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벌레’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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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를 풀듯이 읽는 작품. 현실에서는 결코 발생할 수 없는 변신.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는 왜 이런 황당한 작품을 남겼을까? 변신과 갑충은 무엇의 메타포로 봐야할까?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말도 안되는 변신이 주는 황당함, 그리고 심지어 거부감과 더불어 책읽기가 시작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독자는 갑충-그레고르와 동일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점이야말로 이 단편이 지닌 가장 큰 매력일지도 모른다.

“나도 어느날 갑자기 갑충으로 혹은 갑충처럼 변해 있지 않을까?”

“타인의 눈에도 발견되지 않고 자신도 모르고 있을 뿐 내 자신 안에 갑충처럼 징그러운 모습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날 내가 갑충처럼 흉물스럽고 쓸모없게 변한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나를 사랑해줄까? 내 부모님은, 내 아내는, 내 형제들은, 내 자식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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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후반부로 가면서 독자는 그레고르가 겪는 아픔과 변화보다는 갑충-그레고르에 대한 가족의 심리와 태도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독자의 시선은 이내 자기 자신을 향한다. 그레고르의 부모와 누이동생은 갑충-그레고르에 대해 점점 무관심해지고 심지어 그가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마음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존재 부정이 뒤따른다. 즉, 처음부터 갑충은 그레고르가 아니었다며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훙물스럽고 쓸모없는 존재로 변하는 두려움을 갖고 살며, 가족이나 이웃 누군가가 그렇게 변신할 때 그에 대해 무관심하고, 부담스러워하며, 결국 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나약한–어찌보면 비정한–인간이 아닐까.  우리 중 누가 자신은 결코 ‘벌레’일 수 없고, 절대로 ‘벌레’가 되지도 않을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 중 누가 ‘벌레’가 되어버린 가족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으며, 그 ‘벌레’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의 사랑과 용기란 그렇게 약하고 부족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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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충-그레고르는 굶어 죽었다. 그런데 그(것)는 정말로 굶어서 죽었을까? 그것은 표면적인 사인일뿐 가족의 무관심이나 절망감 때문에 죽은 것은 아닐까? 우리 주위에 무관심과 절망감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그런 사람을 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에 대해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치매에 걸린 부모, 불치병에 걸린 아내, 직장을 잃은 남편, 능력없는 이웃, 희망을 찾지 못하는 젊은이, 냄새나는 노인….우리는 혹시 잠자 가족처럼 그들을 갑충-그레고르로 바라보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아직 생명이 붙어있음에도 존재를 부인당하고 있지는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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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 척 하지마. 우리는 벌레야!” <변신>에서 카프카는 내게 그렇게 외치고 있다. (2016. 5. 26)

신의 언어, 선지자의 언어

수학

이 세상을 창조하는데 왜 6일이나 걸렸을까? 전지전능한 신인데 한 순간이면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에 대해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e)는 이렇게 생각했다. ‘6’이 완전한 숫자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주의 완전함을 계시하기 위해 일부러 6일이나 시간을 끌었다”(사이먼 싱, 1998에서 재인용).

완전수(complete number)란 약수들의 합이 본래의 수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수를 말한다. 6의 약수는 1, 2, 3이고 그 셋을 더하면 6이다. 6 다음의 완전수는 28이다.

완전수의 존재를 발견한 것은 피타고라스(Pitagoras de Samos)였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통해서 우주의 비밀을 밝힐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세상이 수학적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유명한 피타고라스 정리는 그가 찾아낸 법칙 중 하나였다. 그로부터 2천년 후 갈릴레오(Galilo Galilei)는 같은 의미에서 “신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언어가 수학이다”라고 주장했다.

수학자나 과학자가 아니고는 그러한 주장에 공감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그러한 믿음을 버리지 않은 수학자나 과학자들이 많다.

나는 그러한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수학적 해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 좀 걸릴 뿐이다.

