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관한 몇 가지 진실(1): 일과 잉여

매월 급여 명세서를 읽을 때마다 나는 화를 누르기 쉽지 않다. 정부가 가져가는 세금 때문이다.

오해하지 말라. 세금이 많아서가 아니다. 내 몸에 빨대를 꽂고 있는 잉여들, 세금 도둑들 때문이다.

세상에 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은 “쓸데없는 일은 ‘일’이 아니라 ‘잉여’다” 라는 명제이다. 적어도 정부 부문에 관한 한 “쓸데없는 일”는 형용모순이다. 쓸데없는 일은 일이 아니다.

정부에 관해서 ‘쓸모’에 대한 판단 기준은 딱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민 혹은 주민의 입장에서 도움이 되는가, 둘째는 그 일을 직접 수행하는가이다. 이 두가지 기준을 충족하지 않으면 잉여이다.  실내에서 하는가 실외에서 하는가, 기획인가 집행인가 따위와는 근본적으로 관련이 없다.

(일과 잉여의 구분에 대한 예시)

1. 환경미화

일: 동네 쓰레기통에 버려진 쓰레기의 수거 행위

잉여:  쓰레기를 치우라고 지시하는 행위, 쓰레기 수거를 민간 업체에게 용역을 주고 관리하는 행위

2. 재난 예방

일: 태풍이 몰아 닥칠 때, 취약 지역, 취약 가구를 방문하여 피해가 일어날 요인을 줄이는 작업

잉여: 면사무소 안에서 확성기를 통해서 피해 방지에 유념하라고 방송하는 행위

3. 사회복지

일: 취약 가구를 방문하여 노약자를 살피고 도와주는 행위

잉여: 사회복지정보시스템을 개발하기 위해 외부 업체에 용역을 주는 행위

4. 교육

일: 학생을 지도하는 행위

잉여: 교사나 학교 운영을 감독하는 행위

5. 범죄 예방

일: 동네와 마을 순찰을 도는 행위

잉여: 마을 CCTV 설치와 관리 업무를 외부업체에게 용역 주는 행위

6. 정책 수립과 예산

일: 정책을 기획하고 예산을 수립하는 행위

잉여: 정책 기획과 예산 수립을 용역화 하는 행위

몇 가지 사례를 보았다. 어떤 공무원의 업무가 일인가 잉여인가를 판단하는 업무는 잉여이다. 그것은 머슴(공무원)의 역할이 아니라 주인(국민 혹은 주민)의 역할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정부는 수백년 묵은 잘못된 공무원 제도 때문에 발생하는 잉여가 너무 많다. 왕정과 독재정은 오래 전에 종식되었지만 그 시대에 형성된 관료 제도와 문화가 온존되어 왔다. 더구나 안정성 중심의 관료체제는 21세기 급속히 변화하는 세상과 너무 맞지 않다.

지금과 같은 신분보장=정년보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직업공무원제도 아래에서는 세상이 빨리 변할수록 정부 내에 잉여의 비중이 급격히 증가한다. 신분보장=정년보장이 신분보장=임기보장이라는 원칙으로 바뀌어야 한다. 약간의 예외를 둘 수는 있겠지만 공무원제도의 기본틀이 임기제 혹은 계약제로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정부는 ‘용역’ 국가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현재도 정부의 일 중 상당 부분이 용역화된다. 공무원은 용역 관리자이고 외부 업체가 실제 일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용역을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  대신에 그 정책이 꼭 필요하다면 그 정책을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들을 공무원으로 채용해야 한다. 아예 해당 정책을 수행하는 부서 전체를 모듈식으로 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의 관료 체제에서는 불가능한 대안이다. 하지만 법적으로 한 가지만 손질하면 가능하다. 정년보장이라는 제도를 없애고 모든 공무원을 임기제 혹은 계약제로 바꾸는 것이다. 만약 전문성이 필요해서 장기 계약이 필요한 경우라면 그런 자리는 보수를 낮게 책정하고, 반대로 계약 기간이 짧은 자리는 보수를 더 많이 주어서 보상에 균형을 맞춰야 할 것이다. 지금처럼 이긴자가 다 가져가는 방식으로는 정부의 잉여를 줄일 길도, 효율적인 정부를 실현할 길도 없다.

인간의 지식은 쉽게 업그레이드되지 않는다. 반드시 많은 노력을 들여서 학습을 해야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그런 업그레이드에 한계가 있다.  인간은 언젠가 여러가지 이유로 적응 불능 상태에 빠지게 된다. Fortran과 DOS를 배워서 컴퓨터를 시작한 기술자에게 AI 개발 업무를 맡긴다고 상상해 보라. 그냥 그것은 불가능하다.

정부 내에서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요술 방망이가 바로 ‘용역’이다.  용역 관리자는 얼마든 변신이 가능하다. 심지어 자신이 용역을 내주는 업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실제로 그런 경우가 흔하다–용역을 관리할 수 있다. 업무 수준이 엉터리일 것이 불을 보듯하고 벤더(vender)들의 손바닥에서 놀아날 가능성이 매우 높지만 말이다.

용역 관리를 감독하는 사람은 없다. 왜냐면 감독자들도 그 업무를 이해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거대한 용역 비즈니스가 발생한 공간이 존재한다.  그 공간에서 잉여로 가득찬 용역 정부가 탄생하는 것이다.

일하는 공무원은 많아도 무방하다. 비용은 좀 많이 들지만 국민, 주민이 편해진다.

그러나 잉여는 과감히 제거되어야 한다. 아마도 그러면 정부 예산의 3분의 1정도, 잘하면 절반 정도는 절약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이 나라에서 천년 래의 사회혁명이 될 것이다.

우리 나라에는 두 종류의 사회계급이 존재한다. 공무원과 일반인이다.  헌법에는 이 나라의 주인이 국민으로 되어 있지만, 현실에서 이 나라의 주인은 공무원이다. 머슴이 주인 자리를 차리하고 있는 것이다! 엄청난 모순이다. 그들은 제 위치에 돌려보내고 국민이 주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21세기의 진정한 혁명이다. (2018-08-25)

도덕, 우리 정치의 목을 조르다: 또 불행한 대통령을 보게 될 것인가

한국의 지식인들은 현대 한국사회를 유교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학자들의 태도를 반기지 않는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유교란 ‘삼강오륜’, 권위주의, 노인 정치, 가부장제, 도덕주의, 제사, 위선, 과거 지향 등과 같은 시대착오적 원칙이나 도덕적 적폐와 동일시된다. 그러니 한국사회가 유교적이라는 해석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냉정히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아직 뼛속까지 유교적이다. 기독교가 전래된 지 1백년이 훨씬 넘었고 국민의 3분의 1 이상이 기독교 신자이지만 한국은 여전히 유교 사회이다.

