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촌단상(3): 소독

어제 늦은 오후 누군가가 오토바이를 타고 마을에 소독약을 뿌리고 있었다. 길에 나가보니 비닐 하우스를 하는 영관씨였다. 이장이 소독약과 기름을 타면 그것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분무기에 넣어 마을을 돌아다니며 뿌리는 것이었다.

여름날 저녁 무렵에는 하루살이에 모기까지 가세하여 온갖 벌레들이 기승을 부리곤 한다. 그것을 잠재우는데 소독약이 효과가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누군가 약을 뿌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여름이 되면 마을 일에 헌신적인 몇몇 이웃들이 늘 그 일을 맡아 해준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이장은 면사무소에 가서 소독약과 기름을 받아오고 이 사람 저 사람이 차나 오토바이에 분문기를 매달고 다니면서 약을 분사한다.

마을은 하나의 공동체이다. 주민들이 함께 힘을 합쳐 해야할 일들이 적지 않다. 눈치우기, 방재, 모정(시정) 수리, 당산나무 낙엽 치우기 등등. 전원에 살려면 그런 역할을 기꺼이 떠맡아서 해야 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치껏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

자기 집에만 쏙쏙 들락거리면 결국 외톨이가 된다. 외톨이로는 전원에서의 생존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생존력을 높이려면 이웃들과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협력이 어느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니고 평소에 쌓아둔 정과 친분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웃들과 마을 일을 함께 하고 나서 막걸리 한 잔을 하는 것보다 더 기분 좋은 경우는 흔치 않다. 그것은 생존을 넘어서는 하나의 즐거움이다. (2020-07-09)

귀촌 단상(1)

주위 사람들은 내가 귀촌한 지 얼마 안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은 제법 되었는데도 말이다.

경기도 분당 도심에 살다 건강 악화로 이천시 마장면으로 이사한 게 2009년 1월이니 어언 12년 6개월째이다. 지금 살고 있는 전남 장성으로 이사온 지도 벌써 만 8년이 되었다.

6년 동안은 이천과 장성에 두 곳에 집을 갖고 있었다. 재정적으로 부담스럽고 집 관리도 너무 힘들어 2년 전에 이천 집을 팔았다. 자식들을 생각해서 서울 근교에 집을 갖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결단을 내렸다. 그것은 지난 10여 년 동안 내가 한 가장 잘된 결정이 아니었나 싶다.

집앞을 지나가는 행인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이 정도의 집을 지으려면 돈이 얼마나 드는가이다. 궁금해 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답하기 참 난감한 질문이다. 땅값을 넣느냐, 정원을 단장하는 비용을 넣어야 하는지, 보수하고 개축하면서 들어간 비용도 넣어야 하는지, 게다가 밖으로 보이는 비용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인테리어 비용인데, 그것을 어디까지 포함해야 하는지….조건에 따라 그야말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아내와 나는 물론이고, 우리 가족 모두가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마을을 좋아한다. 사실 그러기 쉽지 않다. 가족 구성원들의 니즈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한 가지가 분명하다. 은퇴 후 살 곳을 고르는 일을 결코 서둘러서는 안된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집요하게 발품을 팔아야 한다. 몇 해가 걸릴 수도 있다. 그 사이 땅값이 치솟을 수도 있고, 인건비나 자재값이 오를 수도 있다. 그래도 서두르면 후회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에게 잘 맞는 마을이나 동네가 어떤 곳인지, 병원, 마켓, 식당 등의 편의시설에의 접근성이 어느 정도 되어야 하는지, 친한 친구들과 지낼 수 있는 거리에 있는지, 형제나 자식들과는 교류하기 쉬운 위치인지 등부터 시작해서 주위에 환경을 오염시킬 시설은 없는지, 이웃들이 외부인에 대해 배타적은 아닌지 등등 정말로 따져봐야 할 요소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조건들을 따지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자기 자신과 배우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대해 냉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좀 변하면 되지, 아내가 좀 변하면 되지, 우리가 환경에 적응하면 되지….그런 가정은 세우지 않는 게 현명하다. 60살이 넘으면 사람은 변하기 어렵다. 자기가 환경에 적응하기 보다는 자기에게 맞는 환경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모습의 집에 사는가는 그런 점들을 모두 고려한 후에 즐겁게 할 수 있는 결정이다. 집은 형편에 맞추어 마련하면 된다.