수학자들만 신의 의도를 읽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선지자들(prophets)도 그러했다. 그러나 그들은 수학자들과 달랐다. 수학자들이 신의 기획을 이해하려고 했다면, 선지자들은 신의 뜻을 대중에게 전달하려고 했다.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 선지자들이 선택한 표현 형식은 메타포(metaphor, 은유 혹은 비유)였다. 예수, 공자, 석가모니와 같은 인류의 스승들은 예외 없이 메타포를 즐겨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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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포는 수학에 못지 않게 강력한 표현 도구이다. 그것은 청중의 수준에 맞추어 메시지가 전달될 수 있게 해주고, 선지자가 권력의 탄압을 피해갈 수 있게도 해준다. 게다가 두고두고 시대에 따라서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준다.

메타포의 구조는 단순하다. 한편에는 중대하거나 난해한 메시지가 있고 다른 한편에 일상적인 개념이 있다. 추상적인 메시지를 직관적 언어로 풀어주는 방법이다. “인생은 여행이다”, “TV는 바보상자”, “삶은 한편의 연극”, “인터넷은 정보의 바다”….

때로는 한 문장이나 한 문단이 아니라 책, 그림, 조각, 건물, 영화 등이 통째로 메타포일 수도 있다. 예컨대 성경 중 가장 난해하다는 요한 계시록이 그러하다.

나는 뛰어난 S.F. 소설이나 영화도 하나의 메타포로 간주한다. 조지 오웰의 <1984>,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이번 주 학교 수업에서 다루었으며, 오늘 고전 문학 동아리에서 토론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도 그렇다.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거기에는 오늘의 관점에서 재발견해야 하는 역사서의, 그리고 역사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S.F.도 그러하다. 그것은 단순히 미래에 관한 상상의 산물이 아니다. 거기에는 오늘의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하는 작품의, 작가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탁월한 S.F.는 현대 사회에 대한 철학이며 윤리학이고 사회학이다. 거기에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 인간과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치와 규범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녹아있다. 청중은 거기에서 오늘날에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찾을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깊은 성찰의 기회를 갖게 된다.

수학으로부터, 그리고 뛰어난 메타포와 S.F.로부터 우리가 더욱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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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yes 학습)(12)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여아출생비율

오래만에 다시 베이즈 공부로 돌아왔다. 예전에 공부한 것을 복습도 할겸 라플라스(Laplace)가 베이즈 정리를 이용해 구했던 18세기 프랑스 파리의 여아출생률(female birth rate) 계산을 생각해 보자.

라플라스에게 주어진 데이터는 1745년부터 1770년까지의 프랑스 파리의 출생 기록이었다. 그 기간 동안 총 출생(live births)은 493,472명이었고, 출생한 여아는 241,945명이었다. 물론 남아는 251,527명이었겠지.

이것을 라고 표기하자. 그리고 파리의 여아출생비율을 라고 하면, 이 되겠다. 비율이 0과 1사이라는 의미이다.

베이즈 정리에 따르면, 사후확률(posterior probability)은 우도(likelihood)와 사전확률(prior probability)의 곱에 비례하니 먼저 우도와 사전확률을 추정해야겠지.

우도(likelihood)는, 범주가 여아와 남아 둘 뿐인 비율이니 아래와 같이 이항분포(Binomial distribution)로 놓으면 되겠다.

그리고 사전확률은 라플라스의 예에 따라 아래와 같이 균일분포(uniform distribution)로 두자.

베이즈 공식을 적용해서 사후확률, 을 구하면 다음과 같다.

라플라스는 정규화(normalization)에 필요한 적분(분모)을 계산하기 위해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가 1730년에 발견한 베타함수(Beta function)를 이용했다. 베이즈 목사는 하지 못했던 계산이지. 그렇게 하면 다음과 같은 사후확률이 구해진다.

간단하지? 그런데 사실은 그 뒷면에 아래와 같은 복잡한 계산이 있다.

위에서 Uniform(|0,1) = Beta(|1,1)임을 상기해라.  베타분포를 복습해 보면,

For parameters ,

오일러의 베타함수가 정규화를 위해서 다음과 같이 사용된다.

여기서 는 계승(factorial)의 연속적 일반화이다. 이 부분은 복잡하지만 네가 파이썬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파리의 여아출생비율로 돌아오면, 사후확률은 Beta(|1+241945, 1+251527)이다.

그리고 사후확률의 평균은,

즉, 여아출생비율은 49%로 추정된다. 남아출생비율은 당연히 51%가 될 것이다. 남아출생비율이 여아출생비율보다 다소 높다.