유교적 유산은 마치 한국인의 유전자에 박혀 있는 것 같다. 그것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서양의 이론과 개념만 가지고 한국의 정치와 문화를 이해하려는 어떤 시도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경전적 유교와 현실적 유교를 구분해야 한다. 경전에서 읽히는 유교와 현실에서 구현된 유교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 사회의 문화와 정치를 규정하는 프레임은 경전 속의 유교가 아니라 6백년 조선의 역사 속에서 형성되고 유지되어온 문화적 규범과 사회 관계로서의 유교이다.

나이, 성별, 지위,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사회적 연대와 배제의 근간으로 작용한다. ‘큰 뜻을 품은’ 사람은 공무원이나 정치인이 되어 국가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 맹목적인 충성과 의리는, 그것이 설령 범죄 집단 내에서 일어나는 것일지라도 사회적으로 칭송받거나 적어도 용인되는 반면 배신은, 그것이 설령 정의를 위한 내부 고발일지라도 비난 받는다.

예컨대 나이를 보면, 아직 우리는 대학입시의 동점자 처리, 공직 선거의 동일 득표자 처리,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 선임시 동일한 선수자 처리 등에서 한 살, 아니 단 하루라도 먼저 태어난 사람이 우대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긴다. 그런 원칙에 대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지 않는가.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지금도 사회질서의 한 축인 것이다.

유교 정치는 한 마디로 모럴폴리틱(moralpolitik)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다(김상준, 2011). 유자(者)들의 자아실현은, 자아 수양에서 시작되며 국가 경영에의 참여를 통해서 완성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下)가 바로 자아실현의 요체이다. 김 교수에 의하면, 유자들은 성왕(王)의 이념을 가지고 때로는 왕권을 강화, 수호하고 때로는 반대로 왕권을 견제, 견인한다. 물론 유자들은 신민들에 대해서도 유교적 질서의 지킴이 역할을 수행했다. 정치 투쟁에서 유자들은 칼과 화살이 아니라 “도덕적 가치와 논리”를 핵심 무기로 사용했다(김상준, 2011: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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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으로 표현하면, 학문을 하는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 학문의 목표는 지상에 ‘바른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고 지식인이라면 필히 ‘바른 세상’을 세우고 유지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지식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 특히 정치적 실천이 으뜸으로 강조된다.

물론 정치를 하기 전에 먼저 수신(身)과 제가(家)를 해야 한다. 왕에게 성인(人)이 되길 요구하듯이 유자들도 서로에게 도덕가(道德家)가 되기를 요구했다. 업무 수행의 유능함은 그 다음 문제였다. 아무리 뛰어난 업무 능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도덕적 흠결을 가지고 있으면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었다. 

우리의 정치가 유교적 모럴폴리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다음 몇 가지 역사적 사실만으로도 입증된다. 첫째,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들은 대부분 임기 후반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도덕적 비판에 직면했고 그중 몇 사람은 그로 인해 고통스런 말년을 보내거나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그들이 어떻게 한결같이 유사한 운명에 처했는지 참으로 놀라울 따름이다. 

둘째, 2000년 도입된 고위공직자의 인사청문회는 후보자의 직무적합성이나 능력에 대한 검증은 뒷전이고 도덕적 검증에서 시작해서 도덕적 검증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덕적 검증에 집착했다. 후보자 자신도 기억할 수 없는 과거의 도덕적 흠결을 문제 삼아 결국 후보자를 낙마시키고 그를 임명한 대통령과 집권당에게 도덕적으로 흠집을 냈다. 한 마디로 인사청문회는 여야 그리고 언론이 참여하는 도덕정치, 도덕 투쟁이 장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대통령은 해당 직책에 가장 적합하고 유능한 인물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흠이 가장 작은 인물을 장관에 임명해야 할 정도였다.

셋째, 1990년 대까지도 학생 운동이 정치사회 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3.1 운동 때부터 계산해도 적어도 70여년 동안 우리 나라 정치의 한 축을 학생들이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 운동, 광주학생운동, 일본 유학생의 독립운동, 해방 이후 좌우대립, 한국전쟁 때의 학도군, 4.19, 한일회담 반대 데모, 3선 개헌 반대 데모, 유신체제 반대운동, 광주민주학쟁, 6월 민주화운동 등 굵직한 역사적 순간에는 항상 학생 세력이 있었다.  이는 우리 나라의 지식인이 지닌 실천적 특성을 무엇보다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넷째,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가 무척 활발하다. 특히 권위주의 시대에 지식인들은 사회적 불이익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물학적 생명까지 바치면서 정권 비판에 앞장 섰다. 대학교수들의 정치 참여–그것이 집권 세력을 위해서든 비판 세력을 위해서든–는 ‘폴리페서’라는 조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활발하다.

조선 시대 이래 모럴폴리틱은 우리 사회의 문화적 전통(혹은 구조)으로 굳건히 자리 잡았다.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역사적 발전을 위해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울 때, 통치자가 사리사욕과 부정부패에 빠졌을 때 지식인들은 어김없이 하나의 세력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아마도 그 덕분에 오랜 세월 하나의 민족으로서 살아남았고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으며 민주화와 산업화를 성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유자들, 그리고 그들의 역할을 이어가는 지식인들의 지나친 관념적, 도덕적 집착은 조선을 위기에 몰아넣었고, 지금 다시 우리 정치의 발전을 가로 막고 있다. 우리 정치는 지금, 민주화와 개혁이 명분과 구호, 그리고 형식에 머무르고, 국가 부분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자율적이 됨으로써 과잉국가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 국가를 책임있게 경영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하고 정치 권력만 향유하는 사회적 잉여가 되고 있다. 대통령과 집권당은 정책의 성공적 집행과 정부의 효율적 운영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파 정권은 힘과 공포로 정부를 운영할 수 있다고 믿고, 좌파 정권은 대의(大義)와 국민의 지지로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일찌기 마키아벨리가 지적했듯이 군주가 당위성, 사명감, 선의, 스타일 등으로 위업을 이룰 수는 없다. 특히 유교적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엘리트 관료를 장악하고 그들을 국가 경영에 있어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능력이 필요하다. 집권하는 능력과 국가를 경영하는 능력이 다르다는 말이다.

관료를 장악하고 그들을 적극적인 동반자로 만들지 못하는 정권은 집권 초기를 지나면서 점차 관료의 포로로 전락한다. 이 법칙에는 거의 예외가 없다.

