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itude의 우리 말 역어는?

한글은 세상에서 가장 어휘가 풍부한 언어로 간주된다.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영어 표현이 별로 없지만, 영어로 번역이 불가능한 한글 표현은 엄청 많다는 사실이 그것을 방증한다.

그런데 유독 ‘혼자 있음’에 대한 우리말 어휘는 상대적으로 매우 빈곤하다. 혼자 있음은 그냥 단순히 홀로 있는 객관적 상태를 가리킬 수도 있고, 혼자 있어 외롭고 쓸쓸하다는 심리 상태까지 포함할 수도 있으며, 그와 반대로 혼자 있어서 편안하고 즐겁다는 심리 상태까지 나타낼 수도 있다. 영어로 isolation, lonliness, solitude라는 표현이 그 상황들에 각각 대응한다. 그렇다면 우리 말로는 그에 상응하는 표현이 무엇일까? 고립, 고독, ??? 세 번째 solitude에 해당되는 우리 말 표현이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과문한 탓인가?

나는 그것이 내 어휘 부족 탓이라기보다 혼자 있음에 관한 우리 말 표현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독을 즐긴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 말은 사실 형용 모순이다. 고독이라는 어휘가 외로움과 쓸쓸함의 정서를 담고 있는데, 그것을 어찌 즐긴단 말인가. 고독을 즐긴다는 말은 번거로운 사람관계에서 벗어나 혼자 있음으로서 느끼게 되는 한적함과 평안함을 즐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혹시나 우리 사회에 는 집단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 그리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적극적으로 고립을 선택하는 삶을 배격하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혼자 있음에 관한 표현의 빈곤은 바로 그런 사회적 배경 때문이 아닐까?

그야말로 1인 가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요즘같은 세상에 작가와 인문학자들은 혼자 있음에 대한 다양한 뉘앙스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어휘들을 발굴해주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고독사’라는 표현이 맘에 들지 않는다. 혼자 살다 죽는 것이 모두 외롭고 쓸쓸하게 죽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죽음을 보는 사람들이, 기자들이 그렇게 감정이입하고 있을 뿐이리라. 고독사 대신  ‘고립 사망’ 혹은 ‘독사(死)‘, 아니면 그냥 ‘혼자 죽음’ 따위의 보다 중립적인 어휘로 바꿀 수는 없을까? 물론 그래봐야 혼자 있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선입견 혹은 편견이 지워지지 않겠지만 혼자 살다 혼자 죽는 현상에 대해 적극적은 아닐지라도 최대한 중립적으로 대해주면 안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혼자 있다고 반드시 외롭고 쓸쓸하지 않다. 반대로 혼자 있어서 자유롭고 심지어 행복한 사람도 적지 않다. 제발 우리 사회가 그들의 삶을 마음대로 일방적으로 해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일생동안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학자라는 직업이 그러하고, 전원 생활이 그러하다. 30년이 넘는 직업 생활, 10년이 넘는 전원 생활이 모두 결혼 상태에서 보낸 세월이었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아이들은 일찍 집을 떠났으며, 직장이 먼 탓에 아내와 별도로 살림을 한 세월도 제법 길었다.

혼자 있음을 즐기지 못하면 좋은 학자가 되기 어렵다. 깊이 있게 그리고 집중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 고립은 필수적이다. 연구실 혹은 서재에서 홀로 긴 시간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는 사람이 학자에 적합하다.

혼자 있다고 폐쇄적인 것은 아니다. 미하일 바흐찐의 주장처럼 인간은 대화하는 존재이다. 사실 우리는 혼자 있어도 자주 대화한다. 자신 자신과도 대화하고, 인터넷이나 전화, 그리고 책이나 논문을 통해서 다른 연구자들과 소통하고, 이웃이나 친구와도 대화하고, 자연과도 소통한다.