귀촌에 대한 모범답안은 없는 듯하다. (2020-07-02)

하늘이 열리는 순간

며칠 비가 내린 뒤 화창한 아침이 밝았다. 투명한 햇살을 받고 현관 밖을 나서니 마치 노아의 방주에서 내리는 기분이다. 온갖 꽃과 새소리, 그리고 초록의 향연 속으로 들어간다. 세상이 아직 바이러스의 어두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아침은 후원에서부터 시작된다.
아직 구름이 두텁지만 햇살을 막지는 못한다.

아침, 저녁으로 두번 열리는 ‘하늘의 문’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지상에서 천국을 맛볼 수 있는 순간이 아닐런지.

7월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침처럼 활짝 맑은 달이 되길 기원한다.(2020-07-01)

안개에 쌓인 미래: 포스트 시대

Jared Bowen on Twitter: "Tonight I'm a man in the mist as we meet ...

미래가 너무 불투명할 때 우리는 post-(탈, 이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이다.

2020년 6월 26일 현재 5년, 10년 후는 고사하고 1년 후, 아니 한 달이나 두 달 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짐작되지 않는다. 미래를 다루는 학자와 전문가들에게는 무척 곤혹스러운 시기이다.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covic 19)의 위기를 이겨낼 것인가? 백신은 언제나 출시될 것인가?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될 것인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 발견된 후에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출현하지는 않을까? 이상 기후는 멈출 것인가?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 이후에는 어떤 사회가 전개될 것인가? 현재와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인류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

제어되지 않은 자본주의가 낳은 불평등은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인류는 과연 그 제도를 제어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는 시대적 도전들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제도인가? 아니면 전체주의가 대안일까? 현재의 정부관료제는 숨막히는 도전들을 극복하는 역할을 과연 수행할 수 있을까? 신문과 방송이라는 대중매체가 해체된 후 우리는 어디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탈진실의 시대가 오는 것(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은 많고 해답은 거의 없다. 인류가 발명하고 유지해 온 주요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도에 대해 수많은 의문이 쏟아지고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선지자가 출현해야 하는 것일까?

post-covic 19, post-capitalism, post-democracy, post-nation-state, post-truth, post-mass-media, post-university….

Covid19 코로나 바이러스 - Pixabay의 무료 이미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어쩌면 이미 누구나 뛰어난 미래예측 능력을 가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불확실하고 급변하는 생존 환경인지도 모르겠다. 성장이나 발전이 아닌 생존의 방법을 물어야 하는 시대이다. 혹시 포스트 시대(Post era)에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0-06-26)

작별의 꽃

김종량 이사장이 란을 보내주었다. 작별의 꽃이다. 사립대에서 교수에 대한 인사권은 재단 이사장에게 있다. 그래서 김 이사장이 란을 보냈을 것이다.

23년 전 한양대학교에 교수로 임용될 때 김 이사장은 총장이었다. 면접 때 그가 내게 했던 질문이 기억난다. 내 이력서에 적힌 신문 컬럼 리스트를 보고 그가 내게 물었다.

“이 컬럼들은 윤 박사가 모두 직접 쓴 것인가요?”

나는 그 질문에 적잖이 당혹했지만 짧지만 확고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게 그와의 인연, 그리고 한양대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임용된 지 2년 반쯤 되었을 때 그는 나를 불러서 한양대의 인터넷 서비스를 획기적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나는 ‘인터넷 한양’이라는 부서를 부총장 직속기구로 만들고 그 조직의 장이 되었다.

나는 안산 캠퍼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인터넷 한양 업무는 서울캠퍼스에서 수행해야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김 총장은 내게 잠실에 있는 학교 아파트 한 채를 내주었다.  4년 동안 내가 한양대 인터넷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있어 김 총장은 아낌없이 지원해주었다.

그러나 그 동안 학과 운영과 수업이 뒷전에 되어버린 탓에 나는 학생들에게 무척 미안했다. 심리적인 압박을 견디지 못했던 나는 총장의 간곡한 요청을 뿌리치고 보직을 그만 두었다. 건강 문제도 있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총장의 ‘애정’을 ‘배신’했고 그와의 ‘각별’했던 인연이 끝이 났다. 그 후 지금까지 나는 한양의 1천5백명의 교수 중 평범한 1인이 되었다.

돌이켜보니 한양을 위해 내가 좀 더 기여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인터넷을 변신시킨 것말고 나는 어떤 점에서도 그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이사장께는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이다.