모럴폴리틱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 우리 사회는 관료국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관료 국가는 모험 회피적이고 잉여적이며, 통제적이다. 관료는 끝없이 조직을 확대재생산하고 규제를 양산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책임지려하지 않는다. 더구나 놀랍게도 그들은 정치적 대의나 의지를 삼킬 수 있는 엄청난 수단과 능력을 갖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다.

비도덕적 정치가 도덕이라는 명분과 위선의 늪에 빠져 있는 동안 무도덕적 관료는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서 나라를 끌고 간다. 개인적으로 그들은 ‘대과없이’ 임기를 마치면 되고 집단적으로 나라를 망하지 않게 하면 된다. 그리고 잘못된 결과에 대해서는 늘 정치인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그 뿐이다.

모럴폴리틱은 우리의 정치를 청와대 문 앞에서 멈추게 한다. 국가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정치적 영향이 대통령이 머무르는 청와대를 나오지 못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그 어느 선임자들보다 착하기는 하지만 역시 실패한 대통령을 다시 한번 보게될 것 같다는 우려가 드는 것은 비단 나 뿐일까(2018-07-22).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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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은 중요하다. 스스로 어떤 잘못을 했는가를 살피는 일은 꼭 필요한 부분이다. 그러나 반성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우리의 뇌가 소극적인 방식으로 작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의 뇌가, 이상적인 기준을 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후회스런 기준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무엇을 잘못했는가에 못지않게 무엇을 잘 했는가를 발견하고 그 점을 최대한 키워나가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 자신이 점점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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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게 하니 문제가 생기는구나.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라는 다짐도 필요하지만, “야, 이렇게 하니 잘 되는구나. 앞으로도 꼭 그렇게 해야지.”라는 의지를 불태우는 자세도 꼭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의 두뇌와 근육의 신경세포를 적극적, 긍정적 모드로 바꾸는 비결이리라. (윤영민, 2018-07-09)

대학에서 교육이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25년 동안 나는 교육이란 내가 아는 지식 혹은 기껏해야, 학생들이 알아두면 좋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어떻게 해서 내게 그런 시대착오적인 교육 패러다임 자리잡게 되었는 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돌이켜 보니 놀랍게도 나는 그 패러다임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패러다임의 유효성을 의심하거나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정말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접근이었다.

한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식이 모두 인터넷에 있는 시대에 지식 전달 패러다임은 대학 교육에 관한 시대착오적 프레임이다. 그런 시대에 있어 대학 교육은, 1) 학생의 고민에 공감하고, 2) 학생 스스로 자신의 미래 모습을 찾으며, 3) 학생 자신이 만들어 가고자 변화를 옆에서 지원해 주는 것이어야 하리라. 근본적으로 대학교육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지능 형성 지원 체계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지능이란 사람이 주어진 환경에서 생존하고 번영하기 위한 의사결정 능력을 말한다.

정년 때까지 남은 기간만이라도 이 사상을 충실히 지켜가자. (윤영민, 2018-07-09)

정치인이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되려면….

우리 나라에서는 좀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진보, 보수를 가리지 않고 정치와 행정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보수 정권은 국가 운영에 있어 군대식 지휘, 즉, 비민주적 권위주의가  통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 반면에 진보 정권은 지도자가 올바른 목표와 의지만 지니면 관료를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관료란 집권자(당)이 공포와 힘으로 밀어붙인다고 따라 오지도 않고, 정의의 깃발을 나붓낀다고 따라오지도 않는다. 이 중요한 진실을 인식하지 못한 탓에 지난 20년 동안 대부분의 보수 정권도 진보 정권도 국가 운영에 성공하지 못했다.

관료는 정권의 압력을 피해갈 수 있는 100가지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정권은 짧고 관료는 길다고 믿는다. 불행하게도,  짧게는 1백년, 길게는 7백년 동안 그들의 믿음이 틀린 적이 없다.

정치가가 국가가 나아가야할 올바른 이념과 방향을 제시하고, 국민을 잘 설득할 수 있다고 위대한 국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정권을 잡을 수는 있지만 정권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정치가가 뛰어난 행정 원칙과 능숙한 스킬로 관료를 장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서 위대한 국가 지도자로 우뚝 설 수 있고 정권을 성공시킬 수 있다.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해방 이후 이들 대통령 중 과연 누가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겼고 위대한 국가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가? 김대중일 것이다. 박정희는 산업화를 성공시켰지만 비명에 갔고, 김영삼은 문민화는 성공시켰지만 국가를 재정 위기에 처하게 했다. 노무현은 탈권위주의 정치를 시작했지만 기득권 세력을 넘어서지 못했다.

DJ는 탁월한 설득력을 지닌 대중적 정치인이면서 동시에 대단히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한 지도자였다. 비록 김종필과의 연합을 통해서 겨우 정권을 잡았고 여소야대의 약한 정부였으며, 아들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어느 정부에 못지 않은 업적을 남겼다. 경제 위기의 극복, 부정부패의 해소, 정보화 추진, 전자정부의 구축, 남북대립의 완화 등을 상기해 보라.

DJ는 행정 관료를 잘 이해했다. 그는 이념이나 좋은 뜻, 혹은 힘만으로는 관료를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장악하고 움직일 수 있는 지를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행정 관료를 잘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을 적재 적소에 기용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참으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문재인 정부는 과연 어떻게 될까? 문 대통령이 착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주장처럼 선한 지도자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까지 대 국회, 대 야당 관계를 놓고 보면 정치적 리더십이 눈에 띄지 않는다. 행정 능력은 이제 겨우 허니문 기간이 끝났다. 지금부터 행정 관료들의 저항과 반격이 시작될 것이다. 과연 DJ만큼 해낼 수 있을까? 과거에 노무현을 보좌해서 통치한 경험이 있으니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다. 부디 집권 후반기에 행정 관료의 포로가 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바란다.  (윤영민, 2018-07-08)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오해와 진실

에피소드 1) 오늘 아침 동아일보에 “트럼프, 무식이 화근이다”라는 컬럼이 실렸다. 그 글에서 그 신문의 논설위원은 “잘 모르는 상태에서 북핵 협상 열차에 덜렁 올라탄 트럼프“가 북미회담 이후 자신이 저지른 난감한 실수를 수습하느라 급급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에피소드 2) 오늘 아침 중앙일보에 실린 6.13 지방선거 결과에 관한 인터뷰에서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이런 언급을 했다.

“문 대통령이 용기 있게 새로운 대북 정책을 추구한 공이 있다. 문제는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보수·진보 모두 전쟁 위협을 느낄 정도로 걱정을 하는 상황이었다가 극적으로 반전됐다는 점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풀어나갈 거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 점은 문재인 정부엔 행운이었다. 그러나 계획된 것이라기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인 결정의 결과물이다.”