학자는 그냥 적극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려 노력한다. 그것이 직업 생활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적극적 고립을 어떤 어휘로 묘사할 수 있을까? 그것이 오늘 아침 내게 떠오른 의문이었다. (2020-10-19)

세상을 위하는 노인은 없다

세상 기준으로 조금이라도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들이 노년에 보이는 공통된 행태 중 하나는 과도한 자기 확신과  고집이다. 자신의 주장이 옳고, 자신의 판단이 틀림없으며,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고 믿으며 남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는 행태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년의 아집은 개인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소수의 노인들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수많은 노인들에게서 보이는 문제라는 말이다.

우리를 가족이나 이웃과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인 조건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식타인에 대한 신뢰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인식, 다른 사람도 본인 이상으로 세상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노인들이 변했다. 우리 사회에 관대하고 자애로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고집불통의 노인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것이 노인들의 손에 스마트폰이 주어지고 인터넷과 유튜브를 즐겨 쓰면서 부터가 아닌가 싶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노인들에게 보다 넓은 세계, 보다 다양한 관점, 보다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 창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세계, 자신들만의 관점, 자신들 끼리의 소통만 일어나게 만드는 폐쇄 회로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초래한 가장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 중의 하나가 바로 노년의 폐쇄 회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가정 내 소통의 단절, 나아가 가정의 평화마저 위협하고, 무덤에서 나온 ‘좀비’들이 젊은이들을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사회적 관대함과 포용의 상징이 되어야 할 노인들이 배타적 태도와 불통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편향동화(biased assimilation)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남북의 이념 대립과  분단, 비극적인 한국전쟁, 그리고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경험한 노인 세대에서 그러한 사회 심리 현상이 두드러 진다. 자신들이 품어왔던 시대정신이 퇴조하고 자신들의 공헌과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노인들이 시대착오적 이념 대립을 부추기는 세력들의 주장에 쏠리면서 자신들의 믿음에 맞는 증거와 주장만 찾고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덕분에 노인 세대가 퇴장하면서 안고 갔어야 할 낡은 이념과 사상이 오히려 부활하고 생각의 세대 교체, 정치와 사회 권력의 세대 교체가 지연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좀비 현상이라고 본다. 생명 없는 자들이 마치 생명 있는 존재인 것처럼 나돌아 다니며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디지털 시대에 노인들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사회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관용의 모범을 보이고 후 세대를 믿어주는 일이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노인은 좀비가 된다. 세상에 튀어나온 노인 치고 세상을 참으로 위하는 사람은 없다. “노인을 위한 세상이 없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위한 노인은 없다. 노인의 애국적 행동은 시대착오적이고 반사회적인 집착일 뿐이다.

노인의 목소리가 큰 가정에 평화는 없다. 노인들의 목소리가 큰 사회에도 평화는 없다. 어찌해야 좋을까. 나도 노인이니 그냥 안타까워 할 수밖에….(2020-09-21)

노년에 찾아오는 작별의 순간

늙어지면 무엇보다 헤어짐과 익숙해진다. 살다가 헤어져야 할 상대가 참으로 많다. 헤어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떠오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직업, 일, 조직, 물건, 삶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과 영원히 갈라서야 한다.

늙는 것은 헤어짐의 연속이다. 그리고 죽음은 지구 행성에서 인연을 맺었던 모든 것과의 종국적 이별이다. 때문에 늙는다는 것은 죽음의 연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늙음과 죽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 바로 이별인 셈이다.

늙어서 겪게 되는 이별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온다. 때로 이별은 당사자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왕왕 그것은 심리적 징후를 대동하고 찾아온다. 심리적 징후란 이별을 준비하게 만드는 마음의 변화이다. 그것은 섬세한 사람이라면 결코 놓치지 않을 힌트이다.

지속적으로 상대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다가 상대 자체가 무의미해 보이는 현상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이별의 징후이다. 그 때가 오면 과거 인연에 관계없이 상대를 과감히 털어내야 한다.

