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사회적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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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니아꽃

사피니아를 심었다. 새로운 인연을 맺은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폴리스(polis, 도시국가)에서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폴리스를 통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을 사회적(혹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원에 꽃을 심는 나를 표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백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더 크게 공감한다.

問余何事棲碧山(문여하사서벽산, 내게 왜 푸른산에 사느냐 물으니)

笑而不答心自閑(소이부답심자한, 미소로 답하고 한가로움을 즐기네)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복사꽃이 강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니)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인간 세상과는 다른 천지 아닌가)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자연과 일체가 된 이백은 인간이 아닌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는 찌질한 사람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백의 심정이 이해 된다.

인간이란 “사회적(정치적) 동물”이라기보다 관계적 존재이다. 사람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끝없이 어떤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대체로 그 대상이 사람이지만 사실 꼭 사람일 필요는 없다. 그것은 꽃일수도 나무일 수도 있고, 고양이나 개일수도 있으며, 책이나 펜일수도 있고, 스마트폰이나 PC일수도 있다. 앞으로는 그것이 로봇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관계이든 상호 요구가 존재한다. 그 요구는 이해관계일 수도 있고 단순한 기대일 수도 있다. 인간은 그 요구에 응답하면서 세상을 살아간다. 상호 요구와 응답은 부담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다. 직장에서는 웃사람의 요구와 아랫사람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고, 가정에서는 배우자, 자식, 부모의 요구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우리와의 관계 속에 들어온 비인간적(non-human) 존재도 요구(와 기대)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간과하곤 하지만 사실 비인간적 존재의 요구도 만만치 않다. 게다가 특정 존재가 지닌 관계의 비중이 커질수록 요구도 그만큼 증가한다.

애완동물은 물론이고, 베란다나 정원에서 가꾸는 화초, 나무, 채소, 심지어 돌까지도 각각 나름의 요구가 있다. 집안 곳곳에 비치한 장식품은 아니 그런가. 수시로 먼지를 털어내고 잘 닦아주어야 하지 않는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데 인간을 넘어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사물까지 분석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행위자-연결망(actor-network) 이론은 그런 의미에서 내게 무척 설득력 있게 보인다. 그 이론이 비인간 행위자 중 테크놀로지에 너무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이백처럼 깊은 산속에서 산다고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다. 사실 오히려 관계가 더욱 뚜렷해진다. 꽃, 나무, 돌, 풀, 이끼, 벌레, 해, 달, 별, 비, 심지어 바람과도 예사롭지 않는 관계 속에 들어간다.

사람과의 관계가 사라진다고 삶의 관계가 사라지지 않는다. 적어도 생명이 다할 때까지 우리는 관계를 맺는다.

죽음 이후에 맺게되는 관계에 대해서는 함구하련다. 살면서 맺게 되는 관계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는가. 충분히 괴롭고, 충분히 즐겁고, 충분히 부담스럽고,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는가.

정원에 피는 꽃은 그냥 꽃이 아니다. 그것은 인연이다.

내가 때때로 시를 찾는 이유

다쳐서 병원에 누운 아들에게 릴케를 가져다 주었다. 왜 시를 읽어야 하냐면서 인상을 찌푸린다. 그런데 나는 왜 시를 읽는걸까.

꽃을 심고선 아니 필까 걱정하고

꽃이 피면 질까 걱정하네

꽃이 피는 것도 꽃이 지는 것도 모두 걱정을 만드니

꽃 심는 재미를 모르겠구나. (<고려한시 3백수>, 154쪽)

꽃을 가꾸던 이규보(1168-1241)의 심정이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 시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9백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생생한 목소리가 전해질 수 있겠는가.

 개울은 나직이 노래를 하고

먼지와 도시는 먼 곳에 있다.

우듬지는 여기저기 눈짓을 하여

나를 지치게 한다.

숲은 깊고 세상은 멀다.

나의 마음은 맑고도 크다.

창백한 고독이 그의 무릎에

나의 머리를 포근히 눞혀 준다. (<릴케시집>)

“개울은 나직이 노래를 하고 먼지와 도시는 먼 곳에 있다….창백한 고독이 그의 무릎에 나의 머리를 포근히 눞혀 준다.” 개울을 바라보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고독한 심정이 어찌 내 마음과 똑같을까. 시가 아니라면 오래 전 먼 독일에 살았던 시인과 이렇게 공명할 수 있겠는가.