과연 트럼프 대통령은 정말로 북핵문제에 관해 무지하고, 트럼프 행정부의 한반도 정책이 트럼프 대통령의 즉흥적 판단이 빚어낸 결과일까? 필자는, 이 두 개의 에피소드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우리 나라의 소위 오피니언 리더나 정치인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거나 아니면 그 미국 대통령의 언행에서 보고싶은 것만을 보는 오류에 빠져있음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현상이다.

한 마디로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에 대해 ‘무지’하지도 않고, ‘즉흥적’으로 북핵 문제를 다루지도 않고 있다. 트럼프가 천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미국과 한국을 포함해서 대부분의 언론인, 정치인, 심지어 지식인보다 머리가 좋을 뿐 아니라,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북핵에 관해 정보와 지식을 많이 갖고 있다고 추정하는 것이 그렇지 않다고 단정하는 것보다 훨씬 타당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을 조롱하는 것은 사실 그를 대통령으로 선출한 미국 국민과 미국 선거 제도에 대한 몰이해이고 모독이며,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미국 정보기관에 대한 모욕이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트럼프를 옹호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적어도 민주국가에서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 선출된 정상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느 나라이건,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다.

트럼프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언행에는 세 가지 입장이 투영되어 있다고 판단된다. 전통적 고립주의, 사업가적 실용주의, 새로운 방식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이 그것이다.

그는 공화당의 고립주의적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미국(혹은 미국인)의 사활이 걸린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외 문제에 개입하지 말자는 입장이다. 그가 외치는 ‘미국 제일주의(America First)’는 그러한 전통을 표현하는 구호이다. 미국 기업들의 이익과 미국민들의 일자리와 번영이 정책의 지상 목표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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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관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있어 미국 본토에 핵공격을 가할 수 있는 국가인 북한이 미국의 통제 밖에 있는 상황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정치적인 방법으로 북핵 문제가 해결된다면 남한에 대규모의 미군을 주둔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비용이 많이 드는 한미 군사 훈련도 계속할 이유도 없다.

그는 평생동안 부동산 개발업자로 살았다. 부동산 분야에서 비즈니스는 반드시 승패로 귀결되는 게임이 아니다. 피아가 분명하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사는 극단적인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내가 충분히 이익을 남길 수 있다면 경쟁자에게 이익이 돌아가도 무방하다. 그것은, 얻는 게 있으면 주기도 해야하는 하나의 거래이다. 또한 거래에서 최대한의 수익을 내기 위해서라면 위협, 허세, 속임수, 친근함, 칭찬이나 아부 같은 립서비스, 밀당, 정직 등 어떤 언행이나 태도도 구사할 수 있다. 이는 사업가적 실용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행동을 보면 다양한 전략적 언행이 읽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대선 때 한반도 정책의 방향을 강력히 시사했다. 그는 김정은과 나란히 햄버거를 먹으면서라도 더 나은 비핵화정책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어제 보도에 따르면, 그는 이미 199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만약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 지도자와의 대화에 맹렬히 나서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가 대통령 취임 후 북한과 대화에 나서기 전까지 그는 북한과 김정은을 향해 거친 언설을 쏟아부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과 되고 난 후 트럼프가 극적으로 변했던 것일까? 아마도 트럼프의 정책적 입장에 관해 그보다 더 잘못된 해석은 없을 것이다.

그가 내뱉는 말만 가지고 판단하면 트럼프 대통령은 때로는 무식하고 때로는 막무가내이거나 즉흥적이며 변덕이 죽끓은 듯한 인사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언행을 거래와 협상 전략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의 언행에는 놀라운 일관성이 발견된다.

끝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이전의 어떤 미국 대통령도 하지 않았던 커뮤케이션 방식을 구사하고 있다. 그는 선거 때부터 주류의 대중매체와는 척을 지고 트위터라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대중과 소통한다. 미국 대통령의 공식적 발화가 도날드 트럼프라는 개인의 사적 대화의 틀 속에서 터져나온다.

trump and twitt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지적처럼, 21세기에는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등 정보기술 덕분에 연극의 시대가 되었다. 어빙 고프먼(Erving Goffman)이 말하는 일상적 연극공연이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수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21세기적 연극공연의 탁월한 기획자이며 연기자이다. 무대, 소구 관객(target audience), 배역(character), 출연진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자신이 주도하는 공연에 대한 팀웍, 공감 획득, 그리고 공연의 궁극적 성공을 위해 각종 연극 기법을 거침없이 구사한다. 기존의 정치 커뮤니케이션에 포획되어 있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들은 그러한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본질도, 또 그것을 구사하는 트럼프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것이 결코 낯설지 않는 것임에도 말이다.

‘말에 품위가 없다’, ‘주류 언론과 싸우려고만 한다’, 이 말들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평가이다. 그런데 그 말들, 언젠가 들어본 익숙한 언급들이 아닌가? 맞다. 16, 17년 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귀에 따갑도록 듣던 표현이다. 그 때 우리는 노무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의 동일한 이유로 지금 우리는 트럼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소셜미디어 기반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선구자였다. 당시는 SNS가 아니라 블로그가 겨우 시작되던 시절이었고, 아직 웹사이트의 게시판이 지배적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시 그 어느 정치인보다 일찍 쌍방향적 소셜미디어를 이해하고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국가의 정상에 오르는 데 성공했다.

또한 노 대통령은 기존의 사고 프레임–냉전주의, 지역주의, 보수주의–과 기득권에 격렬하게 도전했다. 당시 노 대통령의 발화나 행동 방식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치인이나 유권자가 부지기수였다. 주류언론인 조중동은 노 대통령의 모든 것을 공격했다. 당연히 그의 탈인습적인 언행은 집중적인 비판을 면치 못했다. 노 대통령을 상기하면서 트럼프를 봐보라. 놀랍도록 유사한 행보를 읽을 수 있다.

트럼프는 언행에 있어 일관성이 뛰어난 사람이다. 그의 행동이나 정책이 좌충우돌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일관성이 낳은 결과일 뿐이다. 그는 미국의 국익을 미국민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경제적 번영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추구하고 있다. 그에게 예외란 없다. 그래서 소위 전통적인 우방국들이 아우성이다. 피아의 구분이 불분명해졌다. 정확히는 지금까지의 피아 구분이 먹히지 않는다. 그리고 적과 싸우려 하지도 않는다. 적을 굳이 패배시키려하지도 않는다. 설령 ‘적’과 윈윈하더라도 미국의 이익을 얻어내면 그만이라는 입장이다.