그래서 저 작별의 난은 내게 다소 각별한 느낌이 든다. 이사장은 그저 이번에 퇴직하는 교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난을 보내도록 지시했을 뿐이겠지만 말이다. (2020-01-24)

친구의 마음

몇 달 전 전주에 사는 친구가 집에 놀러왔다. 그는 거실 벽의 그림을 보더니 너무 어둡다고 밝은 그림으로 바꾸어 거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아내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지만 플란테이션 노동자의 고통스런 얼굴을 커피 찌꺼기로 형상화한 부조여서 분위기가 좀 어두웠다. 내가 좋은 생각이라고 응수했더니 자기가 소장한 그림 중 하나를 장기대여해주겠다고 했다. 나는 웃으면서 “그러면 좋지요”라고 건성으로 응답했다.

작가 미상

그런데 그 친구가 엊그제 전화를 하더니 카톡으로 사진을 보냈으니 그림 둘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이었다. 아내와 상의해서 포구 그림을 선택했다.

어제 그가 그림을 가지고 와서 함께 걸었다. 거실이 한층 환해보였다.

마침 김치를 담은 날이어서 수육을 삶아 새 김치와 어리굴젓에 친구 부부와 막걸리를 한잔 했다. 늙은 나이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몇몇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2019-12-20)

어떤 사회학자의 죽음

새벽에 눈을 뜨고 갑자기 한신갑의 근황이 궁금했다. 정말 뜬금없는 일이었다. 안지는 오래되었지만 단 한번도 친근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마지막 본 것은 몇년 전 공항 대합실에서 둘째의 귀국을 기다릴 때였다. 그는  악수조차 건네지 않고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다. 우리는 그 정도로 대면대면한 사이였다. 그런데 꼭두 새벽에 그의 안부가 궁금해 진 것이다.

네이버에서 검색하니 “2019년 9월 12일자로 한신갑(서울대교수)씨 별세”라는 부고 기사가 떴다. 그 부고를 믿을 수 없어 구글에서도 검색을 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홈페이지에 “고 한신갑 교수”라고 뜨는 걸 보니 그가 세상을 떠난 게 분명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아래인데….그의 사인이 궁금했지만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86년 미국 South Carolina 주 Columbia에 있는 USC에 유학을 가니 사회학과에 나보다 1년 먼저 유학을 와 있었다. 그와 나는 그곳의 석사과정에 1년을 함께 재학했다. 함께 강의를 수강한 적은 없고 유학생들이 모여서 식사를 할 때 자리를 같이 하는 정도였다.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거리가 멀었다.

나중에 그가 코넬대 교수로 가 있다가 귀국해 서울대학교에 부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언젠가 학회 세미나에서 한 번 같은 발표장에 자리한 적이 있었지만, 악수를 하고 몇 마디 인삿말을 주고받은 다음 바로 헤어졌다.

그런데 몇 년 전 그에 관한 뉴스가 나오기 시작했다. 대학원생 성희롱, 갑질, 연구비 횡령에 관한 기사였다. 서울대 사회학과 대학원생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나서 그의 해임을 촉구한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대학원생들이 그의 잘못에 대해 상세하게 적은 글을 읽었다.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스무 가지가 넘는 죄상이 깨알 같이 적혀 있었다. 그가 학생들에게 정말 못되게 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함께 대학원에 다닐 때를 떠올려 보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20여 년의 세월이 못된 성질을 바꿀 수도 있었을텐데하는 안타까움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대자보에 학생들이 써서 올린 그의 죄상에 대해 절반은 공감할 수 없었다. 학생들의 비난이 많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성격이 좀 못되기는 하지만 그가 그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으로부터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복직하려고 할 때 학생들은 물론이고 동료 교수들마저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때 나는 나 같으면 그냥 학교를 그만 둘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때늦게 그의 부고 기사를 본 것이었다. 사망 원인은 알 수 없지만 자살이거나 스트레스로 인한 돌연사가 아닐까 추측된다. 그 정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면 나 같아도 죽었을 것이다.