이규보와 릴케가 지닌 언어와 정서의 구조가 나의 것과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그들의 시에 공감하는데 약간의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짜릿함을 즐기는데 그 정도의 댓가야 지불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는 마음을 울리는 노래이다. 귀를 울리지 않는 대신에 천년을 넘나들 수 있다. 그 정도면 가까이 해야할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을까.

사회과학 에세이를 잘 작성하려면

학생들의 중간시험을 채점하고 났더니 아쉬움이 남는다. 시간을 충분히 주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주관식 문제에 대해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다. 논술 형식을 갖추어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오직 서너명의 학생들만이 형식적 요건을 충족한 답안을 제출했다.

학생들이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객관식 문제들에 대해 잘 대답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학생들이 대체로 공부를 열심히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왜 주관식 문제를 답하는데 압도적 다수가 실패했을까? 고등학교 때 논술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을까? 그런 문제를 풀 때 고등학교에서 배운 논술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사회과학에 필요한 논리 전개에 대한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것일까?

대학원생 때 학부 교양 과목 조교를 하면서 겪은 어이없는 경험이 생각난다. 그 때도 중간 시험이었다. 시험 감독을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에서 온 유학생이었다.

“답을 나열식으로 작성하면 안되나요? 저는 2시간 동안에 에세이를 작성할 수 없는데요.”

담당 교수가 분명히 에세이로 작성해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에 그것은 허용될 수 없었다. 미국에 유학 온 지 최소한 2년이 넘은, 그것도 미국에서 입학이 가장 까다로운 학교 중의 하나에 재학 중인 학생이 영어가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사실 그 학생 뿐이 아니다. 나는 대학생들의 논리 전개 능력 부족을 수업 시간의 대화에서도, 집 아이들의 글이나 말에서도 무척 자주 경험한다. 그래서 대학생들을 위해 에세이 작성 방법을 간략히 소개하기로 했다. 그것은 말로 자신의 주장을 제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회과학 에세이의 기본 형식

위 그림에 사회과학 에세이의 기본 형식을 간명하게 제시했다. 핵심은 두 가지이다.

첫째, 모든 주장에 서론-본론-결론의 3단 형식을 갖추라. 에세이 전체로는 당연히 3단 형식을 갖추어야 하지만, 서론, 본론, 결론 각 부분 자체에도 3단 형식을 갖추고, 심지어 모든 단락(paragraph)도 가급적 3단 형식을 갖추도록 한다.

둘째, 사회과학 에세이는 실증적이어야 한다. 본론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 증거가 꼭 자신이 수집한 것일 필요는 없으며, 꼭 학문적 연구 결과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반드시 독자가 수긍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각 부분을 살펴 보자면, 우선 서론에서는 에세이에서 공략할 주제를 제시하고, 그 문제에 대한 지식이나 쟁점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여러 가지 관점, 연구결과, 혹은 이론을 서로 상충하는 두 가지 입장으로 대별하여 서술하면 좋다.  다음에 자신이 에세이에서 초점을 맞출 연구 문제(research question)를 질문의 형태로 서술하고, 그에 대해 자신의 주장(가설)을 제시한다. 그 주장(가설)은 에세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

본론에서는 자신의 주장이나 가설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먼저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경험적 증거를 구할 것인지에 대해 언급한다. 엄격한 과학적 에세이가 아니라면, 꼭 자신이나 타인의 과학적 연구 결과가 아니라도 괜찮다. 신뢰할만한 언론의 보도, 상업적 조사기관의 연구 결과, 혹은 전문가의 견해가 인용될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주어진 여건 아래에서 최상의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자신의 주장이나 가설이 너무 추상적일 경우 그 주장(가설)을 보다 덜 추상적인 주장(가설)으로 쪼개고, 각각의 주장(가설)에 대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본론의 뒷 부분에서 결과를 종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 에세이에서 자신이 수행한 검증이 다른 사람들의 발견과 어떻게 같거나 다른지에 대해 논의한다.

결론에서는 주제와 연구문제에 대한 자신의 발견(주장과 검증 결과)을 간략히 서술하고하고, 그것이 지닌 주제에 대한 함축성, 나아가 사회적(혹은 학술적) 함축성을 제시한다. 끝으로 자신의 에세이가 지닌 한계에 대한 언급을 덧붙인다.