필자의 눈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데자뷰를 넘어서 트럼프에게 노무현 대통령이 빙의한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곤 한다. 진실은 우리 사회의 주류 언론인 조중동이 노무현을 공격하고 배격했듯이 지금 미국사회의 주류 언론인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가 트럼프를 공격하고 배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럼프의 기자회견을 봐보라. 그것은 거의 전쟁터이다. 미국 주류 언론의 기자들이 질문을 통해서 트럼프 대통령을 거의 죽이겠다고 작정하고 덤벼드는 양상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은 인정사정없다. 조중동 기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그렇게 하지 않았던가.

필자가 볼 때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이 구사하는 말은 ‘직설적’이기는 하지만 ‘막말’은 결코 아니다. 막말이라는 표현은 주류 언론인들이나 정치인들이 노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서 사용된 언어 폭탄이다. 고도로 계산된 발화가 어찌 부주의하게 내뱉는 막말일 수 있겠는가. 거칠게 보이는 표현은 상대의 위선을 드러내는 수단이기도 하고 엄포를 놓는 방식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의 기득권 사회가 추구하는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도 미국 기득권의 일부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는, 적어도 개입주의 이념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인, 정부관리, 무기 제조업체와 무기상, 주류 언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이익 카르텔을 해체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그렇게 해야만 미국 군인들을 고향으로 돌아가게, 나아가 미국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의 ‘줄타기’를 보면서 그의 안위가 걱정될 정도이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은, 불태울 마녀이거나 최소한 사형을 언도받아야할 악당이어야 한다. 그것은 남한의 극우보수만이 아니라 미국의 개입주의 카르텔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네오콘’에는 이념이 없다. 공존과 평화 대신 대립과 전쟁을 통해서 추구되는 이익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북미회담을 마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을 신뢰할만한 지도자로 인정했다. 김정은에게는 뿔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에게는 뿔이 없다고 폭로해 버렸다. 그러니 위태위태한 것이다.

지금 싯점에서는 어지간한 필부도 트럼프 대통령의 전략적 언행을 이해할 수 있을만큼 시간이 흘렀건만 우리 나라의 정치인과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는 아직도 그의 정체가 분명히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도 미국 대통령에 대한 역할 기대에 눈이 멀어서 진실을 보지 못하고 있거나 그의 자유분방해 보이는 수사에 현혹되어 진실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우리에게는, 한반도 문제에 관해 최소한 트럼프 씨가 합리적인 판단이 가능하고, 충분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그리고 머리 회전이 비상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정하고 그의 행보를 예측하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그리고 내친 김에 트럼프 대통령이 흔쾌히 인정하는 파트너인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 그리고 그의 카운터파트인 김정은 위원장에 대해서도 일국의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태도를 인정해야 비로소 현재의 한반도 문제가 투명하게 보이기 시작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윤영민, 2018-06-15)

트럼프, 문재인 그리고 김정은의 자아 표현 전략(2)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도전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초기 반응은 한 마디로 “죽을래? 끝장을 내버릴거야. 짜식, 까불고 있어” 였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과격한’ 행동이 “미국과 대화를 하고싶다”,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신호”라고 해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무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자극적인 트윗을 쏘아올렸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제재의 강도를 높여가도록 국제사회를 휘몰아갔다.

북한은 미국의 그러한 ‘협박’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한편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위협적발언에 대해 모욕적 발언으로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쪽 공해상을 향해 장거리 미사일을 쏘았다. 마치 이판사판 한판 붙어보자는 듯한 자세였다.

두 사람의 불놀이에 한반도는 한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위기 속으로 치달았다. 마치 누군가 금방이라도 핵단추를 누를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반도 전문가들은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개시할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정치는 명분과 실리를 두고 벌이는 게임이다. 특히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정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한 국가의 대표 선수(정상)의 한 마디 한 마디, 일거수 일투족이 그냥 나오는 법은 없다. 모두 관련국과 그 나라들의 대표 선수의 반응을 염두에 둔 계산적이고 전략적이라고 보면 된다. 게임의 목표는 승리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경쟁자를 압도하는 승리보다는 최대한의 명분과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정상들은 게임에서 명분과 실리를 거두기 위해 전략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한다.

대표 선수가 아무리 뛰어나도 팀 전체의 전력이 약하다면 게임을 이길 수 없다. 국제정치에서도 국력이 약하면 정상이 아무리 뛰어나도 마이너 리거를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나 운동 경기에서 대표 선수의 능력이 팀 성적의 중요한 요소이듯이 국제정치에서도 정상 요인(leader factor)은 대단히 중요하다. 동일한 국력이라도 뛰어난 지도자가 등장하면 국제정치라는 게임에서 훨씬 좋은 성과를 낼 수도 있다. 그래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제정치 국면에서 정상의 전략적 자아표현(strategic self-presentation)이 주목받지 않을 수 없다.

오래 전에 발표된 Edward Jones와 Thane Pittman(1982)의 논문, “Toward a general theory of strategic self-presentation”은 현재 긴박하게 전개되는 트럼프, 문재인, 김정은 세 사람의 국가 지도자들 사이의 상호 관계를 바라보는데 유용한 시각을 준다. 조운스와 피트먼에 의하면, 전략적 자아표현이란, 사람들이 목표 인물(target person)로 하여금 자신에 대해 특정한 인상을 갖게 만듦으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power)을 강화하려고 하는 언행을 말한다. 세 정상이 내놓는 발언이나 취하는 행동이 딱 그런 전략적 자아표현에 해당된다.

그들에 의하면, 전략적 자아표현에는 크게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환심사기(ingratiation), 겁주기(intimidation), 자기 PR(self-promotion), 모범화(exemplification), 간구(supplication)가 그것이다. 여러 가지 말, 표정, 행동이 환심사기에 속하지만, 특히 아부(flattery)가 대표적이다. 환심을 사려는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한다. 그들에 의하면, 어떤 구체적인 방법으로 환심을 사는가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첫째, 목표 인물의 환심을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둘째,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가, 셋째, 환심을 사는데 사용되는 방법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것인가이다.

겁주기는 리스크가 큰 전략이다. 겁주기의 중심은 위협(threat)인데, 잘못 사용하면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한 채 상호 관계의 파국만 초래할 수도 있다.

자기 PR은 자신을 능력자로 보이려는 전략이다. 자기 PR이 성공하려면 정말로 자신이 주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모범화는 상대에게 자신을 성실한 사람,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식시키려는 전략이다. 그것은 상대에게 자신을 보고 따라하게 하려는 시도이다.