평생 공부해 온 사회학이 최근 시답잖게 느껴진다. 내겐 사회적 현안들에 대한 관심은 남아 있지만, 사회학자들이 만들어 낸 사회학적 쟁점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사회학적 고담준론이 무의미한 탁상공론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회학과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그것을 평생 공부해 왔다는 사실이 그것과의 작별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학술 논문을 쓰는 작업도 별로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는다. 아직 마무리해야 할 논문이 여러 편 있지만 그것을 마감할 추동력이 사라져 버렸다. 논문 작성도 털어버릴 때가 된 것이다.

현실 정치에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는다. 노인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은 정치를 후배들에게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것이 무엇보다 노인들의 지나친 ‘애국’  때문이다. 좌우 가릴 것이 없이 우리 사회의 노인들의 절제 없는 나라 사랑이 문제이다. 어느 시대에도 상왕의 존재는 왕의 권위를 위협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힐 뿐이다.

늙어서의 미련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그냥 추한 혹은 기껏해야 안타까운 집착일 뿐이다. 모두 내려놓고 자유로워져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 가장 중요한 여겨지는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남기면 된다. 그것이야말로 궁극적 이별에 대한 확실한 준비이다. 종국에는 그나마도 털어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이 행성을 떠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되리라. (2020-09-20) 

은퇴….10년은 준비해야

내가 정년보다 1년반 먼저 퇴직하려고 했을 때 주위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렸다. 교수직이 편하고 월급도 많은 데 하루라도 더 해야지 보장된 정년도 안 채우다니 말이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어떤 일이든 대충 할 수 없었던 나는 60대 초반을 넘어가면서 교수직이 힘들었다. 급변하는 세상 때문에 공부는 끝없이 밀려있고 생전 보지도 듣지도 못하던 분야까지 공부를 하려니 정말 어려웠다. 컴퓨터 과학이나 데이터과학은 전공상 그려러니 하지만 신경과학, 인지과학, 생물학, 수학, 베이즈 통계 등은 60대 늙은 나이에  혼자서 새로 공부하기는 정말 힘든 일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지만 현직 때처럼의 스트레스는 없다. 오히려 어려운 공부가 즐겁기까지 하다.

그런데 나 뿐만이 아니라 아내까지 정년보다 일찍 퇴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식들 공부도 다 시켰고, 살면서 이래저래 졌던 빚도 모두 갚았으며, 노후를 위한 터전과 수입원을 마련해 두었기 때문에 언제든 사표를 내도 두렵지 않은 상태였다. (딱 그저 남에게 신세 안 지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재정 수입을 의미한다. 오해 마시라.)

대도시로부터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10여년 동안 전원 생활을 하면서 노후에 대한 적응 과정을 충분히 거쳤다. 퇴직을 한다고 해도 새로운 도전이 별로 없을 것이었다. 낯선 곳으로 이사가서 새로운 이웃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에 시행착오를 거치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50대 중반부터 두 곳의 농촌 마을에서 살았기 때문에  리스크가 큰 적응 과정을 모두 마친 셈이었다. 더구나 검소, 절약, 근면, 혼자 사는 법 등 은퇴 후 생활에 필수적인 생활 자세와 노하우를 그 10년 동안에 거의 다 익혔다.

다른 집들처럼 재정적으로 자식들의 뒤를 보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부모 리스크는 없도록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늙은 부모가 자식에게 부담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만 철저히 지켜도 은퇴후 부모로서는 충분히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날에는 자녀의 삶이 불확실하기도 하고, 평균 수명이 길어져 부모와 자식이 함께 노인이 되어야 할 가능성이 높기도 하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의 앞가림을 스스로 해야 한다.

은퇴 후의 생활에 대해서는 10년 정도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재정적, 사회적, 정신적, 그리고 직업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해야 한다. 은퇴 후에도 은퇴 전과 마찬가지로  24시간 365일의 시간이 주어진다. 무엇을 하고 살 지, 무엇을 먹고 살 지, 무엇을 위해 살 지, 어떻게 살 지, 그리고 누구와 더불어 살 지를 가급적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은퇴 준비가 늦어질수록 선택지가 좁아지고 자신의 의지와 선택이 아니라 남의 결정과 ‘운명’에 따라 살게 된다. (2020-09-13)

평안 = 노동 free, 돈 걱정 free, 스트레스 free, 질병 free?