모든 사회과학 에세이가 이 형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에세이의 목적이나 상황, 그리고 작성자의 스타일에 따라 다양한 변종이 가능하다. 논리 전개의 순서가 바뀌기도 하고, 어떤 요소는 빠지기도 하고, 어떤 요소가 추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학생 때는 기본기를 충실하게 익히는 게 좋다. 글을 쓸 때든 말을 할 때든 사회과학도로서 주장을 할 때는 이러한 형식이 자연스럽게 갖춰지도록 해야한다. 응용은 그 다음이다.

두 사회학자의 언론 기고를 첨부한다. 질박한 문체의 글 하나와 화려한 문체의 글 하나이다. 위에서 제시한 형식을 가지고 두 글을 분석해 보기 바란다.

신광영 교수(중앙대 사회학과)의 한겨레신문 기고

송호근 교수(서울대 사회학과)의 중앙일보 기고

세월호 그리고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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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아빠가 생각할 때 인간이 지닌 가장 고귀한 능력은 공감(empathy)이다. 그것은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동정과는 다르다. 물론 동정도 칭찬받을만한 마음이고 태도이지만 공감이란 그 보다 훨씬 훌륭한 모습이다.

공감이란 얼마 전에 너도 읽었던 <앵무새 죽이기>에서 하퍼 리(Harper Lee)가 썼다시피 “상대의 몸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다.” 그것은 단순히 남의 어려운 상태를 안타까워하고 도움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상대의 입장에 서 보려는 노력이다.

내가 보기에 공감보다 어렵고 훌륭한 태도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저명한 미국의 영화 평론가 로저 이버트(Roger Ebert)는 “나는 문명의 가장 근본적인 특성이 공감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아빠도 그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이다.

예수님이나 부처님은 달리 반신반인이 아닌 것 같다. 두 분의 공감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에 뻗쳤다. 온 세상에 있는 타인의 고통을 그대로 함께 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감이 기껏해야 자신의 가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범인으로서는 상상하기 불가능한 놀라운 공감 능력이지. 우리가 예수님이나 부처님처럼 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공감이 가족에게만 국한되도록 놔둘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은 세월호가 침몰한 지 2주년이 되는 날이다. 지난 해 말 아빠는 누군가에게 세월호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을 일주일에 한번은 만나겠다고 약속했는데 아직 실천을 못하고 있다. 그냥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작은 격려라도 되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세월호

언어는 힘을 지니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데 말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말보다 행동이 필요하단다.

지금처럼 세월호 비극을 내팽개친다면 우리 나라를 문명 사회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비극을 잊지 않아야 하지만, 그 아픔을 푸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럴려면 행동이 필요하다. 작은 움직임이라도 말이다. (2016/04/16)

책에 관한 열 가지 지혜: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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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DOE Library 서가. 수백만 권의 책이 꽂힌 서가에 앉아 있다보면 무엇보다 겸손해진다.

아이들에게 책에 관한 지혜를 들려주고 싶다. 그 지혜를 실천에 옮기는가는 온전히 그들 자신에게 달려 있다.

첫째, 세상의 진리는 오직 책에 담겨 있다. 인류 최고의 스승, 최고의 지혜는 오직 책을 통해서 만날 수 있다. 노자, 석가모니, 예수, 무함마드, 소크라테스, 피타고라스….이순신, 아인쉬타인 등등. 책을 통하지 않고 만날 수 있는 현자를 한 명이라도 말해 보거라. 현자의 지혜는 스스로 글을 써서 남겼거나, 누군가가 책에 남겨 놓았다. 그렇지 않은 지혜는 모두 잊혀졌다.

책에 대해서 다른 소리를 하는 사람을 상대하지 말라. 그는 둘 중의 하나이다. 세상을 모르는 자거나 너를 속이려는 자이다. 진리를 영화나, 게임, 강연, 혹은 인터넷으로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은 엉터리이거나 거짓말이다.

둘째, 책의 형식에 구애받지 말라. 그것이 양피지든, 대나무든, 종이든, e-book이든 무슨 상관이냐? 시대적 기술 여건에 맞는 형식이 있을 뿐이다. 형식은 책을 읽지 않을 핑계가 될 수 없다.

