 중요하다. 내가 홀연히 떠나더라도 집이 잘 유지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겠다는 계획을 내년에는 모두 실행해 놓아야겠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늘에 뜻과 후손들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고 가야할 것이다. 작은 집과 집안의 역사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이라.

계절도 가을이지만 내 삶도 가을이다. 계절이 바뀜이 슬퍼할 대상이 아니듯이 인생의 흐름도 슬퍼할 대상이 아니다. 모두 잠시 왔다가는 여행일 뿐이다. 아쉽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렇다고 여행이 슬프기까지는 않은 것처럼. (2019-11-07)

명예퇴직을 신청하다

지난 10월 28일 학교 당국에 명예퇴직서를 제출했다. 며칠 동안 고민을 한 끝에 그렇게 하는 것이 현재 나로서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한양대에 마흔둘에 입사해 육십다섯에 퇴직하니 남들보다 한참 늦게 들어가서 남들보다 조금 일찍 나오는 셈이다. 정보사회학과 학생들이 모두 졸업할 때까지 남아주지 못해 학생들에게 미안할 뿐 그 외에는 전혀 아쉬움이 없다. 내가 학과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정보사회학과 생기면서 한양에 부임했고, 내가 학과를 없애지 않았지만 정보사회학과 없어지면서 한양을 떠난다.

한양에 들어가면서, 길어야 25년이 되지 않을 교수생활이니 좌고우면하지 말고 이곳에서 커리어의 승부를 내자는 내 결심이 별로 잘못되지 않았던 것 같다. 대학당국은 내게 충분한, 아니 분에 넘치는 자유와 존중을 주었고 학생들은 내 열정에 잘 호응해 주었다. 남부럽지 않은 호사였다. 대학원이 약한 점은 아쉬웠지만 어느 직장에 간들 그 정도의 아쉬움이 없겠는가.

지난 해 11월 21일 여기에 공적 생활을 마감한다는 글을 올리고(공적 생활을 마감하며….) 직업 이외의 공적 활동을 끝냈으니, 1년만에 직장 생활을 마감하는 글을 올리게 되었다. 내년 3월부터는 거의 사적인 생활만 남는다.

아마도 내게는 은퇴의 충격이 그렇게 크지 않을 것이다. 이미 8년 전부터 은퇴 후의 삶을 기획하고 추진해 왔으니,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나름 단단히 준비했다는 생각이다. 아름다우면서도 그닥 불편하지 않은 곳에 새로운 터전을 잡았고, 시골생활에 대한 적응을 충분히 했다. 넉넉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자식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을 정도의 재정도 확보했다. 시골에서는 대도시에 비해 생활비가 훨씬 적게 든다는 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은퇴 후에는 수입을 늘리려고 애쓰기 보다는 수입에 맞춰 사는 게 현명할 것인데 시골생활은 그점에서 크게 이롭다.

멀리 떨어진 직장에 다니면서 전원생활을 유지하기 쉽지 않았지만 12년을 그렇게 살았다. 국내 최고 명의라는 의사가 회복불능이며 머지않아 시력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라는 진단을 내린 지 13년이 되었지만 나는 앞을 잘 보고 있다. 내 눈을 7~8년 동안 보살펴 준 지금의 주치의는 2년 전 내게 “난 당신이 녹내장이라는 사실도 의심스럽다”고 의아해 했다. 시신경이 급속히 죽어가는 현상이 멈춰 버린 것이다.

육십 전에 실명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는데 지금까지 앞을 잘 보면서 강의를 해왔고 이렇게 멀쩡히 글을 쓰고 있다. 거의 기적같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깨끗한 공기와 맑은 물, 그리고 작은 스트레스의 전원생활을 빼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 한번도 녹내장 약을 쓴 적이 없고 수술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현대 의학이 내 눈에 해준 게 없다.

큰 질병에 관해서는 세 주체의 역할이 있다는 생각이다. 하느님이 하시는 역할, 의사가 하는 역할, 그리고 환자 자신이 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나는 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의사는 별로 한 일이 없다. 그렇다면 오늘날 내 눈의 건강은 하느님의 선처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건강으로 인한 몇 차례의 고비를 잘 넘기고 교수생활을 마치게 되어 정말 기쁘다. 정년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오래하지 않았는가. 하느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전임 교수로서 한달 보름 정도의 강의가 남았다. 학생들에게도 내게도 즐거움이 가득한 수업이 되도록 해야겠다.  (2019-11-02)

은목서 향기는 집을 감아돌고

은목서꽃

집에 내려오니 은목서 향기가 나를 반긴다. 팔각정의 창문을 열어두면 곱고 강렬한 향이 집안을 가득 채운다. 바야흐로 은목서의 계절이다.