끝으로 간구는, 자신이 도움이 절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려는 전략이다. 흔히 아이들이 부모나 어른들로부터 관심이나 도움을 받고자 할 때 그 전략을 사용한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상호 관계는 겁주기로 시작했다. 지난 1년 동안 북한이 내보낸 메시지를 종합해 보면, 현재 김정은이 절실히 희망하는 것은 자신과 북한의 안전 그리고 경제발전이다. 그런데 그 관건을 미국–현재로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쥐고 있으며, 김정은은 그 점을 대단히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북한과 미국의 오랜 적대 관계를 생각할 때 트럼프의 관심을 끌기 위해 김정은이 선택할 수 있는 자아표현은 겁주기 외에 없었을 것이다. ICBM에 핵탄두를 실어서 미 본토를 공격할 수 있을 정도가 아니고 북한이 트럼프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될 수 있었겠는가. 트럼프가 김정은과 햄버거를 먹으며 대화할 수 있다고 트윗을 날리고 김정은이 트럼프와 대화할 수 있음을 시사했을 때 과연 어느 언론사가 진지하게 그 말을 받았었던가.

미국과 북한이 험악한 말은 물론이고 미사일 실험과 제제 강화로 전쟁 분위기가 끝없이 상승하고 있을 때 한국의 국민과 대통령은 얼마나 공포에 떨어야 했던가. 미국과 북한이 전쟁에 들어가면 일차적, 그리고 최대의 피해자가 남한이 아니던가. 그 상황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남한의 대통령이라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까? 미국 ‘큰 형님’이 알아서 잘 해주길 넋놓고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해 7월 미국 방문을 기점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트럼프를 만나서 긴 회담을 하고, 베를린에서 평화를 지향하는 ‘신 베를린 선언’을 발표했으며, 중국에서는 ‘굴욕적인’ 대우를 받으면서도 시진핑 국가주석을 만났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이 모범화 전략을 취했던 것으로 해석한다. “신뢰할만한 지도자 나아가 자국민을 위해 간절하게 평화를 원하는 지도자”라는 인식을 트럼프, 시진핑 같은 주요 당사국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김정은에게도 굳게 각인시켰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문재인 대통령의 ‘눈물겨운’ 노력은 평창 올림픽을 통해서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실 그 지점에서는 미국과 북한도 대화 국면에 들어서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입장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리고 미국도 북한도 그렇지는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사실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을 김정은 못지 않게 트럼프에게도 절실히 필요했다. 여러 가지 스캔들로 국내 정치에서 코너에 몰려 있는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북핵 해결이 가을에 있을 중간 선거에서 승기를 잡게 해줄 묘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김정은은 신년사에서 평창 올림픽에 대표팀을 보내겠다는 의지로 남한에게 대화의 제스처를 보냈고, 핵무기 완성을 선언하면서 역설적으로 미국과의 대화 의사를 내보냈다. 평창올림픽은 미국과 북한, 즉, 트럼프와 김정은에게 대화를 시작할 명분을 주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부터 문재인 대통령의 언사에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자아표현 전략이 모범화에서 환심 사기로 전환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반도 대화국면 전환에 관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모든 공을 돌리는 모습,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을 정중하게 대하는 모습은 때로 국민들이 “저렇게까지 해야하나”하는 측은지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때 즈음해서 1년 전만 해도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파격적인 방식으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남북 정상이 만나고 북미 회담이 약속되고, 중국, 일본,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나라들이 대화 국면에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북한에 대해 가장 호전적이었던 아베 수상마저도.

모범화와 환심 사기를 결합한 자아표현 전략–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아니면 원래 그런 성격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으로 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는 자신의 의사를 정직하게 김정은 위원장에게 전달할 수 있는 지도자로, 그리고 김정은 위원장으로부터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자신의 뜻을 가감없이 전달해 줄 수 있는 민족 지도자로 인정받았다고 생각된다.

문 대통령은 1년도 채 되지 않은 사이에 미국과 북한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세계 정치 지도자들, 그리고 언론인들에게, 평화를 사랑하는 지도자, 겸손한 지도자, 현명한 지도자, 그리고 집요한 지도자라는 놀라운 인식을 심는 데 성공했다. 로버트 라이시(클린턴 행정부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UC Berkeley 교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문 대통령을 이렇게 극찬했다.

“Over the years, I have come across many presidents and prime ministers, and have worked with many of their governments. But rarely if ever have I witnessed someone as talented, intelligent, humble, and progressive as President Moon.”

한반도에서 평화를 향한 게임은 아직, 그리고 앞으로도 한참 동안 진행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우여곡절을 겪을 수도 있다. 70여 년 동안 지속되어온 적대와 불신이 어찌 단 시간내에 사라지겠는가. 부디 정치 지도자들이 현명한 말과 행동으로 한반도에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길 기원한다. (윤영민, 2018-05-28)

트럼프, 문재인 그리고 김정은의 자아 표현 전략(1)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내가 아는 어떤 여론 조사기관도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예측하지 못했다.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의 주요 매체들은 트럼프 후보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 상대적으로 영향력도 떨어지고 극보수 성향인 폭스 TV 정도가 예외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7년 1월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당당히 백악관에 입성한 트럼프는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를 내세우며 전례없는 방식의 정치를 시작했다. 그를 정치적 이단아쯤으로 조롱하듯 묘사하는 미국의 주류 매체들의 보도를 한 수 접고 보더라도 그는 ‘정치적인 것(political)’과는 거리가 먼 태도와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의 정치 코드를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동맹국이나 이웃 국가와의 전통적인 외교 관계도 존중하지 않았다. 게다가 후보 때는 물론이고 대통령이 되고나서도 그가 세계와 소통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사용하는 채널은 트위터(Twitter)였다. 그는 거의 매일 온갖 문제에 대해 트윗을 날렸다.

Trump twitter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전대미문의 트위터 정치를 선보인 것이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채널을 통해서 자신의 의견을 공개하는 미국 대통령–다른 나라의 국가수반도 그렇다–의 전통적인 소통방식과는 크게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홍보, 의전, 혹은 외교 팀에 의해 사전에 걸러지고 조정되는 소통과는 크게 다른 방식이다. 한 국가 정상의 발언이 트위터라는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대단히 개인화된 메시지의 형태로 거의 매일 터져나오는 것이다.