셋째, 어떤 저자도 완전히 믿지 말고 어떤 저자에게도 기죽지 말라. 저자들, 특히 뛰어난 천재들은 친절하지도 착하지도 않다. 재미삼아 독자를 희롱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한다. 항상 숲 전체를 보면서 나무를 대하라. 그러면 길을 잃지(속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없다. 천재는 뽐내기를 좋아한다. 자신의 천재성을 인정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리고 천재라고 반드시 전달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다. 게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모르는 저자들도 수두룩하다.

비평가나 해설자에게 의지하려고 하지도 말라. 비평이나 해설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밥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직업적 활동일 뿐이다. 저자가 책을 통해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가를 판단하는 유일한 사람은 바로 너 자신임을 잊지 말라.

넷째, 환경을 고르지 말라.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말고 책을 읽어라. 책에 몰입하면 주위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알 수 없게 된다. 훈련하면 그것이 가능하다. 얘들아, 이점에 대해서는 나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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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DOE library reference 열람실. 이런 환경에서 책 읽기를 기대하지 말라.

다섯째, 어떤 책이든 하루에 읽는 것을 목표로 하라. 대부분의 책은 하루에 읽을 수 없다. 그러나 하루에 다 읽기를 목표로 삼으라. 그러면 놀라운 집중력이 생길 것이다. 인류 최고의 현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데 그 정도의 자세를 갖추지 않고는 결코 지혜를 얻을 수 없다. 현실에도 그렇지 않겠는가? 아인쉬타인, 달라이 라마, 혹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실제로 만났다고 생각해 보거라.

책을 하루에 다 읽지 못하는 사람은 일주일을 줘도 다 읽지 못하고, 한 달, 아니 일년을 줘도 다 읽지 못한다. 잘못된 책 읽기를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독서 방법이 올바르면 헐거운 책은 몇 시간에도 다 읽을 수 있다.

여섯째, 책 읽는 프로가 되어라. 손에 쥔 책을 어떻게 요리할 것인가를 기획하라. 인류 최고의 스승을 만나는데 그 정도 준비없이 되겠는가? 시간 계획, 대화 기획(읽는 순서), 정리 계획이 기본이다.

일곱째, 맘에 드는 책만을 읽지 말라. 편식하면 육신처럼 영혼도 영양실조에 걸린다. 맘에 들지 않은 책일수록 더 정성껏 읽어라.

 여덟째,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책을 읽지 말라. 우리가 평생 읽어봐야 도서관의 한 귀퉁이에 꽂힌 책들도 다 읽지 못한다. 내가 다니던 대학원 도서관의 본관은 책장의 길이만 84km였다. 아마도 300만권의 책은 그곳에 있었으리라.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그곳에는 32개의 도서관이 있고 책은 1천만권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미국 의회도서관과 하버드에는 그보다 더 많은 책이 있다. 책  몇 권 읽고 아는 척하지 말라. 그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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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Main Library인 DOE Library의 정면. 저 문을 들어갈 때마다 마치 교회 문을 들어가듯이 경건해졌다. 인류의 스승들이 모두 저기에 모여 있지 않는가.

아홉째, 독서는 네 인생에 있어 어떤 보장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고는 어느 분야의 리더도 될 수 없다. 독서가 행복을 가져다 주지도 않고, 출세를 보장해 주지도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지 않고는 행복하거나 존경받는 리더가 될 수는 없다.

때로 천한 영혼이 지배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운을 믿지 말라. 운이란 우연이다. 우연을 믿고 세상을 사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자는 없다.

열째,  밥은 굶어도 책 읽기를 건너 뛰지는 말라. 육신의 배고픔이야 밥 한 숟갈로 간단히 달래지지만 영혼의 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영혼은 오직 진리를 먹고 살기 때문이다. 진리는 쉽게 섭취할 수 없다. 그런데 매일 진리를 먹지 않으면 영혼이 메마른다. 육신이 음식으로 영양분을 섭취하듯이 영혼은 책을 통해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결코 손에서 책을 놓지 마라. 그러면 아무리 세상이 어렵더라도 잘 헤쳐 나갈 것이다.