그는 대학원에서 수리사회학을 공부하고 사회연결망분석의 전문가가 되었다. 사회연결망분석은 당시 똘똘한 미국 사회학 대학원생들에게 인기 있는 분야였다. (나도 잠시 그 분야를 탐색하다가 지나치게 비이론적이고 데이터 의존적이라서 손을 뗐다. 전혀 흥미가 나지 않았다.) 지난 10여 년 사이 빅데이터 시대가 되고나고 그 분야는 온갖 학문 전공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왔다고 도래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이룰 수 있는 일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그가 다소 요란스럽게 보낸 학자로서의 일생 동안 성취한 것이 무엇인가. 긴 인류 역사에서 한 톨의 모래만큼이나 될까. 기껏해야 한번의 파도만으로도 흔적 없이 쓸려가버리는 모래성에 불과할 것이다.

나라고 다를까? 누구라고 다를까? 어쩌면 인간의 삶이 본질적으로 그토록 허무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이가 가깝지는 않았지만 늦게나마 그의 명복을 빈다. (2019-12-16)

떠남…(2) 대학에서의 수업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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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에 눈을 떴다. 마지막 수업을 하는 날. 가르치고 싶은 게 좀 많이 남아서 정교하게 수업 시나리오를 짰다. 1분도 허비할 수가 없다. 마지막 공연이다!

이 공연이 끝나면 나는 영원히 해방될 것이다. 지구 여행에서 피할 수 없는 ‘직업’과 ‘노동’이라는 무게로부터 말이다.

남보다 1년 빠른 7살에 국민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해서, 대학도 남보다 1년 빠른 19살에 입학하였으나 고 박정희 대통령  덕분(?)에 남보다 한참 늦은 29살에야 대학을 졸업했다. 그 후 직장 생활 2년 6개월 하고 남보다 한참 늦은 32살에 유학을 가서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고, 남보다 한참 늦은 39살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머리가 나빠서 공부를 오래하게 되었지만, 사회학 분야의 세계 최고 대학원에서 걸출한 학자들로부터 직접 학문과 삶을 배우는 행운을 안았다.

그 후 예상치 않게 3년 동안이나 시간 강사와 임시직 연구원을 전전하는 시련의 시간을 보내고 남보다 한참 늦은 42살에야 겨우 대학 정규직 교원이 되었다. 나를 더욱 강하고 겸손하게 만들고자 하는 신의 배려였던가.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대학교수직을 지병으로 인해 몇 차례 위기를 겪고 이제 남보다 1년 반 빠르게 물러난다.

교수가 된 후 6개월만에 학과장이 되었고, 2년반만에 부처장이 되었으며, 3년반만에 차관급 대통령 자문위원이 되었다. 남들은 대학 재직 30년이 넘어야 받는 홍조근정훈장을 대학 재직 5년만에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수여받았다. 교수가 된 이후에는 모든 것이 초고속이었던 셈이다.

사단법인 한국정보사회학회를 창립했고, 재단법인 아시아미래재단을 만들었으며, 사단법인 한국데이터사이언스학회를 설립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위원으로 5년 이상 봉사했고, 크리스찬 아카데미 등 시민단체 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저술에 있어서는 2편의 저서가 문화관광부와 대한민국 학술원에 의해 우수도서로 선정되는 영광을 안았고, 10여 편의 저서와 20여 편 이상의 논문, 그리고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연구보고서를 썼다.

신문 컬럼도 많이 썼다. 어느 중앙 일간지에는 내 이름의 기명 컬럼을 20회 연재했고, 명사컬럼 필진으로도 참여했다, 많을 때는 한 해 50개 이상의 신문 컬럼을 기고했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위해 TV 좌담, 라디오 프로그램의 신념 대담 등 방송에도 가끔 출연했다.

정권 후반 자식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DJ가 안타까워 정부 일에 끌려들어갔다. DJ는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매료된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사회학자가 전자정부 전문가가 되었다. 전자정부는 대통령으로서 DJ가 추진한 마지막 사업이었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전자정부 일을 하는 동안 20개 이상의 정보 시스템 구축을 도왔다. 공인인증서 보급 및 국가 암호기반 구축, G4C(민원 24), 국민신문고, 나이스 등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많은 세금을 들여서 구축한 나이스(교육행정정보시스템)를 오픈하지 못하고 있을 때 정부의 요청을 받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덕분에 2018년에는 전자정부 50년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해 꽤나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정치가와 행정직이 자유로운 내 영혼에 어울리지 않음을 깨닫고 일찍 손을 털었다.