8년 전에 이식한 은목서가 많이 자라 가지 끝이 지붕 자락 근처까지 올라왔다. 아마도 내년에는 지붕 끝에 닿을 것이다. 팔각정에 비치는 서향 햇빛을 막으려 심은 나무인데, 가을에는 향기가 덤이다.

은목서 안에는 벌레가 많은 지 작은 새들도 많이 날아든다. 이제 태풍도 지나갔으니 내일 아침에는 테라스에서 차를 마셔도 좋으리. 커피에 진한 꽃향기와 경쾌한 새소리가 더해 질 것이다. (2019-10-03)

공적 생활을 마감하며…

time to retire public engagement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나는 인간의 삶에는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구 행성에서의 여정은 길지 않다. 기껏해야 1백년 미만이다. 그나마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보내는 활동적인 기간만 계산한다면 길어야 50년을 넘지 않는다. 정말 눈 깜박할 사이이다.

지구에는 오기도 어렵고 떠나기도 쉽지 않다. 이 행성에 오려면 반드시 누군가의 자궁(혹은 그와 유사한 인공환경)에서 아이로 태어나야 하고 적어도 20년은 부모의 품에서 자란다. 떠날 때도 훌쩍 가는 경우는 드물고 대체로 늙고 병들어서 외롭고 힘든 세월을 보낸 후에야 다른 별로 갈 수 있다. 당연히 나도 그렇다.

내게는 이제 늙고 병든 때가 왔다. 활동적인 시기에 하던 여러 가지 일들을 남은 생에서도 계속 해야 하는가에 대해 냉정히 새겨보아야 한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생에서는 그동안 내가,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고 가면 지구 여행이 잘 마무리 될 것이다.

나는 이 세상을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겠다는 생각을 내려 놓는다. 한국전쟁 이후 가난과 혼란 속에 태어난 우리 세대는 가난과 혼란을 벗어나는 과제의 일부를 떠맡아야 했다. 사회적으로나 가정적, 혹은 개인적으로 그러했다. 절대적 가난에서 벗어나야 했고, 보다 민주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했다.

우리 사회의 가난과 혼란을 극복하는 데 있어 나는 결코 남보다 더 기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신 독재에 저항하다 어려운 대학 시절을 보냈고, 대학 교수가 된 이후에도 내 시간과 능력의 3분의 1을, 돈을 버는 목적이 아닌,  순수하게 사회적으로 가난과 혼란을 극복하는 데 사용하겠다는 원칙을 지키며 20여년을 보냈다.

최근에 건강 상태가 내게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낸다. 이제 그러한 공적, 정치적 삶을 마무리하고 여생을 온전히 나와 가족, 그리고 가까운 이웃을 위해 보내라는 신호로 해석된다. 진정한 의미의 은퇴를 의미하는 그 시그날을 나는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세상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각 세대에게는 그 세대가 짊어져야할 짐(과제)이 주어진다. 한 세대가 모든 문제를 다 풀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다. 다음 세대가 져야할 짐은 과감하게 다음 세대에게 넘겨야 한다. 아쉬움은 많지만 아쉬움에 붙들리면 미련이 되고 집착이 된다.

“여보, 당신 요즘 산책하면서 정치 얘기를 통 하지 않네요.” 며칠 전 아내가 궁금한 표정으로 내게 운을 건넸다. 산책 중 수학 얘기를 계속하다 아내에게서 심한 나무람을 들은 후였다.

이상이 아내의 의문에 대한 간략한 답변이다. 은둔자의 삶이 시작된다.  그 삶이 낯설기는 하지만 지구에서 보내는 여정의, 또 하나의 소중한, 그리고 마지막 부분이 될 것이다. (윤영민, 2018/11/12)

세상에 관한 몇 가지 진실(1): 일과 잉여

매월 급여 명세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화를 누르기 쉽지 않다. 정부가 가져가는 세금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라. 세금이 많아서가 아니다. 내 몸에 빨대를 꽂고 있는 잉여들, 세금 도둑들 때문이다.

세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은 “쓸데없는 일은 ‘일’이 아니라 ‘잉여’다” 라는 명제이다. 적어도 정부 부문에 관한 한 “쓸데없는 일”는 형용모순이다. 쓸데없는 일은 일이 아니다.

정부에 관해서 ‘쓸모’에 대한 판단 기준은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민 혹은 주민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가, 둘째는 그 일을 직접 수행하는가이다. 이 두가지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잉여이다.  실내에서 하는가 실외에서 하는가, 기획인가 집행인가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관련이 없다.