60대 중반이 되면 사람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면서 거치게 되는 인생의 단계가 은퇴이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은퇴 후의 삶을 준비하고 어떤 사람은 갑작스럽게 은퇴를 맞이하지만 누구도 은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런데 흥미있게도 은퇴자들의 삶이 크게 다르지 않다. 여행을 좋아하는 누군가는 오랫동안 해외 여행을 가기도 하고(그나마 코로나 19 때문에 금년에는 그것이 옵션에서 빠졌다), 또 누군가는 부지런히 국내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휴식이 필요했던 누군가는 실컷 잠을 즐기고, 원없이 영화를 보기도 하며, 사진 촬영, 악기 연주, 그림 그리기 등 미루어 두었던 취미생활에 빠지기도 한다. 물론 그것은 재정적이나 건강상의 여건이 뒷받침 되는 사람들의 경우이다.

게다가 은퇴자는 누구나 많은 적응을 요구받는다. 아주 운이 좋은 소수를 제외하곤 대다수의 은퇴자들은 크게 줄어든 재정 수입이나 불안한 재정 수입에 적응해야 하고, 무력감, 소외감, 박탈감, 혹은 외로움 같은 심리적 상태에도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좀 왕성하게 사회활동을 했던 사람들은 타인에 의한 망각에도 익숙해져야 한다. 또한 재정적 어려움과 심리적 위축은 육체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한다. 노화가 빨리 진행되어 신체적으로 여러 가지 징후가 나타난다. 은퇴자는 이러한 신체적 변화에도 적응해야 한다.

삶에서 생산적인 활동이 빠지면서 적지 않은 은퇴자들은 삶의 의미나 보람 혹은 사회적 위상에 위협을 느낀다. 직업적인 후퇴는 사회적으로도, 가정적으로도 무력감을 수반한다. 짐짓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예전 그대로 행동하기도 하지만 머지 않아 가족이나 이웃이 그런 행동을 받아주지 않게 된다.

그것은 정도와 진행 속도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누구나 거쳐가야 하는 적응 과정이다.  은퇴 후 그렇게 몇 달 혹은 몇 년의 적응 과정을 보내고 나면, 은퇴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매일매일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라는 과제가 안겨지고, 별다를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이 주어진다. 그리고 더욱 공평하게도 누구에게나 크고 작은 병들이 찾아온다.

은퇴 이후 안타깝게도 누구나 꿈꾸었던 평안한 노후가 결코 평안하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의 종류가 늘어가고 먹지 말아야 할 음식이 늘어가며 자신이나 배우자가 덜컥 암 수술이라도 받게 되면, ‘평안’과 ‘안녕’을 새롭게 인식해야 하는 때가 찾아 온다.

은퇴 후의 평안은 그냥 아무일 없이 편히 쉬는 삶도 아니고, 돈 걱정이 없는 삶도 아니며, 스트레스 없는 삶도 아니고, 병이 없는 삶도 아니다. 그런 평안은 보험회사 광고에나 있을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평안이란, 사회와 자신을 위한 얼마간의 노동, 사회 초년생의 벌이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수입, 사회와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지병(들)이 함께 하는 일상 속에서 은퇴자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 마음의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노동이야말로 은퇴 후 평안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적당한 노동은 수입 문제, 스트레스 문제, 그리고 지병까지 어느 정도 해소해 주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산업 현장에서 적당한 노동의 기회를 찾기가 어렵다는데 있다. 특히 도시의 은퇴자들에게 개방된 일자리는 흔치 않다. 현대와 같은 노동절약적인 사회에서는 갈수록 노인에게 돌아가는 취업 기회가 줄어들 것이다.

그런데 발상을 바꾸면 어디에서나 생산적인 활동을 발견할 수 있다. ‘생산’이 꼭 돈벌이일 필요는 없지 않는가.