라플라스, 수학이 자유를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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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시몽 라플라스(Pierre-Simon Laplace). 나의 새로운 역할 모형(role model)이다. 역할 모형을 갖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인가. 그는 1749년 3월 23일에 태어나 1827년 3월 5일 서거했다. 78세.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 혁명과 반혁명, 그리고 전쟁이 번갈아 일어나던, 인류 역사상 가장 극심한 격변과 혼란의 시대에 그는 오래 살았다. 그런데 가장 부러운 부분은 그가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점이 아니라(장수가 부럽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말년에도 학문적 성과를 계속 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아래와 같은 베이즈 정리의 일반 공식을 발표한 것도 60세가 넘어서였다.

이 방정식을 말로 설명하면, 사건 가 발생했을 때 그것의 원인이 일 확률 는, 원인 가 주어졌을 때 사건 가 발생할 확률 에, 이것이 일어날 확률에 대한 최초의 추정치인 를 곱한 수를 가능한 모든 원인에서 사건 가 발생할 확률(사건 의 전체 확률)로 나눈 값과 같다.

뿐만이 아니다. 확률이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중심극한정리(Central Limit Theorem)을 발표한 것도 61세 때이다.

그리스 신화에서는 마이다스(Midas)가 손을 대는 것마다 모두 황금으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라플라스가 손을 대는 것마다 모두 수학으로 바뀌었다. 수학 자체는 물론이고, 천체 역학, 물리학, 생물학, 지구과학, 통계학, 군사학, 인구학, 법학, 사회과학 그리고 신의 존재까지 그의 손을 거치면 모두 수학적 탐구 대상으로 바뀌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의 전공이 무엇이었나고 묻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의 영혼은 결코 어느 한 학문 분야에 갇힐 수 없었다. 그의 호기심은 지칠 줄 몰랐고, 그는 수학이라는 도구를 가지면 세상의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해답을 찾을 수 있으리라 확신했던 것 같다.

계량 사회과학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회학자로 간주되는 던컨(Odis Dudley Duncan)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평생 방법론을 공부했던 이유가 자유를 얻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라플라스는 바로 그러한 자유인이 아니었을까. 전공이 무어냐는 물음이 모욕이 되는 학문적 유목민 말이다. 오늘날이라고 그런 유목민이 존재할 수 없을까.

수학 공부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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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대학 수학 과목을 수강했다. 행렬과 벡터, 미적분을 배워야 한다는 학과장 교수님의 강제적 요구에 따라 정치외교학과 학생임에도 어쩔 수 없이 그 과목을 들어야 했다. 나중에 국제정치 이론 과목을 수강하면서 보니 게임이론을 이해하는데 행렬(matrix)에 관한 지식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40년이 넘게 흘렀다. 다시 수학 공부를 한다. 남이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세상의 문법을 이해하겠다는 순전히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서이다.

조금 어렵고 낯설기는 하지만 그런대로 할만 하다. 새로운 분야를 시작하면 누구나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다행히 어렵다는 느낌보다는 재밌다는 느낌이 더욱 강하다.

공부하는 데 세상이 참으로 편리해 졌다. 웹사이트와 유튜브를 뒤지면 온갖 학습 자료가 나오니 못할 공부가 없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수리 사회학(mathematical sociology) 교재를 보니(사진 참조) 내가 재직 중인 학과에도 수리 사회학 과목을 개설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학생들이 배우기에도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3학년 과목으로 개설하면 어떨까.

수학이나 통계학 과목은 특히 담당 교수의 역할이 큰 것 같다. 배우는 데 있어 어차피 다소간의 고통은 피할 수 없겠지만 좋은 선생을 만나면 고통이 최소화되고 즐거움이 커진다. 결국 누가 그 과목을 담당하는가가 문제이겠다. (2016/03/17)

봄이 오는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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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 잎 순

산책하는데 바람이 차갑다. 그래도 영낙없이 봄이 온다.

뜰의 꽃나무 가지에서 봄의 영웅적인 귀환을 느낀다. 미세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다. 그 미세함을 담아내는데 카메라마저도 힘겨워한다.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만족감이나 기쁨은 삶의 어떤 부분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부자가 되면 행복할 가능성이 높아질까요? 의미있는 삶, 보람있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 걸까요? 어려운 이웃 돕기, 공동체 봉사, 예술적 성취, 학문적 성취….또 무엇이 있을까요? 가족과 화목하고, 친구나 이웃과 잘 지내고….부부가 서로에게 화내지 않고….