크게 화려할 것은 없었지만 짧은 지구여행 동안 하느님이 내게 주신 능력과 기회를 최대한 살려서 원없이 달렸고 많은 행운을 누렸다. 이 여정을 허락해준 하느님과 부모님, 날 버리지 않고 38년 동안 고락을 함께 해준 아내, 결함 투성이의 아빠를 잘 참아준 세 아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이제, 그 모든 추억과 부담을 뒤로 하고 은퇴자의 삶을 시작한다. 해방이다!

 

떠남….(1)

대학을 떠난다는 사실이 드디어 실감나기 시작했다.

몇 주에 걸쳐서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 7~8명과 돌아가면서 점심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수십명이 한꺼번에 모여 퇴임식을 갖기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지난 화요일(2019-12-03)에는 수업에서 만나지 못하는 학생들과 송별회를 가졌다. 주로 3~4학년 학생들이 참석했다.

학교 앞 미스터피자에서 작별모임을 끝내고 단체 사진을 찍었다.

함께 피자를 먹으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신입생 O.T.에서 나를 처음 만났던 자리를 기억하는 학생들, 연구실에서의 개인 면담을 기억하는 학생들, 특정 과목의 수업 때문에 나를 기억하는 학생들, 2015년 필암 집 방문을 기억하는 학생들….학생들이 나와 얽힌 다양한 모습을 회상해 주었다. 이보다 고마운 일이 어디 있으랴.

그 송별연에서의 대화와 소그룹의 학생들과 나누었던 대화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 몇 가지만 기록해 두어야겠다. 그것은 교수가 자신의 수업을 얼마나 정성들여 진행해야 하는가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여러 학생들이 고등학생 때 ‘수포자’였다가 내가 가르치는 통계 수업을 듣고 통계에 자신이 생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들은 사회조사분석사 시험을 치겠다거나 심지어 데이터 분석 분야로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며 희망 가득한 눈을 반짝였다. 그들은 내게 가르치는 일에 대해 커다란 보람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 학생들이 한두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사실 몇 년 전 사회통계 수업을 맡게 되면서 나는 하나의 결심을 했다. 학생들에게 통계는 물론이고 그에 관련된 수학을 배우는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사회과학 전공을 택한 적지 않은 학생들이 소위 수포자인데, 그들이 즐겁게 통계를 배우게 하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다.

아마도 그 학생들은 중고등학교에서 이런 경험을 했을 지도 모른다. 중학교 때 선생님은 “이것은 여러분이 초등학교에서 다 배웠지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은 “이것은 여러분이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다 배운 내용이지요?” 혹은 최악의 경우에는 “여러분 이것 다 학원에서 배웠지요?” 하면서 수업을 따라가는 데 필요한 기초 지식을 다져주지 않은 채 진도를 나가는 경험 말이다. 대학에서마저 그렇게 한다면 어쩌면 그들은 새로운 수학 지식을 획득할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어도 70~80%의 학생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지 않는 한 학생들이 강의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무엇이든 추가해 가르치기로 했다. 그것이 엑셀 사용법이든 아니면 수학이든. 진도를 나가는 게 무슨 소용인가? 학생들이 강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어떤 학생은 이 얘기를 내게 꼭 들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왔다면서 학기 중간 강의 평가에 대한 경험을 얘기했다. 원래 강의평가는 익명이다. 그런데 그 학생은 자신이 쓴 강의 평가 내용을 밝혔다. 30여 년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강의평가에 자신은 엑셀을 처음 배워서 잘 따라가지 못하니 강의를 천천히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내용을 썼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중간시험 기간 후 내가 수업에서 엑셀로 문제를 푸는 과정을 눈에 띄게 천천히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직 이런 교수님도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고백하자면 나는 학생들의 강의 평가를 그다지 성실하게 읽지 않은 교수이다. 특히 최근에 도입된 학기 중간 강의 평가를 나는 통상 읽지 않는다. 수업으로부터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기 싫어서이다. 그런데 이번 학기는 예외적으로 그것을 읽었다. 그리고 그 학생이 쓴 강의 평가를 보고 내가 학생들을 제대로 배려하지 못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중간시험 기간 후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강의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 학생이 수업에서 그 변화를 느낀 것이었다.

그 학생이 고맙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수업 중 교수의 그 작은 변화를 그렇게 크게 느끼다니….

