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부대’, 어떻게 볼 것인가

자기가 보고싶은 것만 보고 자기 입맛에 맞지 않은 정보는 회피해 버리는 확증편향, 자신의 생각이나 입장과 다르면 엉터리라고 폄하하고 같으면 훌륭하다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강화하는 편향동화, 요즈음 둘 다 모두 심각한 사회문제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가짜뉴스는 확증편향이나 편향동화의 중요한 원인이며 결과로 제시된다. 나아가 가짜뉴스가 양산되고 유통되는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그 문제의 근원으로 진단된다. 언뜻 보기에 별로 잘못되지 않은 추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혹시 그 논리에 헛점은 없는 것일까? 과연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때문에 사회갈등과 반목이 더 심각해진 것일까? 혹시 진짜 원인은 딴 것인데 너무 가볍게 현상적인 것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확증편향이라는 심리적 현상이나 태도가  왜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해진 것일까? 혹시 어떤 심각한 위기감 때문은 아닐까? 혹시 깊은 좌절감 때문은 아닐까? 할아버지가 극우 유튜브 채널을 구독하고 나아가 ‘태극기 부대’가 되는 것은 유튜브 방송의 설득력 때문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느끼는 좌절과 위기감 때문은 아닐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죄’는 확성기 역할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 인터넷과 소셜미디어가 편을 가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사회 분열을 좀 더 극적으로 드러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 갈등과 분열에 대한 해법을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갈등이 원천적으로 발생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확증편향과 편향동화가 중요한 사회심리적 현상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에는 깊은 구조적 원인이 존재할 것이라는 추정이다.

좌절과 방황은 사회심리적 측면에서 확증편향과 편향동화의 원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좌절과 방황 또한 설명되어야할 현상이다. 우리 사회의 노인은 왜 좌절하고 방황하는가? 우리 사회의 청년은 왜 좌절하고 방황하는가? 거기에는 같은 이유도 있고 다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노인에 관해서만 생각해보자.

노인의 좌절과 방황의 가장 심각한 요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평생 살아온 자신의 삶이 인정받지 못하고 심지어 부정당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거의 모든 노인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현실, 버려졌다고 느껴지는 현실과 씨름하며 살아야 한다.

현실에서 존재를 부정당하며 자신을 투명인간처럼 느끼는 노인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자신의 과거이다. 그런데 노인에게, 누구에게라도 그렇겠지만 과거는 돌이킬 수도 바꿀 수도 없는 고정된 것이다. 이미 막이 내려진 공연처럼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던 남은 생애 동안 부둥켜 안고 가야할 과거이다. 잘했던 못했던 이미 끝난 공연인 것이다. 피리어드!

노인은 자신의 과거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거나, 그런대로 조화하면서 살거나,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타협하고 살 수 있어야 한다. 노인에게 있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자신의 과거가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심각한 인지부조화 상황이다.

현재는 투명인간 대접을 받고 과거는 평생 헛살았다고 부정당하는 노인의 심정을 상상해보라.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의 상황이다. 그 상황을 인정의 위기(recognition crisis)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의 현재와 과거가 모두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인이 그 극도의 상황에서 벗어날 길은 없는가?  가짜뉴스, 확증편향, 그리고 편향동화가 그 절망적 상황에 돌파구가 되어주는 것은 아닐까?

‘태극기 부대’에 참여한 노인들은 ‘국가의 장래’가 걱정되어 나왔다고 말한다:

“나라가 빨갱이한테 넘어가 공산화되기 직전이다, 나라가 풍전등화에 처해 있어 내가 나서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어떻게 지키고 만들어온 나라인데….문재인이 나라를 통채로 김정은이한테 갖다 바치려 하고 있다.”

그 노인들은 정말 그 근거없는 주장을 믿고 있는 것일까? 나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 노인들은 황당하기 짝이 없는 그런 주장을 그대로 믿고 있을까? 극우 유투버들의 설득력이 좋아서?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나는 ‘태극기 부대’ 현상는 인정 투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인들은 극우 유투버들의 주장에서 자신들의 과거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을 발견하고, 광화문에서 자신의 현재를 유의미하게 느낀다. 그들은 광화문에서 목소리를 높이면서 오랜만에 인지부조화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자신이 살아있음을, 인정받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들의 목소리에 사회가 귀를 기울인다 혹은 기울일 것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홀로 있을 때 느껴보지 못한 희열이다. 이 못마땅한 사회는 물론이고 자식조차도 주지 못한 즐거움이다.