트럼프의 트위터 정치는 미국인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인들까지도 당황하게 만들곤 한다. 미국 정부 관리는 물론이고 미국의 언론인, 유권자, 기업인, 그리고 외국의 정상, 관리, 외교관, 언론인, 기업가, 심지어 국민들마저도 시도 때도 없이 올라오는 그의 트위터에 주목해야 한다. 그는 백악관 보좌관의 임명과 해임, 국무장관의 임명 등과 같은 주요 인사의 통보에 트위터를 사용하고, 외국의 정상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도 트위터에 올리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통령이 내놓는 공적 메시지와 도날드 트럼프라는 개인의 사적 메시지가 뒤섞이면서 대통령직의 수행이 트럼프 개인의 매우 개인적인 선호, 의사결정, 그리고 능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대통령 취임 후 미국의 경제를 부흥시키고 일자리를 늘이겠다는 공약을 실천에 나선 트럼프는 그 자신이 정의한 미국의 국익–미국내 투자 확대, 일자리 증가, 무역 역조 개선–이라는 오직 하나의, 그것도 매우 단기적 관점에서 대외 관계를 원점에서 다시 검토하겠다는 듯이 무섭게 달려 들었다. ‘설마’ 하면서 눈치를 살피던 국가들과 기업들이 트럼프가 허풍쟁이가 아님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국, 멕시코, 일본, 독일, 영국, 대한민국  등의 국가들, 그리고 미국 내외의 대기업들이 앞다투어 트럼프의 신호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 투자를 늘리겠다는 약속과 행동, 무역 역조를 개선하겠다는 약속과 조치가 줄을 이었다. 그들은 트럼프가 그들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사업가’ 대통령을 상대하고 있음을 인식했고, 아직은 미국도, 그 미국의 힘을 휘두르는 트럼프 대통령이 결코 종이 호랑이가 아님도 실감했다.

그런데 어느날 동북아시아의 한반도 북쪽에서 강펀치가 날아오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 아직 미국과 적대적 관계에 있는(그런 나라가 별로 없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사일 발사 실험이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수준으로 급 진전되는 것이었다. (윤영민, 2018-05-27)

Marshall McLuhan과의 가상적 대화(4)

만리거사: 이제 선생님과의 대화가 종착역에 가까워졌습니다. 선생님과 저와의 대화에서 다른 분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선생님과 제가 공감한 점은 새로운 시대가 대화의 시대, 참여의 시대라는 인식입니다. 선생님을 그것을 쿨미디어의 시대라고 규정하셨고, 저는 인간메시지의 시대라고 규정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선생님은 참여를 강조하였고, 저는 의미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참여와 의미의 공통점이 바로 인간이라는 점에서 선생님과 제가 도달한 지점이 같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은 social media의 네트워크성에 주목합니다. 그래서 SNS라는 용어가 뜨고, 인맥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트워크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정작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은 인간과 의미입니다. 네트워크를 쫓는 것은 잘해야 꽁무니를 쫓는 일이고 대개는 헛다리를 짚는 일입니다. 네트워킹은 수단일 뿐이지요.

아무튼 이 점이 이번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제가 얻은 가장 큰 성과입니다. 이번 대화 덕분에 최근 Mark Zuckerberg의 행보에서 network에서 meaning으로의 이동이라는 변화를 읽어냈습니다. 지적 돌파구를 열 때는 항상 선생님 같은 대가와 붙는 것이 최곱니다. 바로 아이디어를 얻든 지, 아니면 비판 속에서 아이디어가 파생적으로 얻어질 수도 있거든요. 죄송합니다. 선생님의 지적 세계를 너무 거칠게 다루어서요. 이해해 주시길 부탁 드립니다. 제가 워낙 훈고학을 싫어해서요.

끝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을 나누지요. 문화적 갈등에 관한 것입니다. 선생님은 문화적 갈등을 어떤 뜻으로 사용하셨나요?

McLuhan: 세상의 변화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항상 치열한 갈등을 수반하지요. 문화적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각 문화(visual culture)에서 구두 문화(oral culture)로의 변화도 그렇습니다. 예컨대 학교는 죽어가는 인쇄문화인 선형적 사고와 시각적 가치에 포박되어 새로운 사고방식과 가치를 핍박하고, 새로운 세대들에게 “담벼락 없는 감옥”이 됩니다. 탈중앙화, 분산화 경향은 기존의 관료제도와 충돌합니다. 1960~70년대 저항문화와 지배문화의 충돌은 바로 그러한 문화적 갈등의 표출이지요.

만리거사: 좋은 말씀이십니다. 요즈음 저는 우리 사회에서 비슷한 문화적 갈등을 많이 봅니다. 참여적, 수평적 대화가 핵심인 새로운 문화와, 일방적,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이 근간이 된 기존 문화 사이에 치열한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일방적, 수직적 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입니다. 참여적, 수평적 대화가 차츰 확산되고는 있지만 아직 걸음마에 불과합니다. 지난 몇 년간 과거의 권위주의 문화가 다시 회귀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과거 문화의 복수”일 수도 있지요.
제가 마지막에 문화적 갈등을 들고나온 이유는, 기업이나 기관 조직 내부에서도 그렇고, 사회 전체적으로 보아도 문화적 전환이 심각한 갈등을 수반하지 않고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선생님과의 대화를 마치려고 합니다. 선생님께 충분한 발언 기회를 드리지 않고 거의 일방적으로 공격만 한 점, 진심으로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제 능력이 거기까지입니다. 선생님이 저의 무례를 기꺼이 용서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지요.

“내 책들은 발견의 완성된 산물이 아니라 발견의 과정을 구성한다”. 언제든 까 부셔도 좋다고요.

다시 영면하시길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 <끝> (윤영민, 2018-05-17)

Marshall McLuhan과의 가상적 대화(3)

Tet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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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거사: 선생님, 아마도 지구촌(global village)과 재부족화(retribalization)는 선생님께서 고안하신 개념들 중 가장 널리 애용되고 있을 겁니다. ‘지구촌’은 선생님 생전 때부터 현재까지 대중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재부족화’는 지난 10여 년 사이에 학문적으로 부활하고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특히 노마디즘(nomadism), 부족주의(tribalism)에 관심을 가진 프랑스 학자들이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그런데 애초에 그 개념들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였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 개념들이 원래의 의미를 많이 잃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거든요.

McLuhan: 한 명의 학자로서 사후에도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널리 애용되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고 영광이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 개념들이 대중화되면서 제 원래 의도가 다소 왜곡되고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이미 그 개념들이 제 손을 떠나 사회적 자산이 되었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사용되든 사실 제가 관여할 일은 아닙니다만 원 뜻이 존중된다면 저로서는 더욱 만족스럽겠지요.

제가 하늘에서 내려다 보니까, ‘지구촌’에 대한 가장 심각한 오해는 그것을 사랑과 조화가 충만 된 곳으로 인식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그런 의미로 사용한 적이 없는데. Playboy지 인터뷰에서도 분명히 밝혔듯이 “일치(uniformity)와 평온(tranquility)이 지구촌의 특징은 아닙니다.” 부족화되면 사랑과 조화만큼 갈등과 불일치도 잦아집니다. 부족이란 게 원래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서로 협력하기도 하지만 헤게모니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기도 하고 뭐 그런 것 아닌가요?