한 학생은 깨알 같은 글씨로 쓴 긴 내용의 편지를 주었다. 아마도 지난 10여년 동안 내가 받아본 가장 정성스러운 손편지가 아닌가 싶다. 편지는 내 수업들이 자신의 생각을 넓히고 진로를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학생은 공부를 아주 잘 한다. 내 생각에 그는 학자적 자질을 충분히 지니고 있다. 중간에 좌절하지 말고 꾿꾿하게 학문의 길을 간다면 세계 최고의 대학에서 박사를 받고 훌륭한 학자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 학생의 편지를 오래 오래 간직해야겠다.

그 학생은 평소 조용한 편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 그렇게 깊은 생각이 숨어있을 줄이야. 섬뜩하다! 내가 최선을 다해 준비하지 않고 임했던 수업들도 많았는데….학생들을 대할 때는 어느 순간에도 정성을 다해야 하거늘.

1백 여년 전 외증조부님은 당신이 가르치던 기숙 서당에서 한밤 중에 불이 났는데 학생들을 구하다 당신 생명을 잃었다. 그 정도의 정성으로 학생들을 대해야 하는 건데 나는 그보다 한없이 부족했다. 부끄럽다. 내 후손 중 혹시 다시 선생이 나온다면 외증조부님만큼 지극 정성으로 학생을 사랑하길 바란다.

재직하는 동안 내가 학생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거의 느끼지 못했는데 학생들이 쏟아놓은 기억의 토막들은 내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교수가 나름 가치와 보람이 있는 직업이라는 사실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런 줄 알았으면 더욱 열심히 지도하는 건 데….후회 막급이다. 그런데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학생들이 선물해 준 꽃다발은 내가 일생 받아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웠다. 화병에 꽃을 옮겨 놓던 아내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아마도 학생들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서 더욱 그러했으리라.

아내가 학생들이 선물해준 꽃다발을 화병에 옮겨 거실 탁자에 올려놓았다.

다음 주가 마지막이다. 어떻게 끝내면 좋을까? 힘이 들어서 이번 주로 수업을 마치고 싶었지만 조금이라도 더 배우겠다는 학생들의 진지한 모습에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떻게든 학생들이 하나라도 더 배우게 해줘야겠다. (2019-12-05)

가을 단상

앞뜰 단풍

커피를 마시며 바라보는 앞뜰이 붉고 노랗다. 길건너 서원 뜰의 단풍도 붉은 빛, 우리 집 울타리 남천도 붉은 빛이다. 거기에 잔디가 금빛으로 바뀌어 가며 가을 분위기를 더하고 있다.

늦가을 정원에서는 크게 할 일이 없다.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화분들을 따뜻한 실내로 옮기고 수전들이 얼지 않도록 중간 밸브를 잠그고 용처가 사라진 물 호스들을 잘 말아서 창고에 보관하는 정도의 소소한 일이 있을 뿐이다.

실내에서도 청소와 같은 일상적 일이 있을 뿐이다. 지난 겨울에 창호를 삼중창으로 대폭 교체해 단열을 강화했고, 거실에 냉난방기를 들여오고 늘어난 전기 수요에 대비해 태양광 발전기를 추가로 설치했다. 태양광 발전이 시간당 6kw가 되었으니 아마도 난방을 대부분 전기로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렇게 되면 기름 보일러나 벽난로를 거의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기름 보일러는 비용이 많이 들고 벽난로는 관리에 손이 많이 간다.

집의 외양도 중요하고 정원의 풍경도 중요하지만 집이란 무엇보다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해야 한다. 물론 폭풍우에 안전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지만.

그런데 관리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러한 기본이 보장되는 집은 없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지은 집이라도 몇 년 지나지 않아 틈이 생기고 낡은 구석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집이 그 일부인 자연의 이치이다.

때문에 집짓기 못지 않게 보수와 유지가 중요하다. 내가 홀연히 떠나더라도 집이 잘 유지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 놓겠다는 계획을 내년에는 모두 실행해 놓아야겠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이 하늘에 뜻과 후손들의 선택에 의해 좌우되겠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다하고 가야할 것이다. 작은 집과 집안의 역사도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이라.

계절도 가을이지만 내 삶도 가을이다. 계절이 바뀜이 슬퍼할 대상이 아니듯이 인생의 흐름도 슬퍼할 대상이 아니다. 모두 잠시 왔다가는 여행일 뿐이다. 아쉽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겠는가만 그렇다고 여행이 슬프기까지는 않은 것처럼. (2019-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