그렇게 해석될 때 그 노인들이 지닌 ‘황당한’ 믿음이 합리적으로 설명된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황당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합리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면, ‘태극기 부대’의 시위를 확증편향의 결과를 해석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 현상에 대한 설명을 주기보다 의문을 더 많이 낳는다. 이는 ‘태극기부대 시위’가 확증편향 현상임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 문제를 확증편향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잘못된 해석과 해법에 도달하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대안적 접근을 제시하려는 것이다.

가짜뉴스, 확증편향, 그리고 편향동화은 현재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그러나 그것을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갈등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설명이 필요한 사회현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2021-08-20)

<참고 문헌>

최현숙. 2017. “모든 밀려난 존재들의 악다구니는 아름답다”, <문학동네> 제24권 제1호. 1~16쪽.

세상을 위하는 노인은 없다

세상 기준으로 조금이라도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들이 노년에 보이는 공통된 행태 중 하나는 과도한 자기 확신과  고집이다. 자신의 주장이 옳고, 자신의 판단이 틀림없으며, 자신이 가장 현명하다고 믿으며 남의 말에 귀를 닫아버리는 행태이다.

우리 사회에서 노년의 아집은 개인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문제이다. 소수의 노인들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 수많은 노인들에게서 보이는 문제라는 말이다.

우리를 가족이나 이웃과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근본적인 조건은 자신의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식타인에 대한 신뢰이다.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다는 인식, 다른 사람도 본인 이상으로 세상 문제를 잘 이해하고 잘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을 때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과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

그런데 언제 부터인가 노인들이 변했다. 우리 사회에 관대하고 자애로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고집불통의 노인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것이 노인들의 손에 스마트폰이 주어지고 인터넷과 유튜브를 즐겨 쓰면서 부터가 아닌가 싶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노인들에게 보다 넓은 세계, 보다 다양한 관점, 보다 많은 사람들과의 소통 창구가 아니라 자신들만의 세계, 자신들만의 관점, 자신들 끼리의 소통만 일어나게 만드는 폐쇄 회로로 작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 스마트폰과 인터넷이 초래한 가장 심각한 사회적 부작용 중의 하나가 바로 노년의 폐쇄 회로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것은 가정 내 소통의 단절, 나아가 가정의 평화마저 위협하고, 무덤에서 나온 ‘좀비’들이 젊은이들을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고 있다. 사회적 관대함과 포용의 상징이 되어야 할 노인들이 배타적 태도와 불통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과 편향동화(biased assimilation)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남북의 이념 대립과  분단, 비극적인 한국전쟁, 그리고 경이적인 경제발전을 경험한 노인 세대에서 그러한 사회 심리 현상이 두드러 진다. 자신들이 품어왔던 시대정신이 퇴조하고 자신들의 공헌과 존재가 송두리째 부정당하고 있다고 느끼는 노인들이 시대착오적 이념 대립을 부추기는 세력들의 주장에 쏠리면서 자신들의 믿음에 맞는 증거와 주장만 찾고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주장을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인터넷 덕분에 노인 세대가 퇴장하면서 안고 갔어야 할 낡은 이념과 사상이 오히려 부활하고 생각의 세대 교체, 정치와 사회 권력의 세대 교체가 지연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하나의 좀비 현상이라고 본다. 생명 없는 자들이 마치 생명 있는 존재인 것처럼 나돌아 다니며 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디지털 시대에 노인들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사회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관용의 모범을 보이고 후 세대를 믿어주는 일이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순간 노인은 좀비가 된다. 세상에 튀어나온 노인 치고 세상을 참으로 위하는 사람은 없다. “노인을 위한 세상이 없는” 것 이상으로 세상을 위한 노인은 없다. 노인의 애국적 행동은 시대착오적이고 반사회적인 집착일 뿐이다.

노인의 목소리가 큰 가정에 평화는 없다. 노인들의 목소리가 큰 사회에도 평화는 없다. 어찌해야 좋을까. 나도 노인이니 그냥 안타까워 할 수밖에….(2020-09-21)