베란다에다 꽃을 가꾸고, 옥상에 채소를 재배하는 것도 생산적인 활동이며, 집안 일을 거들고 손주를 돌보는 것도 생산적인 활동이다. 길 앞 도로를 청소하고 공공 시설에서 자원 봉사를 하는 것도 물론 생산적인 활동이다. 주위를 돌아보면 생산적인 일이 천지이다. 돈을 받는 일이 드물 뿐이다.

나는 삼복 더위에 땡볕 아래에서 일주일이 멀다하고 뜰의 잔디를 깎는다.  그것을 보는 사람 열명이면 아홉이 나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땀을 비오듯이 쏟아가며 잔디깍이를 밀고 다니는 나의 모습을 안타깝게들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사실 나는 잔디와 풀들에 감사한다. 환갑을 한참 넘긴 나를 누가 그렇게 잔인하게 부릴 수 있겠는가? 돌아서면 자라나는 잔디와 잡초 덕분에 나에게는 끝없이 일이 생긴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너무 힘들어지면 더욱 기계화를 하든지, 유료 인력을 써서 내 노동량을 줄일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올 때까지 나는 정원을 가꾸는 노동을 계속 할 것이다.

잘 가꾸어진 집과 정원을 보는 우리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이나 지나가는 행인도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그래서 잔디와 꽃나무를 가꾸는 일은 텃밭에 채소를 가꾸는 것 이상으로 생산적이다. 비록 그것으로 한 푼의 수입도 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기계와 도구를 사는데 지출이 들어가지만 가드닝은 매우 생산적인 활동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행복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편안히 쉬세요!”라고 노인에게 말하는 것은 축복의 인사가 아니다. “너무 과하게 일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모를까. (2020-09-03)

박 시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아직 믿기지 않는다.

일생동안 내가 또래 중 유일하게 존경하던 사람이었다. 몇 번 회의를 같이 했을 뿐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가 황무지였던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에서 세운 업적은 실로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풍부한 아이디어, 탁월한 업무 추진력, 그리고 높은 도덕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가 서울 시장을 출마하며 정계에 뛰어 들었을 때, 그의 결정이 다소 아쉬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그의 능력이 서울시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박 시장은 충분히 그런 능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앞장 서서 타파하려 했던 잘못된 사회 관행에 그 자신이 빠져버렸던 모양이다. 너무 안타깝다. 피해자가 있다면 그에게 위로를 보내고, 세상을 등진 박 시장에게도 애도를 표한다.

오늘 오래 오래 기억될 인물 중 한 명이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2020-07-10)

‘가짜 뉴스’와 ‘진실’에 대해

‘가짜 뉴스’가 범람하고 진실은 그 속에서 실종되기 직전이라 생각되는 세상이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돈과 권력의 엄청난 추동력에 ‘가짜 뉴스’ 생산자는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반면, 진실의 파수꾼은 급속히 설 자리를 잃어간다.

심지어 진실의 지킴이들마저도 이제 ‘진실’이 추구할만한, 수호할만한 가치가 있는 지 묻는 세상이 되어간다. 대학, 학자, 언론, 기자, PD, 종교인, 작가, 영화제작자, 감독 등 인류 역사상 진리의 발견자 혹은 수호자로 간주되었던 제도와 사람들이 모두 흔들리고 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기술이 그들을 보호해 왔던 사회적 기제들을 송두리째 와해시켜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갑자기, ‘진실’이 무엇인지가 우주적 의문으로 떠올랐다. 그것은 시대적 문제인 가짜 뉴스 혹은 허위 정보를 정의하기 전에 반드시 답해야 할 질문이다. 우리에게,우리 삶에 있어 진실이 무엇인지, 진실이 추구할만한 가치가 있는지, 진실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는지, 그리고 진실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 지를 명쾌히 이해해야 가짜뉴스를 규정하고 분석하고, 나아가 대안 마련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위 가짜뉴스의 문제는 보다 근본적으로 진실의 문제인 것이다.