(일과 잉여의 구분에 대한 예시)

1. 환경미화

일: 동네 쓰레기통에 버려진 쓰레기의 수거 행위

잉여:  쓰레기를 치우라고 지시하는 행위, 쓰레기 수거를 민간 업체에게 용역을 주고 관리하는 행위

2. 재난 예방

일: 태풍이 몰아 닥칠 때, 취약 지역, 취약 가구를 방문하여 피해가 일어날 요인을 줄이는 작업

잉여: 면사무소 안에서 확성기를 통해서 피해 방지에 유념하라고 방송하는 행위

3. 사회복지

일: 취약 가구를 방문하여 노약자를 살피고 도와주는 행위

잉여: 사회복지정보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외부 업체에 용역을 주는 행위

4. 교육

일: 학생을 지도하는 행위

잉여: 교사나 학교 운영을 감독하는 행위

5. 범죄 예방

일: 동네와 마을 순찰을 도는 행위

잉여: 마을 CCTV 설치와 관리 업무를 외부업체에게 용역 주는 행위

6. 정책 수립과 예산

일: 정책을 기획하고 예산을 수립하는 행위

잉여: 정책 기획과 예산 수립을 용역화 하는 행위

몇 가지 사례를 보았다. 어떤 공무원의 업무가 일인가 잉여인가를 판단하는 업무는 잉여이다. 그것은 머슴(공무원)의 역할이 아니라 주인(국민 혹은 주민)의 역할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정부는 수백년 묵은 잘못된 공무원 제도 때문에 발생하는 잉여가 너무 많다. 왕정과 독재정은 오래 전에 종식되었지만 그 시대에 형성된 관료 제도와 문화가 온존되어 왔다. 더구나 안정성 중심의 관료체제는 21세기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과 너무 맞지 않다.

지금과 같은 신분보장=정년보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직업공무원제도 아래에서는 세상이 빨리 변할수록 정부 내에 잉여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한다. 신분보장=정년보장이 신분보장=임기보장이라는 원칙으로 바뀌어야 한다. 약간의 예외를 둘 수는 있겠지만 공무원제도의 기본틀이 임기제 혹은 계약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정부는 ‘용역’ 국가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현재도 정부의 일 중 상당 부분이 용역화된다. 공무원은 용역 관리자이고 외부 업체가 실제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용역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대신에 그 정책이 꼭 필요하다면 그 정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아예 해당 정책을 수행하는 부서 전체를 모듈식으로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관료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대안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한 가지만 손질하면 가능하다. 정년보장이라는 제도를 없애고 모든 공무원을 임기제 혹은 계약제로 바꾸는 것이다. 만약 전문성이 필요해서 장기 계약이 필요한 경우라면 그런 자리는 보수를 낮게 책정하고, 반대로 계약 기간이 짧은 자리는 보수를 더 많이 주어서 보상에 균형을 맞춰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이긴자가 다 가져가는 방식으로는 정부의 잉여를 줄일 길도, 효율적인 정부를 실현할 길도 없다.

인간의 지식은 쉽게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반드시 많은 노력을 들여서 학습을 해야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업그레이드에 한계가 있다.  인간은 언젠가 여러가지 이유로 적응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Fortran과 DOS를 배워서 컴퓨터를 시작한 기술자에게 AI 개발 업무를 맡긴다고 상상해 보라. 그냥 그것은 불가능하다.

정부 내에서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요술 방망이가 바로 ‘용역’이다.  용역 관리자는 얼마든 변신이 가능하다. 심지어 자신이 용역을 내주는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실제로 그런 경우가 흔하다–용역을 관리할 수 있다. 업무 수준이 엉터리일 것이 불을 보듯하고 벤더(vender)들의 손바닥에서 놀아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말이다.

용역 관리를 감독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면 감독자들도 그 업무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거대한 용역 비즈니스가 발생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서 잉여로 가득찬 용역 정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일하는 공무원은 많아도 무방하다. 비용은 좀 많이 들지만 국민, 주민이 편해진다.

그러나 잉여는 과감히 제거되어야 한다. 아마도 그러면 정부 예산의 3분의 1정도, 잘하면 절반 정도는 절약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천년 래의 사회혁명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두 종류의 사회계급이 존재한다. 공무원과 일반인이다.  헌법에는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으로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이 나라의 주인은 공무원이다. 머슴이 주인 자리를 차리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들은 제 위치에 돌려보내고 국민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21세기의 진정한 혁명이다. (2018-08-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