기존에 존재하던 증거나 믿음으로 추정되는 사전확률(prior distribution)이, 데이터와 모수의 관계를 이어주는 우도(likelihood)에 의해 업데이트되어 사후확률(posterior distribution)이 구해졌다. 이 사후확률 분포의 일차 모멘트가 평균이다. 하나의 모집단 비율을 베이즈 추론으로 구해보았다. 이는 가장 간단한 베이즈 추론의 경우가 되겠다. 이제 좀 더 복잡한 경우들을 다루어 보자.

참고문헌

Bob Carpenter. 2015. “Bayesian Inference and Markov Chain Monte Carlo.”

Surya Tapas Tokdar. 2013. “STA 250: Statistics Notes 7. Bayesian Approach to Statistics.” Book chapters: 7.2

 

<앵무새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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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1930년대 초반 미국 앨라바마주의 메이콤(Maycomb)이라는 가상적 타운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야기이다. 저자 Harper Lee는 스카웃(Scout)이라는 여덟살 소녀의 자전적 소설 형태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메이콤에는 톰 로빈슨(Tom Robinson)이라는 20대 흑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아내와 세 아이를 두고 있으며 사고로 인해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톰은 백인 농장에서 일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가까이에 살고 있는 메이옐라 이웰(Mayella Ewell)이라는 가난한 백인 여성(19세)을 강간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해당지역 법원의 Taylor 판사는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라는 변호사를 국선변호인으로 선임하여 재판을 진행한다.

애티커스는 메이콤에서 몇 대째 살아오고 있으며, 누구나 법앞에 평등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양심적인 변호인이었다. 그는 젬(Jem)과 스카웃(Scout)이라는 남매를 두고 있었으며, 이 소설은 젬과 스카웃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애티커스가 사건을 조사해보니 메이옐라와 그녀의 아버지 밥(Bob)이 톰에게 죄를 덮어 씌운 게 분명했다. 사실은 메이옐라가 톰을 유혹해서 관계를 맺으려고 하다가 일어나 사건이었는데, 그들이 애티커스를 거꾸로 강간폭력범으로 신고한 것이었다.

당시가 어떤 때였는가. 1930년대는 미국 남부에서 아직 인종차별이 강력하게 존재하였고, 특히 앨라바마 주는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가장 극심하던 곳이었다.

톰을 위해 성실하게 변호했던 애티커스(와 그의 가족)는 점점 메이콤에서 왕따가 되어갔고, 배심원들은 애티커스의 결정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톰에게 유죄평결을 내렸으며 톰에게는 사형이 언도되었다. 사실 그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다.

어느 날 메이옐라의 아버지 밥(Bob)은 젬과 스카웃 두 남매를 죽이려고 했다. 자신과 자기 딸의 비행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에티커스 변호사에 대해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명 소리를 들은 부 래들리(Boo Radley)가 달려와 아이들의 목숨을 구했고 그 과정에서 밥은 식칼에 찔려서 죽었다.

부(Boo)는 젊은 시절 사고를 쳐서 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감금된 후 평생 동안 바깥 외출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타운 사람들은 그가 정신질환자일 것으로 추측했다. 부는 이 소설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다. 비록 소설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제대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사실 부는 소설의 초기부터 꾸준히 등장한다.

매이콥의 보안관 테이트(Tate)는 부 래들리가 밥을 칼로 찔렀음을 알아차렸지만 밥이 자살한 것으로 처리한다. 그것은 부가 이웃 아이들을 도와주려다 돌발적으로 발생한 사고였고, 평생 심각한 대인기피증으로 고생하는 부가 사람들의 방문이나 재판을 감당할 수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책 제목 <앵무새 죽이기>는 사회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전혀 해가 되지 않은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의 편견과 아집 때문에 고통받거나 목숨을 잃는 현상에 대한 메타포이다. 이 책에서 흑인인 톰 로빈슨과 백인인 부 래들리가 바로 그런 앵무새와 같은 사람들이다.