가짜뉴스를 다룬 저술은 대개 좁은 의미의 가짜뉴스를 분석하는 데서 멈추고 있다. 이 책은 그보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가짜뉴스와 진실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책은 진실이란 근본적으로 선택적이라는 입장이다. 그래서 어떤 사건에 관해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보다 누가 ‘어떤’ 진실을 말하는지, 누가 사실을 어떻게 ‘편집’하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하는지에 대해 질문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진실에 더 잘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짜뉴스와 진실의 문제에 대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은 아주 유용하다고 생각된다. (2020-06-30)

안개에 쌓인 미래: 포스트 시대

Jared Bowen on Twitter: "Tonight I'm a man in the mist as we meet ...

미래가 너무 불투명할 때 우리는 post-(탈, 이후)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지금이 딱 그런 시기이다.

2020년 6월 26일 현재 5년, 10년 후는 고사하고 1년 후, 아니 한 달이나 두 달 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도 짐작되지 않는다. 미래를 다루는 학자와 전문가들에게는 무척 곤혹스러운 시기이다.

인류는 코로나 바이러스(covic 19)의 위기를 이겨낼 것인가? 백신은 언제나 출시될 것인가? 그 사이 얼마나 많은 인명이 희생될 것인가?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백신이 발견된 후에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전염병이 출현하지는 않을까? 이상 기후는 멈출 것인가?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 이후에는 어떤 사회가 전개될 것인가? 현재와 마찬가지일까? 아니면 인류는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

제어되지 않은 자본주의가 낳은 불평등은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할까? 인류는 과연 그 제도를 제어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낼 수 있을까? 서구의 대의 민주주의는 시대적 도전들을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정치제도인가? 아니면 전체주의가 대안일까? 현재의 정부관료제는 숨막히는 도전들을 극복하는 역할을 과연 수행할 수 있을까? 신문과 방송이라는 대중매체가 해체된 후 우리는 어디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 탈진실의 시대가 오는 것(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은 아닐까?

의문은 많고 해답은 거의 없다. 인류가 발명하고 유지해 온 주요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제도에 대해 수많은 의문이 쏟아지고 문제가 제기된다. 과연 답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선지자가 출현해야 하는 것일까?

post-covic 19, post-capitalism, post-democracy, post-nation-state, post-truth, post-mass-media, post-university….

Covid19 코로나 바이러스 - Pixabay의 무료 이미지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어쩌면 이미 누구나 뛰어난 미래예측 능력을 가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불확실하고 급변하는 생존 환경인지도 모르겠다. 성장이나 발전이 아닌 생존의 방법을 물어야 하는 시대이다. 혹시 포스트 시대(Post era)에 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0-06-26)

편향된 세상의 정치와 언론

인터넷과 스마트폰의 발달은 정치와 언론에 거대한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민주주의와 언론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지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런데 그 변화가 민주주의와 언론의 발달이 아니라 그것들의 위기를 향하고 있음이 점차 분명해 보인다. 기술의 발달이 사회의 퇴보와 함께 가는 예상치 못한 모순의 양상을 띄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정보기술이 발달한 21세기에 모순적이게도 ‘가짜뉴스’가 창궐하고 정치적 극단주의가 횡횡하고 있다. 기술의 발달이 보다 평등하고 민주적이며 평화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는 낙관적인  기대는 단 한 세기도 버티지 못했다. 경제적 평등 대신 불평등이 확대되고, 대화와 상호 이해 대신 단절과 혐오가 증가하며, 정치적 화합과 포용 대신 정치적 갈등과 배제가 점점 더 일상이 되어가는 모습이 우리를 때 아닌 실망과 비관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 혹시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우리 사회–다른 나라도 대동소이 하지만–를 사회심리학에서 말하는 확증 편향과 편향 동화의 늪에 빠트린 것은 아닐까?