참, 아파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일이나 직장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이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세상이 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대다수의 사람들이 직업이 없다면 기업은 어떻게 되지요? 인공지능이 고도로 발달하면 기업은 시장에서 무엇을 가지고 다른 기업들과 경쟁하게 될까요? 아이디어, 품질, 서비스에서 기업들 사이에 차별화가 가능할까요? 소비자는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선택하게 될까요?….

1시간 남짓 산책하는 동안 아내에게 너무 많은 질문을 퍼부었나보다. 머리가 아프단다.

내가 커피 원두를 갈고 정성들여서 내린 커피를 마시는 아내의 얼굴에 만족감이 읽혀진다. 아내에게는 그것이 행복한 순간이가보다. 물론 내게도 그렇다.

그렇게 보면 행복이란 분명히 특별한 게 아니다. (2016/03/13)

여의도 효과

IFC몰 지상 입구

서울은 맥박을 고동치게 한다. 특히 여의도에 가면 도전 의식이 꿈틀거리며 살아난다. 국회의사당, 방송국, 금융가….

2시간 30분이면 내 육체가 전통의 필암마을에서 여의도의 초현대식 IFC빌딩에 들어간다.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21세기 환경에서 2시간 30분만에 16세기 환경으로 돌아온다.

그 때마다 나는 문화인류학에서 말하는 데페이스망(Depaysement)을 경험한다. 전혀 다른 환경에 놓임으로써 자신이 속한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남태평양의 외딴 섬에 가서 원시부족과 함께 지내던 인류학자가 런던에 돌아오면서 경험하던 것과 유사한 정신현상을 나는 여의도를 방문하고 돌아올 때마다 경험하고 있다. 그것을 여의도 효과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그렇다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서 살고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도시와 인공환경보다 농촌과 자연환경이 내게는 훨씬 더 편안하고 훨씬 더 생산적이다. 가끔 내가 21세기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을 정도로만 서울을 다녀오면 충분하다. (윤영민, 2016/2/19)

수학의 두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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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발행된 고등학교 수학교과서 중 하나

대학원 유학 시절 5년차인 1990년 어느 날인가 학위논문 지도교수였던 Michael Hout(현재 New York University 사회학과 석좌교수)이 갑자기 나를 불렀다. 나는 당시 학과에서 대학원 조교를 하고 있었는데, 새로 입학한 한 대학원생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라는 것이었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 막막하던 나는 한국에 있던 아내에게 고등학교 수학교과서를 구입해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 교과서를 가지고 집합, 미적분, 행렬, 확률을 가르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일은 내게 정말 어려운 도전이었다! 그 학생은 중학교 3학년 이후에 수학을 배운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는 영어로 수학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수학 용어의 영어 표현을 찾아가면서 가르쳐야 했다.

어찌어찌해서 악몽같은 개인 지도가 두 달만에 끝났다. 아마도 그 (여)학생의 머리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내 엉터리 강의를 알아들었으리라. 그 여학생은 Harvard University Law School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사회학을 공부하기 위해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대학원에 다시 입학했다.

아마도 지금 그 일을 한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다. 공부를 업으로 한참을 보낸 후에야 나는 수학이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학교에서 수학의 한 가지 얼굴만을 배웠다. 바로 셈법으로서의 수학, 계산 원리와 과정으로서의 수학이다.

그런데 수학에는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수학 교과서에도, 수학 ‘정석’에도 없는 얼굴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논리 전개를 위한 도구로서의 수학이다. 나는 학교에서 그 수학을 배우지 못했다.

나는 그 때문에 나보다 학교(고등학교와 대학)에서 수학을 덜 배운 지도교수가 정작 연구에서 나보다 수학을 훨씬 잘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무한한 열등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사실 그가 사용한 수학이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문제는 자신의 주장을 수학적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할 수 있었고, 나는 할 수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수학적 표현과 씨름하면서 논리 전개를 위한 수학을 뒤늦게 공부하고 있다. 이제라도 균형잡힌 수학 능력을 갖추었으면 좋겠다. 다행스럽게도 예상했던 것보다 수학 공부가 재미 있다! (윤영민, 2016/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