이 책은 주인공의 아빠인 애티커스 핀치 변호사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기독교적인 사랑, 공감, 정의, 평등, 관대함 등이 인종, 성별, 재산, 직업, 종교, 생활방식 등이 크게 다른 주민들로 구성된 한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표현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기독교적 타운에서 기독교적 주민들에 의해 반기독교적인 증오, 억압, 차별, 폭행 등이 자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작은 지역사회가 유지되는 데 필수적인 지혜를 알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자신과 다른 이웃들에 대한 구성원들의 공감과 배려가 그것이다. 이 점은 특히 작은 농촌 마을에 사는 내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어린 왕자>처럼 이 책도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매서운 거울이었다. 다음은 몇 가지 기억해둘만한 구절이다.

공감: “누군가를 정말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 하는 거야….말하자면 그 사람 몸 속으로 들어가 그 사람이 되어서 걸어 다니는 거야.”(60-61)

용기: “수백년 동안 졌다고 해서 시작도 해보지 않고 이기려는 노력조차 포기해 버릴 까닭은 없어.”

용기: “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새로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낼 때 바로 용기가 있는 거다. 승리란 드문 일이지만 때론 승리할 때도 있지.”(214).

양심: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기 전에 나 자신과 같이 살아야만 해. 다수결 원칙에 따르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건 바로 한 인간의 양심이야.”(200)

‘율도국’에 나타난 ‘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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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저녁 집 근처의 장성 군립도서관에서 열린 고전 소설 독서 동아리 모임에 갔다. 지난 달 10여명이 모여서 시작했는데, 어제 열린 첫 모임에 주최측인 군립도서관 직원 두 명과 나, 그렇게 3 명이 참석했다. 참석자는 적었지만 우리는 <홍길동전>과 <어린 왕자>를 가지고 두 시간이 넘도록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참석자가 적어서 다행히 실컷 얘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3백 여년 전 조선 최고의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허균은 <홍길동전>에 자신의 유토피아 기획을 제시했다. 처절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친 16세기말 조선은 전쟁과 궁핍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적서 차별, 부정부패 등 정치와 사회현실도 백성들의 눈에는 절망적 상태였으리라. <홍길동전>에는 그러한 시대에 대한 허균의 인식이 깊이 베어 있다.

작품 속 홍길동은, 조선 최고의 성군이었던 세종대왕의 치세에, 재상의 집안에서, 영웅적 자질을 완벽하게 갖춘 서자로 세상에 태어났다! 아, 얼마나 비극적인 상황 설정인가. 엄격한 노예제, 신분제의 사회인 조선 초기에 서자로 태어났다! 그것도 영웅호걸의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재상의 집안에서….

허균은 초인적 영웅이 나타나 자신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주길 소망했으리라. 그가 의적의 모습으로 오던 왕의 모습으로 오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의적떼 활빈당 수령 홍길동은 조선을 구제하지 못하고 결국 조선을 떠나 율도국의 왕이 되지 않는가.

허균은, 세종대왕이라는 최고의 성군과 홍길동이라는 초인적 영웅의 만남을 사회 개혁과 혁신을 낳지 못한 채 끝나게 만든다. 적서차별로 대변되는 모순된 사회구조는, 시대를 앞서간 혁명가 허균에게도 도전하기에 너무 벅찬 상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허균은 홍길동과 활빈당이 조선의 율법이 미치지 않은 율도국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게 만든다. 그것도 홍길동이 왕이 되어서 말이다.

허균은 율도국이라는 유토피아를 이렇게 그린다.

“새 왕이 왕위에 오른 후에 시절이 태평하여 풍년이 들고, 나라와 백성이 편안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임금이 베푼 덕이 온 나라에 퍼져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주워가는 이가 없었다(101쪽).”

허균은 홍길동이 영웅의 꿈을 이루었다고 칭송하면서 이야기를 마친다.

“아름답구나! 길동이 행한 일들이여! 자신이 원한 것을 흔쾌하게 이룬 장부로다. 비록 천한 어미 몸에서 태어났으나 가슴에 쌓인 원한을 풀어 버리고, 효성과 우애를 다 갖춰 한 몸의 운수를 당당히 이루었으니, 만고에 희한한 일이기에 후세 사람에게 알리는 바이다(105쪽).”