“I trust this site to tell the truth.”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이란,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데 도움이 되는 정보만을 찾아나서는 경향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사람들은 누구나 어느 정도 확증 편향을 갖고 있다. 자신의 믿음과 객관적 데이터 사이의 불일치, 소위 인지부조화(conginitive dissonance)를 해소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확증 편향이라는 것이다.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판단의 경우 인지부조화가 발생하면 대체로 자신이 지닌 기존의 인식이나 지식을 변경해서 인지부조화를 해결한다. 전통적으로 그것은 학교나 언론의 교육 효과이다.

그런데, 세상에 대한 해석이나 믿음에 관련된 판단의 경우는 그보다 좀 복잡하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믿음에 집착한다. 그것은 자존심이나 자긍심, 나아가 자기 정체성의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

때문에 최대한 자기 생각이나 믿음을 지지해주는 정보 혹은 사람을 찾아 나선다. 즉, 자신의 가치 성향에 맞는 사람, 단체, 종교, 언론매체 등을 찾게 된다. 그런데 과거에는 그렇게 하는데 비용이나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속마음은 바꾸지 않은 채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대충 어울려 살았다. 확증 편향을 실천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생활 환경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제 아무리 휘귀한 발상, 상상, 몽상, 혹은 입장도 확증을 구하기가 쉽다. 유튜브, 다음 까페, 트위터, 페이스북, 카톡방 등이 24시간 대기 중에 있다. 소셜미디어의 발달한 머신 러닝, AI 기술은 조금만 내 성향을 노출해도 득달같이 입맛에 맞는 자료를 추천해 준다.

그러니 내 생각과 믿음을 바꿀 필요가 없다. 자신의 생각과 믿음이 틀리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훌륭하다고까지 부추겨 주는 유튜브 채널이 널브러져 있는데 굳이 자신의 생각과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려 드는 대중매체나 유튜브 채널을 찾겠는가.

확증 편향의 용이성과 편리성, 그리고 아부(?)에 길들여 지면 자신의 생각, 믿음, 혹은 입장과 다른 정보를 기피하게 된다. 잔소리 듣기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으며 인지부조화를 즐길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생활 자체도 고달픈데 말이다.

확증 편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정보를 대면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해 버린다. 아니면 자신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선택하고 나머지는 무시하거나 버린다. 소위 편향 동화(biased assimilation)가 발생한다. 확증 편향과 편향 동화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하나의 패키지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정보를 찾으려 하거나(확증 편향), 중립적인 정보를 자신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거나 그런 부분만 취사선택한다(편향 동화).

이러한 사회심리적 경향이 남북분단(혹은 진보-보수 대립)이라는 사회구조를 만나면, 그것은 쓰나미가 되어 정치와 언론을 모두 쓸어버린다.  정치는, 적을 경쟁자로, 경쟁자를 친구로 만들면서 권력을 쟁취하는 품위있는 게임이 아니라 총만 들지 않았지 죽기살기로 싸우는 적나라하고 극단적인 권력투쟁이 되어 버린다. 언론도 편가르기 싸움이 된다. 진실을 주인으로 섬기는 언론사나 언론인은 설 자리가 없다. 어느 쪽이든 진영에 확실히 참여해야 살아 남는다. 진실이 아니라 당파성이 언론을 지배하는 규칙이 되어 버린다.

최근의 정치가 극단적인 투쟁의 양상을 띄게 된 것은 특정한 정치인 개인 탓이라고 볼 수 없다. 정치판에서 절제와 규칙 준수의 원칙이 사라져 버린 가장 중대한 요인은 분단의 고착과 정보기술의 발달이다.

언론사가 3류 기업이 되고 언론인이 ‘기레기’가 되어버린 가장 중대한 요인도 특정 언론사나 언론인 탓이 아닐 아니다. 그것도 분단의 고착과 정보기술의 발달이다. 인터넷 사용자들의 클릭과 조횟수에 목을 매야 하는 슬픈 현실이 언론의 실종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2019-10-01)

현대의 정치, 무엇이 문제인가?(2)가치 배분

정치에서 권력투쟁과 가치배분이라는 두 측면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할까? 매일 매일 접하는 언론의 정치 관련 뉴스를 보면, 권력투쟁에 관한 뉴스의 양이 가치배분에 관련된 뉴스의  양을 압도한다. 그것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전자가 후자보다 분명히 중요해 보인다.