사려 깊은 독자라면 “지구촌”과 “미국의 발칸화”라는 두 현상이 서로 별개이거나 상충되는 경향이 아니라는 내 입장을 정확히 파악했을 텐데, “미국의 발칸화”는 무시하고 “지구촌”만 살려 놓는 탓에 그런 오해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만리거사: 선생님이 글을 너무 재미 없게 써서 독자들이 선생님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때문도 있겠지요. 그건 선생님 자신의 책임이 큰 것 같네요. 그리고 미국의 발칸화로 표현한 소국(ministates)의 번성이라는 예상이 빗나갔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명제를 무시하거나 잊어버린 게 아닐까요? 결국 “지구촌”만 살아남은 것이지요.

McLuhan: 뭐 틀린 해석으로 보이지는 않군요. 근데 내가 서로 대비해 지적했듯이, 인쇄미디어는 사회적으로 중앙집중화(centralizing)시키고, 심리적으로는 파편화(fragmenting)시킵니다. 반면에 전자미디어는 사회적으로 탈중앙화(decentralizing)시키고, 심리적으로는 통합(integrating)시킵니다. 인쇄미디어는 개인주의를 촉진시키며, 거기에서 자유(freedom)는 기껏해야 소외되고 파편화되기 위한 권리일 뿐입니다. 반면에 전자미디어는 부족주의를 촉진시키고, 통합된 개인을 출현시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결과 수많은 소국들(ministates)이 출현하리라 예상했습니다. 나는 그런 맥락에서 미국의 발칸화(balkanization of the United States)를 예견했던 것입니다.

만리거사: 제가 보기에는 미국의 발칸화라는 예측이 맞지 않았다는 사실이 선생님의 인쇄미디어와 전자미디어의 구분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선생님은 TV를 전자미디어라는 이유로 신문과 다른 사회적 영향을 줄 것이라고 단정했는데, 거기에 문제가 있었을 수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을 공부하는 젊은 연구자들은 신문과 TV를 한 묶음으로 간주합니다. 뭐 선생님도 기억하실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좀 오래 된 연구자들도 그렇게 봅니다. 세 가지 의미에서이지요. 하나는 일방향적 매체라는 점, 둘은 중앙집중적 매체라는 점, 셋은 사회통합적 매체라는 점입니다. 신문이나 TV같은 대중매체가 일방향적이라거나 중앙집중적이라는 점은 요즘은 상식적인 얘기이고, 사회통합적 매체라는 주장은 좀 논란 중입니다.

위르겐 하버마스, 베네딕트 엔더슨(Benedict Anderson), 그리고 최근에는 카스 선스타인(Cass Sunstein) 같은 학자들이 대중매체의 사회통합적 기능에 주목합니다. 선생님과는 다르지요? 이 중 하버마스와 선스타인은 인터넷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사회를 파편화시킨다는 겁니다. 소위 반향실(eco-chamber) 효과라는 가설인데, 뭐 인터넷이 사용자들에게 고도의 정보선별(filtering) 기능을 제공하기 때문에 유사한 생각, 유사한 취미, 유사한 정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뭉치는 경향이 강화된다는 그런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을 위협한다고 주장합니다. 반 앨스타인과 브린졸퍼슨(Van Alstyne and Brynjolfsson)은 그것을 사이버발칸화(cyber-balkanization)라고 불렀는데, 선스타인은 사이버발칸화를 넘어 사회 전체에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를 초래하고, 인터넷은 테리리스트나 KKK같은 극단적 집단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주장합니다.

반면에 요차이 벤클러(Yochai Benkler)나 클레이 셔키(Clay Shirky), 그리고 저도 그렇습니다만, 대중매체는 상당히 엘리트 중심적이고, 억압적인 측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대중매체는, 통합은 통합인데, 불평등한(비대칭적 정보) 계층질서 위의 통합을 촉진하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사회통합이 아니라는 거지요.

저는 인터넷이 바로 그 지점에 도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도전을 “엘리트주의의 종말”, “지식인의 죽음”이라고 해석합니다.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지식인이 아니라, 비대칭적 지식 분배 위에 권력을 향유하는지식권력으로서의 지식인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일방향적 매체, 선생님 표현으로 하자면 hot media가 사라짐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사실 쿨미디어(cool media) 시대가 온다는 선생님의 예측은 놀랍게 들어맞았습니다. 인터넷 세상이 바로 그것이고, Social media야말로 쿨미디어가 아니겠습니까? 지난번에 제가 선생님의 쿨미디어 주장을 비판한 것은 이제 모든 매체가 쿨미디어가 되었기 때문에 핫미디어니 쿨미디어니 하는 구분이 불필요하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미국의 발칸화” 예측이 틀린 또 다른 이유는 선생님이 민족주의(nationalism)의 자기 재생산 능력을 과소 평가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뭐 부족을 강조하다 보면 당연히 민족주의를 가볍게 보게 되겠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민족주의는 죽은 개가 아닙니다. 아직도 한참 동안 민족주의는 사람들의 정체성(identity)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세계의 정치적 지형을 형성하는데 있어 거대한 힘을 행사할 것입니다. 민족, 민족주의, 민족국가와 같은 논쟁은 별도로 해야 하겠지만, 간단히 말씀 들이자면, 그것들을 기능적으로만 접근하는 학자들은 쉽게 민족국가의 종말을 얘기하지만, 근본적으로 민족이 지닌 역사적, 그리고 권력적 측면을 무시했기 때문에 나온 섣부른 결론이지요. 선생님도 그런 학자들 중 한 분이고요.

그렇다고 “부족”의 개념이 무용하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마페졸리(Michel Maffesoli)가 말하는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 집단으로서의 “부족주의”는 민족주의와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부족주의”와는 좀 다르지요? 마페졸리는 선생님한테 큐를 받아서 “신부족주의”를 제기했는데, 선생님만큼 그렇게 all-encompassing(모든 것을 포함하는) 컨셉을 제시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인터넷상에 마페졸리적 의미의 “부족”과 “부족주의”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페이스북이 전세계 사용자 5억 명을 넘어 질주하고 있습니다. 매일매일 지구적 규모로 돌아가는 페이스북이 갖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혹은 문화적 함축성이 무엇일까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일단 선생님의 시각을 원용하면, 페이스북에 등장한 실시간 지구촌에는 한편으로 “사랑(love)과 조화(harmony)”가 넘치고, 다른 한편으로 “단절(discontinuity), 다양성(diversity), 분리(division), 갈등(conflict), 불일치(discord)”가 끊임 없이 발생하리라 예상되는 군요. 뭐 크게 인상적인 예측은 아닌데요. 좀 더 구체적인 전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선생님이 주실 수 있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윤영민, 2018-0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