전쟁이 없고, 백성의 육신이 편안하고 부유하게 사는 사회가 율도국에 실현시킨 허균의 유토피아이다.  그런데 과연 율도국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왕이 된 홍길동과 그 집안은 틀림없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에서 백성들도 과연 두루두루 행복했을까?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바로 ‘율도국’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홍길동전>이 끝나는 지점에서 <어린 왕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율도국’을 찾아온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의 어른들이 얼마나 세상을 잘못 살고 있는 지를 보여준다.

우리 사회는 허균이 율도국에 그렸던 유토피아를 이루었다. 적어도 경제적 측면에서 말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의 대다수는 조선 시대의 귀족은 물론이고 왕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에 산다. 길거리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서 주워가는 사람이 없기도 하다. 물건 나름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그 유토피아의 주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국민이다. 자살률 1위, 자살 증가율 1위, 노인빈곤율 1위 등등 어느 지표로 보아도 우리 국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하다.

<어린 왕자>는 유토피아에서도 사람들이 불행할 수 있음을 깨우쳐 준다. 권위와 지배, 부유함과 편리함, 그리고 일에 집착한 사람들(‘어른들’)은 무엇이 삶에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판단할 수 있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성장의 댓가인지도 모른다.

<어린 왕자>는 독자를 발가벗기는 거울이다. 우리의 민낯, 몸뚱이, 그리고 마음 속까지 남김없이 보여주는 무서운 거울이다.

초인적 영웅들은 유토피아의 기반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영웅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진정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데 영웅들이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아니 초인적 영웅을 기다리는 한, 영웅 의존성을 버리지 못하는 한 우리는 결코 행복한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없을 것이다. 유토피아는 모두가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윤영민, 2016/02/26)

어린 왕자와 장미 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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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을 타고 오르는 넝쿨 장미의 가시

닷새째 되던 날 어린 왕자가 주인공에게 물었다.

“가시는 어떤 쓸모가 있어?”

고장난 비행기를 수리하는데 여념이 없던 주인공은 건성으로 대답했다.

“가시는 아무런 쓸모가 없어. 가시는 꽃이 부리는 단순한 심술일 뿐이야!”

“아저씨는 정말 그렇게 생각해? 꽃들이…..”

“아니! 난 아무 생각도 없어! 그냥 아무렇게나 대답한 거야. 난 지금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고!”

주인공의 태도에 어린 왕자는 크게 실망한 모습이었다.

“중요한 일이라고?”….

“아저씨는 어른들처럼 말하는구나!”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김미성 옮김, 인디고, 2016)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화가 난 어린 왕자는 주인공에게 수백만년 동안이나 계속되고 있는 양들과 꽃들 사이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가시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고 알려준다.

“나는 연장을 내려놓았다. 망치도, 볼트도, 목마름도, 죽음도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별, 어떤 행성, 내 행성, 바로 지구에 위로해 주어야 할 어린 왕자가 있었다(56쪽).”

“미안하다. 아빠는 지금 정말 중요한 일을 하느라 너와 대화를 하지 못하겠구나.” “여보, 중요한 일 때문에 다음 주에 당신과 여행가기로 한 약속을 연기해야겠어. 미안해요.” 늘 그렇게 구차스럽게 변명하면서 우리는 진정으로 소중한 순간, 소중한 인연을 놓치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구별 여행을 후회없이 마치기 위해 꼭 해야만 할 정말 “중요한 일”은 무엇일까(윤영민, 2016/02/16).

빗속에 국화를 심으며(雨中種菊)

하서 김인후(허경진 역)*

種木當種松(종목당종송, 나무를 심으려거든 당연히 소나무를 심어야 하고)

種花當種菊(종화당종국. 꽃을 심으려거든 당연히 국화를 심어야 하제)

松留四豈春(송유사기춘, 소나무는 사철 봄을 머물게 하고: 豈 어찌 기; 왜 기 자를 썼을까?)

菊禀中央色(국품중앙색. 국화는 중앙색(황색)을 보여주지 않는가: 禀 여쭐, (내려)줄, 받을 품; 황색은 제왕이나 성스러운 것을 상징한다)

幸我以病歸(행아이병귀, 다행히 나는 병들어 (고향에) 돌아오니: 허허 병들어 고향에 돌아온 게 다행이라니! 정치가 얼마나 어지러웠으면 그리 느꼈을까?)