그러나 뉴스에는 언론이라는 매개체의 관점과 이해가 관여되어 있음을 기억하자. 뉴스에서 보이는 비중의 차이는 두 가지 다른 원인 때문일 수 있다. 정말로 권력투쟁이 가치배분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고, 언론이, 가치배분보다 권력투쟁이 더 많은 뉴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중 어떤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운지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언론사들이 시청률과 조회수에 목을 매는 최근의 현상을 볼 때 후자 쪽이 더 진실에 가깝지 않나 생각된다. 아무튼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금언이 정치 뉴스보다 더 잘 들어맞는 경우는 없지 않나 싶다.

조국 교수가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되고 나서 언론의 집중적 조명을 받은 가장 핫한 뉴스는 조국 교수의 딸이 동양대학교에서 받은 표창장에 관한 것이었다. 반면에 후보자의 능력이나 소신은 고사하고 후보자 자신의 비리나 부정에 관한 뉴스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혹시 이 현상이 언론의 센세이셔널리즘 때문은 아니었을까? 물론 일부 야당이나 검찰의 권력 투쟁 아젠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가치 배분의 측면에서 우리 정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을까? 언론 뉴스를 아무리 뒤져도 이 의문에 대한 적절한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다음은 국회의 의안정보시스템에서 찾은 20대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법제정 현황이다.

제20대 국회가 개원된 이래 현재까지 총 2만1천578건의 법안이 발의되었고, 그중 6천350건이 처리되었다. 국회의원들이 싸움만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중에는 싸우다가 회기 막판에 무더기로 통과된 법률안도 적지 않겠지만 법률안을 만들거나 검토하기 위해 많은 국회의원들이 활동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를 보면 일은 안하고 쌈질만 한다고 비판을 들으면 억울해야할 정치인들이 적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의안정보시스템을 검색하면 위 법안들의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아래는 검색 결과의 일부이다(아래 그림을 클릭하면 의안정보시스템에 들어갈 수 있다).

맨 위에 올라온 법안 명칭을 몇 개만 일별해도 정치가 ‘가치의 배분’이라는 의미가 물씬 다가온다. 한국농어촌공사 및 농지관리기금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화훼산업 발전 및 화훼문화 진흥에 관한 법률안(대안), 수의사법 일부개정법률안(대안), 양봉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안(대안) 등.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가 소관위원회인 법안들이 맨 위에 놓여서 그 분야에 관련된 법률들이기는 하지만 법안 하나 하나가 관련된 산업, 기업, 당사자의 활동과 수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들임을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공직자는 누구나 반드시 법에 근거해서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 사회의 각 부문이나 분야를 규제(혹은 지원)하는 개별법말고도 국가기관이 업무를 수행하는데 필요한 예산을 결정하는 정부의 예산안도 매년 통과되어야 하는 법률이다. 법에 근거하지 않고 어떤 공직자도 기관 예산을 지출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법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헌법과 같은 상위법과 어긋나지 않아야 하고 그 법에 영향을 받게 될 관련 당사자들 사이의 이해관계도 조정되어야 하며, 예산 지출이 따르는 경우 정부 예산 편성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정부가 발의하던 의원이 발의하던 별로 다르지 않다. 그래서 국회에서는 위원회, 포럼, 세미나, 공청회 등이 연중 개최된다.  그리고 그중 아주 일부 활동만이 언론의 조명을 받는 행운을 누린다.

입법 활동 중 어떤 것이 기사화되는가는 거의 전적으로 언론사의 판단에 의해 좌우된다.  언론사의 판단에 있어서 해당 법안의 사회적 혹은 정치적 중요성이 고려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는 독자나 시청자 인터넷 이용자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느냐이다.

이제 권력투쟁으로서의 정치가 지닌 모습을 살펴보자. (2019-09-07, 윤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