田園頗自得(전원파자득, 들과 뜰이 참으로 흡족하다: 頗 자못, 매우 파; 得 얻을, 만족할 득; 자득 스스로 만족함)

寒移北嶺稚(한이북령치. 추울 때 북쪽 고개의 어린 소나무를 옮기고: 稚 어릴, 작은 벼 치, 어린 소나무라는 뜻으로 썼을까?)

雨分東籬綠(우분동리록, 빗속에 동쪽 울타리의 푸른 국화를 나누었다; 籬 울타리 리;綠 푸를 녹을 푸른 국화로 번역해야 하나?)

千年霜雪幹(천년상설간, 천년의 눈서리를 맞은 등걸에는:幹 줄기 간)

秋風襲晩馥(추풍습만복, 가을바람에 늦은 향기가 스며드는구나: 襲 엄습할 습, 馥 향기 복)

且釀中山醪(차양중산료, 이제 중산의 술(막걸리)을 빚어: 醪 막걸리 료, 중산이라는 사람이 빚은 천일주)

采采泛盈掬(채채범영국, 국화를 따다 술잔 가득 채우리: 采 딸 채, 泛 뜰 범, 盈 찰 영, 掬 움킬 국, 해석이 참 어려운 대목이다.)

하서가 귀향해서 자연과 하나되는 삶을 누리는 모습이다.

*허 경진 교수의 번역을 거의 따랐음.

 

 

고전 읽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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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

옛날에 나온 책이라고 꼭 고전인 것도 아니고, 근래에 나온 책이라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고전이란 사람들에게 오래 오래 영향을 미치는 책으로 그것은 검증된 지혜를 담고 있다.

검증되었다고 해서 고전에 담긴 내용이 모두 진리라는 뜻은 아니다. 내용의 가치가 인정되었다는 의미이다.

고전은, 때로 사람들의 답답한 가슴을 뚫어주기도 하고, 때로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주기도 하며, 때로 외로운 영혼의 벗이 되어주기도 한다. 나 같이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에게는 영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읽는 사람이 어떤 심정과 기대로 만나는가에 따라 고전은 팔색조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고전을 들면 나는 비밀의 성으로 들어간다. 낡은 표지의 냄새를 맡고 누런 속지를 여는 순간 가슴이 떨리고 동공이 확대된다. 거침없는 탐험과 만남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곳에는 공간적 제약도, 시간적 제약도 없다. 몇 백년 전 정도는 가까운 과거이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신화 속의 인물을 만나기도 하고 심지어 창조주를 만나기도 한다.

인생은 짧다. 일생 동안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되랴. 고전을 ‘낡은 책’이 아니라 ‘지혜의 샘’으로 보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다.

고전을 가까이하는 학생들을 보고 싶다. (윤영민, F/B, 2015/03/24)

자연과 하나가 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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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의 시가 지닌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자연, 사람 그리고 시인 자신이 전혀 구분될 수 없도록 하나가 되는 모습이다.

강천사에 효선이라는 지인을 만나고 오는 길에 쓴 시로 추정되는 剛泉寺 留別孝先(강천사 유별효선: 강천사에 효선을 남겨두고 오다)에는 하서의 그러한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 있다.

山中一雨過 樓前溪水碧(산중일우과 누전계수벽)

산중에 한차례 비가 내리니 누각앞 시냇물이 푸르러졌다

巖高日欲西 古樹長百尺(암고일욕서 고수장백척)

바위 위의 해는 서쪽으로 지려하고 고목의 키는 백자가 넘는다

僧徒送行客 兩兩座溪石(승도송행객 양양좌계석)

스님들은 방문객을 배웅하려고 짝지어 물가에 앉아 있다

握手謝留伴 杯深傾不惜(악수사유반 배심경불석)

손잡고 벗과 작별하면서 잔을 가득 채워 아낌없이 마시네(술마시는 것을 不惜身命, 몸이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불도를 닦는데다 비유한 것인가?)

寒風何處來 颯颯掠雙頰(한풍하처래  삽삽략쌍협)

어디선가 불어오는 찬바람이 홀연히 두 빰을 훔치는구나(멋진 표현이다! 삽삽은 바람불어오는 소리를 느끼게 하는 의성어 아닌가?)

落葉沒前徑 蒼蒼間松竹  (낙엽몰전경 창창간송죽)

낙엽은 오솔길을 파묻고 군데군데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다(지름길 경, 창창은 푸른 모습을 느끼게 하는 의태어?)

一醉歸去來 幽禽響空谷(일취귀거래 유금향공곡)

한껏 취해 돌아가려니 새소리가 빈골짜기를 울리네(‘귀거래’라는 표현을 빌려와서 세상을 등진 도연명과 같은 심정을 슬쩍 내보인 것은 아닐까? 그윽할 유 자를 쓴 이유가 무얼까?)

석양에 친구 스님과 헤어지는 순간이다. 늦가을 강천계곡은 아름다우면서도 쓸쓸하다. 그러한 계곡의 모습이, 헤어짐의 아쉬움, 그리고 한 잔 술과 어우러진다.

자연주의자, 또한 낭만주의자로서의 하서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조선 제일의 학자 중 한 명이었던 하서의 학문법

하서가 지은 五言古詩(오언고시) 중 ‘讀白鹿洞規(백록동 학규를 읽고)’를 보면, 그의 학문법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學問且思辨(학문차사변) 篤行在先知(독행재선지)

身修而可推(신수이가추) 應接皆得宜(응접개득의)

此乃爲學要(차내위학요) 儒者當孜孜(유자당자자)

  1. 배우고 묻고 그리고 생각하고 따지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다음 성실하고 친절하게 행동한다.
  2. 그러면 심신을 수양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면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데 있어 적절함을 얻게 된다.
  3. 학문의 요체가 거기에 있으니, 선비는 마땅히 이를 실천하는데 힘써야 한다.

이 시에서 하서는, 성인이 되는 길은 그 뿐인데, 정작 세상의 선비들은 그 일은 열심히 하지 않고 글만 멋지게 지으려하고 명예와 이익을 쫒는데만 열심이라고 한탄한다.

배우고, 묻고, 생각하며, 따진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개념들의 체계인 지식은 강의나 책은 물론이고 인터넷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객체화된 지식일 뿐이다. 그 지식을 얻으려면, 즉,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누구나 반드시 일정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식의 담지자(혹은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지식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담지자에게 살아있는 모습으로 체화되어야 한다. 파편화되거나 박제화되어 사용될 수 없는 지식, 혹은 실천되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누구나 반드시 “생각하기(thinking)”라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무리 강의를 많이 듣고, 아무리 책을 많이 읽어도, 그리고 인터넷에서 아무리 자료를 살피고 다녀도, 생각하기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생각하기는 때로 즐겁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수고스럽다.

생각하기란 대단히 적극적인 행위이다. 그것은 통상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책을 읽으며 저자에게 이론적으로 도전하고, 강의를 들으면서 교수에게 질문을 던지고, 동료 학생들과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생각하기의 제1단계이다. 이 단계의 핵심을 한 마디로 하면 ‘대화’이다. 대화는 가장 오랫동안 검증된 지식 획득의 방법이다.

생각하기의 다음 단계는 제1단계에서 얻은 지식을 스스로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이다. 손으로(혹은 키보드/마우스로) 쓰고 그려야 한다. 파편화된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제1단계에서 얻은 지식을 반드시 스스로 재구성해야 한다. 이 단계에서 자기만의 관점이나 독창적인 발상이 들어가면 지식의 변종이 탄생하거나 새로운 이론이 창조된다.

생각하기의 제3단계는 지식을 사용하거나 실천하는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지식일지라도 사용되거나 실천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그리고 지식을 사용하고 실천하면서 그것을 성찰하면 우리의 지식은 비로소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된다. 그 상태를 지식의 체화라고 부른다.

배운 내용을 묻고, 생각하고, 따지지 않으면 어떤 지식도 자기 자신의 지식이 되지 않는다. 이는 5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리임에 분명하다.

더구나 학자들이 참다운 지식을 획득하고 실천하는데 노력하지 않고, 겉멋을 내고 권력과 명예만 탐한다는 하서의 지적은 오늘날 더욱 타당하지 않나 싶다. (2016/0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